절대천왕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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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56화
56화
좌소천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미소가.
“당연히 제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궁주라면?”
“그래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없다면 몰라도.”
질렸다는 듯 도유관이 어깨를 으쓱 추켰다.
“정말 광오하군.”
“직속무사는 최우선적으로 직속상관의 명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제천신궁의 법이지요.”
“법이 그렇다 해도 그게 어디 제대로 지켜지던가?”
“다른 사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법대로 합니다. 법이 바뀐다면 몰라도. 그러니 제 직속무사는 무조건 제 말을 우선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 목숨을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뜻 도유관의 입가에 하얀 웃음이 맺혔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렇게 웃으니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아마 앞으로도 마음에 드는 일이 더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웃을 일도.
그날 일대에서 오대에 합류한 사람은 도유관을 제외하고도 네 명이 더 있었다.
남자 셋에 여자가 하나.
세 남자는 서른 전후였고, 홍일점인 여인은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그들은 좌소천이 나올 때까지 오대의 연무장 구석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지미, 그냥 거기다 놔두지, 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거야?”
기다리기가 지루한지 곡추렴이란 자가 투덜거리며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홍일점인 여인은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투덜거리는 곡추렴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의 이름은 전하련.
곱상한 얼굴에 키가 조금 커서 그렇지,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잘빠진 몸매였다. 조금 가꾸기만 하면 미녀 소리를 들을 법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몸매나 얼굴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꼬우면 떠나. 그러면 될 거 아냐?”
곡추렴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집, 입이 두 개 뚫렸다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그러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걱정 마. 당신보다 먼저 뒈지지는 않을 테니까.”
“주둥이 나불거리는 걸 보니 남자 맛도 못 본 계집이군.”
“당신 같은 사람은 마차로 가득 실어다 줘도 필요 없어. 어디 볼 데가 있어야지? 보나마나 물건도 새끼손가락만 할 걸?”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낄낄낄, 계집이 제법이군.”
“말발 하나는 끝내주는데? 곡가가 못 당하겠어.”
곡추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디 내 물건이 얼마만 한지 보여줄까? 어때, 조용한 데로 갈까?”
“볼 것도 없다니까? 괜히 하루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못생긴 당신은 저쪽에 찌그러져 있어.”
곡추렴의 눈이 쭉 찢어졌다.
“싸가지라고는. 어떤 놈팡이 씨를 받아 나왔는지 몰라도 알 만하다, 이년아.”
말로는 안 되겠는지 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전하련이 기둥에서 등을 떼고 곡추렴을 향해 걸어갔다.
“흐흐흐, 이제야 조용한 데로 갈 생각이 든 거냐?”
“아니, 당신 썩은 주둥이 좀 닫아주려고.”
“미친년.”
그사이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이 장으로 줄어들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자광이 연무장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저만치서 벌어지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말리지는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여인이 보기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쉽게 지지는 않겠지.’
그의 생각대로였다. 전하련은 쉽게 지지 않았다.
아니, 지기는커녕 허리에 감긴 채찍을 푼 지 십 초가 지나기도 전에 곡추렴의 칼을 날려 버리고 그로 하여금 땅바닥을 기게 했다.
퍽!
“어디 다시 말해봐. 놈팡이? 네가 내 아버지를 알아?”
전하련의 목소리에 이어 손에 들린 채찍이 곡추렴을 후려쳤다.
짜작!
“커억!”
“쥐똥만 한 것이, 같잖은 물건 하나 달렸다고 행세하겠다는 거야?”
짜자작!
채찍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릴 때마다 곡추렴의 몸이 비틀렸다.
그제야 이자광이 나섰다.
“멈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짝!
“한 번만 더 허튼소리하면 입을 찢어버릴 거야. 명심해.”
전하련은 한 번 더 곡추렴을 후려 패고는 채찍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이자광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곡추렴을 보고는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 사람을 저쪽으로 데려가시오.”
두 사람이 급히 곡추렴을 떠메고 연무장을 벗어나자 이자광이 그녀를 빤히 보며 눈을 빛냈다.
“추룡편(趨龍鞭)인가?”
전하련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알아?”
“말은 들었지. 직접 본 것은 처음이지만.”
“제법인데? 다른 사람들은 보고도 모르던데 말이야.”
“사부에게 들은 적이 있거든. 그런데 이름이 뭐지?”
“전하련.”
“나는 이자광이라고 한다.”
“곰탱이 이자광?”
이자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때 전하련이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잘생긴 곰인데?”
이자광의 일그러진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왠지 몰라도 그 말이 무진장 기분 좋게 들렸다.
“하하, 너도 입이 걸어서 그렇지, 뜯어보면 못생긴 여자는 아니야. 자신을 가지라구.”
“당연히 곰탱이보다야 백배 이쁘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묘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듣기 싫어하는 곰탱이라는 말을 쓰는데도 전하련이 전혀 미워 보이지 않는다.
이자광은 그런 자신이 이상해서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 대주 만나려고 있는 거냐?”
전하련이 좌소천의 방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할 말이 그렇게 많다고 안 나오는 거지?”
그때다.
덜컹, 문이 열리고 좌소천과 도유관이 방을 나왔다.
좌소천은 밖에서 벌어진 소란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이, 당신이 대주야?”
그때 전하련이 큰 소리로 물었다.
좌소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대주다.”
“비무에서 이기면 대주 자리를 내준다고 했다며?”
