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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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사인학이 엽차를 마시다 말고 뿜어냈다.
냉막하던 종리명한의 입술이 길게 늘어지고, 공손찬의 잘생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덕분에 탁자의 분위기가 제법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렇게 일각이 지날 즈음, 좌소천은 동석한 네 사람의 신분을 알고 눈빛을 반짝였다.
제천신궁 무력의 중심은 사단이었는데, 이자광은 그 사단 중 최근에 생긴 패천단의 칠조장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관심이 가는 사람은 공손양이었다.
그는 구화산 이화산장(理火山莊)의 소주인이었다. 이화산장은 인원이 소수인데다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강호에 널리 알려진 문파가 아니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이화산장의 무력이 여느 대문파에 못지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백여 명의 인원으로 그 정도라는 것은 적어도 절정의 고수가 열 명 이상은 있다는 말.’
좌소천도 구봉장에서 책을 보지 않았다면 이화산장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종리명한은 안휘십대고수 중 하나인 한백검(寒白劍) 사마군의 제자였고, 사인학은 마성(麻城) 일대의 세력가인 사가장의 소장주였다.
넷 다 젊은 무사들 중에서 나름대로 고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었다.
‘과연 제천신궁이군. 이런 자들이 스스로 걸어 들어갈 정도라니.’
좌소천이 묵묵히 듣고만 있는데, 이자광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소문은 들었지요?”
공손양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혈풍에 대한 이야기 말인가?”
“요즘 그 일 때문에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대체 그녀들이 누군데 혈풍을 일으키는 것인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니 더 골치 아픕니다. 그녀들이 언제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사실 서둘러서 무사들을 모집하는 것도 그 일의 영향이 큽니다.”
좌소천에게도 필요한 정보였다. 제천신궁의 조장이라면 상당한 정보를 접하고 있을 터. 좌소천은 포자를 먹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때 이자광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들어온 정보로는, 그녀들이 의창에서 일을 벌인 이후 곧장 북상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의창(宜昌)에서 북상하면 무당산 쪽이다. 영허 진인에게 목숨의 구함 받은 그로선 무당에 빚이 있는 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발견되었나?”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의창과 보강(保康) 중간인 점등(店登)에서 신비한 백색 마차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길 면사를 쓴 여인들이 그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디를 가려고 북상하는 거지?”
“그걸 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만일 보강으로 가는 길이라면 무당이 지척이다.
‘설마 무당으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
그 중간에도 크고 작은 문파가 상당수 있다. 제법 유명한 곳만 해도 당장 대여섯 곳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보강의 백가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장의 유운산장, 포계의 추운보, 혈곡, 마령문 등이 무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어쩌면 공연한 걱정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녀들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군.’
그때였다.
와직! 와장창!
갑자기 탁자가 부서지고 집기들이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좌소천의 생각을 방해했다.
“응? 저 사람은?”
고개를 돌린 이자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망설이는 표정.
좌소천도 고개를 돌려서 소란이 벌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탁자가 부서지고 집기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는데, 부서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네 사람이 대치한 상황이었다.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고, 중년인 하나와 삼십대 초반의 장한 둘이 의자에 앉은 사람을 포위한 형국이었다.
포위한 세 사람이 모두 검을 뽑은 상태.
살기가 서서히 객잔을 짓눌렀다.
사람들이 놀라서 급급히 자리를 피하자, 포위하고 있던 세 사람이 탁자를 밀치고 자리를 넓게 벌렸다.
“흥! 도요관, 우리가 누군지 모르지는 않겠지? 복수를 위해서 네놈을 삼 년간 뒤쫓은 우리다. 오늘은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도망? 누가? 내가 왜 도망간단 말인가?”
앉아 있는 자는 삼십 중반으로 보였는데, 하관이 쭉 빠진데다 눈매가 가늘어서 조필만큼이나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이자광이 나직하니 공손양에게 말했다.
“저자가 바로 두 개의 손도끼로 백 명의 가슴을 쪼갰다는 혈심부 도요관입니다, 형님.”
혈심부(血心斧) 도요관에 대해서 강호에 알려져 사실은 많지 않았다.
그가 천주산(天住山)에 존재했던 귀부문의 후예라는 것. 삼 년 전 천주산 북부 악서 일대를 호령했던 오기문(五旗門)이 그의 손에 멸망했다는 것 정도뿐.
말이 그렇지, 혼자서 무사 백 명을 죽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도 그 일전에서 중상을 입고 삼 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도유관이라는 이름이 깊게 새겨진 후였다.
이자광이 그를 아는 것은, 그가 이틀 전에 제천신궁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자광이 이곳에 있는 이유도 사실은 도유관 때문이었다.
좌소천도 구포방의 책에서 도유관에 대한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최근 오 년 사이에 유명해진 무인 이백 명의 이름에 그의 이름도 올라가 있었으니까.
‘저자가 사문의 복수를 위해서 혼자 오기문에 뛰어들었다는 자군.’
그리고 세 사람은 오기문의 복수를 위해서 도요관을 죽이려는 자들인 듯했다.
물고 물리는 복수의 연환.
상황을 지켜보는 좌소천의 눈이 깊게 침잠되었다.
그때다. 도요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포위하고 있던 세 사람이 그를 공격했다.
“놈을 쳐! 도끼를 꺼낼 시간을 주면 안 된다!”
그 순간, 도요관의 양손이 밖으로 나오고, 도끼 그림자가 그의 몸 일 장 반경을 뒤덮었다.
쩌저저정!
“물러서지 말고 놈을 죽여!”
