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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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쾅!
정문이 부서져 나가고, 면사를 쓴 여인 열두 명이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시진. 장춘장원 안에선 끊이지 않고 비명이 흘러나왔다.
구경삼아 장원으로 몰려들었던 장양 사람들은, 부서진 정문 사이로 보이는 수십 구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서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날 장춘장원의 무사 백스물세 명과 장주의 가족 서른두 명이 죽임을 당했다.
장양의 현청에서 포졸들이 장춘장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반쯤 미쳐 버린 일반 가솔들만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날 벌어진 살겁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장한궁의 삼백 년에 걸친 한이 중원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거늘. 장춘장원의 혈겁이 그 시작이거늘.
백색 마차 앞에 한 여인이 부복했다.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사옵니다, 신녀시여!”
마차 안에서 영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녀의 목소리였다.
“수고했어요. 아직은 남들의 눈에 너무 띄어서는 안 된다는 점, 잊지 말도록 하세요.”
“철저히 주지시키고 있사옵니다.”
“곧 세상에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거에요. 그때까지만 조심하세요.”
“예, 신녀시여!”
“파파, 현재 본 궁의 제자들을 몇 곳에 보냈죠?”
신녀가 묻자, 백색 마차 안에서 한령파파의 자애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한녀들이 의창의 한검문을 비롯해서 다섯 개 문파를 방문할 겁니다, 신녀.”
5
사월이 시작되자마자 혈풍을 타고 피비린내 나는 소문이 퍼졌다.
삼월 말경 호북 서쪽에서 시작된 혈풍은 장강을 타고 동진하더니 사월이 되자 더욱 거세졌다.
서풍에 섞인 비릿한 혈향은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지독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장강의 물결을 주시했다.
그 와중에 또 하나의 소문이 장강을 타고 내려왔다.
혈풍이 분 곳에는 깃발이 하나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피로 쓰인 글씨가 채 마르지도 않은 깃발이.
[여인에게 한(恨)을 심어준 자여, 하늘이 그대들을 심판할 것이다!]
사람들은 추측했다.
-범인은 여인들인 것 같다.
혈풍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얼굴을 가렸는데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얼마나 강한지 일류고수들도 그녀들의 검에 맥없이 죽어갔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들이 혈겁을 저지른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자는 근처에서 마차를 봤다고도 했고, 어떤 자는 하늘을 날아서 사라졌다고도 했다.
분명한 것은, 그녀들을 쫓아간 사람들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피바람은 칠 일 동안 불었다.
그리고 칠팔백의 목숨을 집어삼킨 후 어느 날 갑자기 잠잠해졌다.
하지만 혈풍이 완전히 멈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혈향이 진득한 폭풍전야!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서쪽을 주시했다.
6
무은도에서 돌아온 좌소천은 구포봉이 모아놓은 정보를 열흘에 걸쳐 탐독했다.
강호의 상황과 인물에 대해서 최대한 알고 떠나라는 구포봉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열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좌소천에게는 어느 때보다 귀중한 열흘이었다.
좌소천이 근 백여 권에 달하는 책자를 다 읽고 마지막 권을 내려놓은 사월 초사흘. 의창에서 벌어진 다섯 번째 혈겁에 대한 정보가 구포방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좌소천과 구포봉이 마주 앉았다.
“어떤 여인들인지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습니까?”
좌소천의 질문에 구포봉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알려진 바가 없네. 워낙 신비스럽게 움직여서 전마성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던데…….”
전마성으로선 서쪽에서 불어오는 갑작스런 혈풍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제천신궁도 견제해야 하고 무림맹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판에 갑자기 날아든 짱돌이 뒤통수를 갈긴 마음일 터.
반면 좌소천과 구포봉에게는 호기였다. 전마성이 악양 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그만큼 신경을 쓰지 못할 테니까.
변수(變數)!
너무나 큰 변수였다.
그것이 얼마나 유용한지 구포봉도 알고 좌소천도 알았다.
구포봉이 먼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동안 호시탐탐 세를 늘이려 한 제천신궁이네. 아마 그들도 기회라 생각할 거네.”
그럴 것이다. 혁련무천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곧 어떤 움직임이 있을 거네. 가려거든 그전에 가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네만, 언제 갈 생각인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생각입니다.”
“언제 돌아올 건가?”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늦지는 않을 겁니다. 긴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을 주십시오.”
“알았네. 이곳은 걱정 말고 몸조심하게.”
7
“어떻게 생각하나?”
혁련무천이 묻자 사공은환이 답했다.
“보고만 있으면 강호가 웃을 겁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면서, 기회가 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하면, 누가 좋겠는가?”
“경험도 키울 겸 둘째공자에게 맡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혁련무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호승에게?”
“어차피 첫째공자께는 북쪽을 맡기실 것 아닙니까?”
“흠… 그놈 성질로 잘해낼 수 있을까?”
“겉으로는 불같은 성격처럼 보여도 속이 생각보다 꽉 찬 분이 둘째공자입니다.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주군의 피를 이어받은 분 아닙니까?”
“흐음…….”
혁련무천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더니 나직이 명을 내렸다.
“좋아. 호승을 수장으로, 제천단 백 명과 무천단 열 명을 준비해 놓아라. 전마성이 움직이면 즉시 움직여서 잠강에 지부를 설립할 것이니라.”
사공은환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천신궁의 서쪽 마지막 지부는 한천 지부다. 잠강은 한천의 삼백 리 서쪽에 있고.
잠강 지부를 설립한다는 말, 그 말은 잠강까지 세를 늘리겠다는 뜻이었다.
전마성의 코앞까지!
“존명!”
10장 사람, 사람들
1
신양에 도착한 것은 악양을 떠난 지 이틀 만이었다.