“물론이지.”
“그럼 나하고 한번 해.”
“지금 말인가?”
“왜, 싫어?”
그런데 좌소천이 대답하기 전에 도유관이 나섰다.
“그전에 나하고 붙어보자.”
전하련이 움찔했다.
그녀도 도유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도유관은 그녀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왜 당신하고 싸워야 한단 말이죠?”
“도 형.”
좌소천이 나직이 도유관을 불렀다. 그러자 도유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나도 대주만큼 자존심이 있소이다. 내가 대주에게 져서 직속무사가 되었는데, 나도 못 이기는 작자들이 대주에게 덤비는 꼴을 나더러 어떻게 봐주란 말이오?”
그 말에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혈심부 도유관은 현재의 대주들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고수다. 그런데 그런 도유관이 순순히 패배를 시인하지 않는가.
모이산도 그렇고, 도유관도 그렇고,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스스로 패배를 시인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포규상도 진 것 같다고 하지를 않던가.
저 젊은 대주가 진짜 그렇게 강한가?
모두가 의문을 담은 채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나는 믿을 수 없어!”
그때 전하련이 추룡편을 옆으로 흘리며 소리쳤다.
도유관이 앞으로 나섰다. 가느다란 그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이 번뜩였다.
“믿던 믿지 않던 그건 자유다. 단, 대주와 싸우려면 나를 먼저 이겨봐.”
입술을 질끈 깨문 전하련이 좌소천과 도유관을 번갈아 보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퉤! 에이, 정말. 저 양반은 왜 갑자기 저러는 거야?”
마침 이자광이 보이자 그녀가 물었다.
“이봐, 곰탱이! 내 방은 어디지?”
곰탱이 이자광이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이리 따라와. 좋은 방 내줄 테니까.”
어깨를 쭉 펴고 돌아선 그는 누가 다른 방을 말하기 전에 전하련을 자신의 옆방으로 데려갔다.
3
공손양의 나이는 스물여덟.
그는 구화산 이화산장의 주인인 공손월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화신군 공손월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셋째인 공손양을 좋아했다.
월등한 자질도 자질이지만, 첫째와 둘째에 비해 셋째인 공손양이 판박이처럼 그를 닮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파생되었다.
공손양이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술에 취한 공손월이 숙부들 앞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를 했다.
“본 장을 잇는 사람이 꼭 첫째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말을 마침 시중들던 첫째 형의 부인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토록 단단하던 형제들 간의 우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일의 전말을 알게 된 공손양은 절대 남 앞에서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권리조차 두 형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소축에 머물며 수련에만 힘썼다.
심지어 혼인조차 미룬 채 은둔자처럼 지냈다. 혼인을 하지 않으면 가주가 될 수 없다는 이화산장의 가법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지 않던가?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드러나는 법.
공손양은 송곳이 드러나기 전에 이화산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형들을 위해, 이화산장의 평화를 위해.
말리는 부친에게는 담담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천하는 넓고도 큽니다. 소자는 더 넓고 큰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보름 전에 이화산장을 떠나왔다. 그리고 이화산장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종리명한과 사인학을 만났다.
두 사람은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이자광과 함께 공손양을 친형처럼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공손양이 그들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마침 제천신궁의 이자광을 찾아가던 참이었다.
제천신궁에서 모집하는 패천단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공손양은 그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하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두 사람에게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두가 한 사람의 수하가 되었다.
공손양은 빙그레 웃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북극성이 찬란한 빛을 뿌리고, 주위에 크고 작은 별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길 잘한 것 같군. 내 나이 또래에서 적수가 없을 거라 생각한 오만이 단번에 부서졌으니 말이야.”
포규상이 패하고, 독불장군 도유관이 좌소천의 직속무사가 되었다고 한다.
말 몇 마디에 그리되었을 리가 없다.
과연 자신이라면 그리할 수 있었을까?
자신도 그들을 이길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수십 초의 격전을 치러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이긴다 해도 마음까지 얻을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좌소천은 단숨에 그 일을 해냈다.
실력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도 자신보다 위라는 뜻. 나이가 어린 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역시 하늘은 넓고도 크다.
그걸 안 것만으로도 그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오밤중에 뭘 보고 그렇게 즐거워 하슈?”
한참 즐거움에 젖어 있는데 뒤에서 이자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공손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자광의 곰처럼 커다란 몸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봤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자광이 밤하늘을 바라보고는 커다란 눈을 굴렸다.
“그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유?”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나는 지금 너무 즐거워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거참, 이거 아무래도 형님을 그냥 이화산장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수.”
그러든 말든, 공손양은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환하게 웃었다.
“나는 새로운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그 옆에서 지켜볼 것이다. 아주 즐겁게 말이다.”
“휴우…….”
이자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대주를 만난 것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이제 형님까지…….’
그나마 위안이라면, 전하련을 자신의 옆방에 머물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크크크. 성깔이 있어서 그렇지, 꽤나 예쁘단 말이야.’
밤하늘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좌소천의 눈에 뜨인 것은 우연이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몸도 풀 겸, 오대 건물 뒤쪽의 연무장으로 향할 때였다. 건물을 돌아가는데 커다란 곰이 서 있었다. 고개를 든 것이 하늘을 바라다보는 듯했다.
‘대체 저 곰이 왜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까?’
서너 걸음을 더 옮기자 그제야 곰에 가려진 공손양이 보였다.
좌소천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공손양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