“죽어라!”
“죽어……. 으아악!”
퍼버벅!
순식간에 두 장한이 도끼에 난자된 채 뒤로 튕겨졌다.
이마가 갈라지고, 가슴이 갈라지고, 어깨가 쩍 벌어진 두 사람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다가 부서진 탁자 위로 쓰러졌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객잔 안에 비릿한 혈향이 풍겼다.
하지만 세 사람은 오기문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 더구나 죽음을 작정한 자들이었다.
도유관은 가까스로 둘을 처리했지만, 중년인의 검은 미처 피할 시간이 없었다.
“흐흐흐, 지옥으로 가거라!”
중년인의 검이 도요관의 등을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검을 등에 꽂은 도요관이 그대로 돌아서며 쌍부를 휘둘렀다.
퍽퍽!
두 개의 도끼가 중년인의 이마와 심장을 찍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중년인은 눈을 부릅뜬 채 몸이 굳어버렸다.
“어, 어떻게…….”
“너처럼 등 뒤를 노리는 비겁한 놈들 때문에 돈을 좀 썼지.”
중년인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그의 검이 도요관의 등 쪽 옷을 찢으며 미끄러졌다.
쨍그랑!
떨어진 검 끝에는 혈흔이 묻어 있었다.
도요관의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가죽, 그곳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무두질 된 가죽을 걸친 듯했다.
‘그 정도로는 검기를 막아낼 수 없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도요관의 얼굴이 창백했다.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
숨을 몰아쉰 도요관은 도끼를 든 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이자광과 눈이 마주치자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좁혔다. 이자광이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상관할 건가?”
이자광은 피로 범벅된 객잔 안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정당한 대결이었소. 나는 관여하지 않겠소.”
이자광의 말이 떨어지자, 도유관은 손에 들린 도끼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점소이가 다가왔다.
“저… 음식을 내올깝쇼?”
사인학이 눈살을 찌푸리며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나?”
“그, 그렇지만…….”
“흐음, 반값만 받는다면 생각해 보지.”
‘쪼잔한 놈!’
점소이는 분통이 터졌지만, 아까운 음식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주인 어른께 그리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음식이 나오면 더 이상 자리에 있기도 어색한 상황. 좌소천은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2
아침부터 제천신궁의 정문 앞으로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제천신궁에서는 이십 명이 넘는 무사들을 내보내서 그들을 통제했다.
좌소천은 줄을 서서 자신의 순서가 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혁련무천을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방이 단절된 정보만 얻을 수 있을 뿐, 진짜로 중요한 정보는 얻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모든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간혹 위로 솟구치는 것도 있지만 그것 역시 다시 아래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정보를 얻는 것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아래서부터 올라가는 게 나았다.
‘일 년, 그 안에 혁련무천조차 잊어버린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상층부의 주요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을 듯했다.
“이봐, 자네도 제천신궁의 무사가 되려고 왔나?”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자였다. 그는 등에 커다란 칼을 메고 있었는데,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좌소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하하! 보아하니 강호 초출인 것 같은데, 혹시 안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게. 내 친구가 제천단의 조장이라네.”
그때 앞에서 제천신궁의 무사가 소리쳤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시끌벅적하던 좌중이 조용해지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인적 사항을 적고 원하는 부서와 가진 바 재주에 대해서도 적으시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서기에게 자세히 일러주도록 하시오!”
그가 말을 마치고 물러서자 마침내 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근 반 시진이 되어서야 좌소천의 차례가 되었다.
이름: 천소
익힌 무공: 이것저것
쓰는 무기: 도
원하는 부서: 패천단
서기는 좌소천이 무공난에 이것저것이라고 적자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힐끔거렸다. 그러다 원하는 부서가 패천단인 것을 보고 흠칫하며 올려다봤다.
대부분은 오대나 내외 십당을 지원했다. 사단을 지원하는 사람은 백 명 중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사단을 지원하는 자들의 유형은 대부분 둘 중 하나다.
허풍쟁이, 아니면 진짜 고수.
그런데 그러한 사단 중에서도 패천단은 만들어진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단이었다. 그런 만큼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서, 심약한 사람은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오직 힘만이 우선인 곳.
패천단은 그런 곳이었다.
서기는 좌소천이 패천단을 지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눈빛을 달리하고 바라보았다.
“정말 패천단에 들어갈 생각이오?”
“그렇소.”
서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육(六)이라 쓰인 위에 도장을 쾅! 찍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패천단이라 쓰인 곳이 있을 거요. 이걸 가지고 그곳으로 가면 되오.”
좌소천이 패천단의 건물로 들어갔을 때까지 패천단을 희망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서 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의외로 근육질의 사나이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
“제천단의 조장이 친구라 하지 않았소?”
“음하하하! 꼭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사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글을 잘 몰랐다. 그래서 서기에게 자신도 좌소천이 응한 곳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조금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그렇지 인상이 괜찮은 친구였다.
그리고 굳이 이유를 하나 더 대자면, 무명 무사인 좌소천과 함께하면 그만큼 자신이 튈 것 같았다.
설마하니 제천신궁에서 제일 기가 드세다는 패천단에 지원할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제길! 하필 패천단이 뭐야, 패천단이!’
그렇다고 이제 와서 희망 부서를 바꿀 수도 없었다.
곧 죽어도 자존심은 지켜야 했다. 그러지 못할 거면 불알을 떼어놓고 다녀야 한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지미, 죽어봐야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잠시 후, 세 사람이 더 패천단의 건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본 좌소천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