좌소천은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두 눈에 담고서 신양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목적지인 황강산까지는 오십여 리. 급할 것이 없었다.
헛소문이든 사실이든, 최근의 상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객잔과 주루. 좌소천은 겸사겸사 남문 근처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은 사람으로 꽉 차서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손님의 상당수가 무사들이었다. 제천신궁에서 무사를 모집한 소문을 듣고 천하 각지에서 무사들이 몰려온 것이다.
좌소천은 마침 구석진 곳에 자리가 나는 걸 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어이, 잠깐!”
좌소천이 의자를 잡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처음에는 자신을 부른 소린지 몰라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보셔!”
누군가가 다시 불렀다.
그제야 의자를 잡아당기려던 좌소천이 고개를 돌렸다.
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등과 옆구리에 무기를 걸친 자들. 모두 이십대 중후반의 청년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강한 기운을 갈무리한 고수들이었다.
“나를 불렀소?”
“하하하! 맞소!”
셋 중 짙은 눈썹이 길게 뻗은 청년이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 웃는 얼굴과 달리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별일 아니오. 형장은 혼자지만 우리는 세 사람 아니오? 해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부른 거라오.”
당연히 비켜줘야 한다는 투.
좌소천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대로 의자를 잡아당겼다.
“미안하지만 다른 자리가 없군요.”
“그러니 양보 좀 해달라는 거요.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하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 그러는 거니까.”
탁자에 딸린 의자는 여섯 개.
좌소천이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잠시 앉아 있다가 자리가 나면 옮기시오.”
그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자, 눈썹이 길게 뻗은 청년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거 꽤나 딱딱한 친구군.”
그때 뒤에 서 있던 냉막한 얼굴의 청년이 말했다.
“인학, 그의 말대로 앉아서 기다리세.”
눈썹이 길게 뻗은 청년, 사인학은 좌소천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려서 맨 뒤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고요한 눈을 지닌 그는 나이가 두 사람보다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였다.
“공손 형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맨 뒤에 서서 말없이 서 있던 청년, 공손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한 아우 말대로 하세. 소란 피우지 말고.”
사인학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좌장 격인 공손양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좌소천의 옆을 지나가며 싸늘한 눈으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럼 잠시 함께 앉겠소.”
세 사람이 의자에 앉자,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엽차잔을 내려놓았다.
“손님, 뭘 드시겠습니까?”
음식은 좌소천만 주문했다.
세 사람은 일행이 오면 같이 시키겠다며 주문을 미루었다.
점소이가 세 사람을 흘겨보고 돌아가자, 사인학이 좌소천에게 물었다.
“나는 사인학이라 하오.”
좌소천은 구포봉이 지어준 가명을 댔다.
“천소라 하오.”
“칼을 차고 있는 걸 보니 제천신궁에 가려는 거 같은데……?”
“그렇소.”
“사문이 어떻게 되오?”
“없소.”
어찌 들으면 삐딱한 말투다. 그러나 강호의 무사 중 홀로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사부도 없이 혼자 무공을 익혔단 말이오?”
“정식 사부라 할 만한 분은 없지만, 몇 분에게 가르침을 받긴 했소.”
“호오, 그렇소?”
말도 없고 냉막한 두 사람과 함께 다니다 보니 심심하던 차였다.
좌소천이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주니 사인학의 얼굴도 조금 펴졌다.
“천 형은 고향이 어디요?”
좌소천이 가만히 사인학을 바라보고 물었다.
“원래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소?”
종리명한과 공손양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인학은 멀뚱히 좌소천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좁혔다.
“천 형도 한번 말없는 일행하고 함께 사나흘 여행을 해보시오. 그러면 내 심정을 알 테니까.”
“산속에서 혼자 이 년 몇 개월간 지내본 적은 있소.”
“…….”
사인학의 입이 닫혔다.
종리명한과 공손양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조금 더 짙어지더니, 그들의 눈에도 서서히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종리명한이 고개를 돌리더니 손짓을 했다.
“여기네!”
곧이어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탁자 가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찍 왔군!”
주위의 시끄러움을 단숨에 잠재우는 목소리였다.
슬쩍 고개를 돌린 좌소천의 눈에 한 사람이 가득 찼다.
‘사람이 아니군.’
칠 척의 키. 일반 사람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 무게를 잰다면 족히 삼백 근은 나갈 것 같았다.
곰이 껍질을 벗고 인간 세상으로 튀어나온다면 눈앞에 있는 사람과 비슷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끼기긱!
그가 앉자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형님?”
그의 말에 공손양이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았네. 바쁜 사람을 이렇게 나오라고 해서 미안하군.”
“비상이 걸려서 나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천하의 공손양 형님이 구화산을 떠나왔는데요. 음하하하!”
그때 좌소천이 시킨 포자가 나왔다.
덩치는 음식이 좌소천 것만 나오자 의아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사인학이 사정을 말했다.
“천 형은 일행이 아니네. 빈자리가 없어서 잠시 합석하고 있었네.”
“그래?”
덩치는 미간을 좁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다른 자리의 사람을 쫓아내고 자리를 만들겠다는 표정이었다.
공손양이 그를 말렸다.
“이 자리도 괜찮네.”
“불편하지 않습니까?”
“불편하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인학이와 꽤 친해졌는데.”
“그래요?”
덩치가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좌소천이 입에 담긴 포자를 다 삼킨 후에야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서 포권을 취했다.
“이자광이라 하오.”
겉보기와 달리 예의를 아는 자다.
좌소천도 흔쾌히 마주 인사를 했다.
“천소라 하오. 어느 분처럼 궁금한 것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소.”
“예?”
“푸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