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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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0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76화
76화
1장 천하(天下)를 논해봅시다
1
이자광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고, 공손양과 도유관이 자연스럽게 좌소천의 양옆으로 서서 걸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대형을 갖추었다.
“긴장들 푸시오. 손님을 만나러 왔으니까.”
좌소천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던 싸늘한 기운이 수그러들었다.
그때 점소이로 보이는 자가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층에서 독작(獨酌)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조용한 말투. 조금의 긴장도 없다.
그 역시 진짜 점소이가 아니라는 뜻.
‘혼자라… 괜찮군.’
좌소천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나 혼자 올라갔다 올 테니 모두 이곳에 남아서 한잔 하고 있으시오.”
공손양이 슬쩍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쪽은 혼자 있다는데,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이상하잖소?”
좌소천은 담담히 말하고는 혼자서 이층으로 향했다.
공손양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말 괜찮을까?>
도유관이 슬쩍 전음을 보내 물었다.
<대주를 어려움에 처하게 할 자라면 우리들이 함께 간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우린 술이나 마시세.>
이층으로 올라가자 사십대 서생이 커다란 탁자를 혼자 차지한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좌소천이 다가가자 그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소이다. 백리도운이라 하외다.”
사십대의 중년 서생, 백리도운은 예를 다해 좌소천을 맞이했다.
좌소천도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신산귀유(神算鬼儒) 백리도운. 전마성의 군사다.
‘생각보다 거물이 왔군.’
좌소천도 포권을 취하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좌소천입니다. 예상보다 빨리 와서 놀랐습니다.”
본명을 밝혔다. 군사라는 자가 그 정도도 모르고 자신을 찾아 이곳으로 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백리도운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다.
“별말씀을. 놀란 사람은 오히려 소생이외다. 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요. 하하하하.”
좌소천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 백리도운이 술병을 잡았다.
쪼로록.
좌소천의 잔을 채운 백리도운이 술병을 내려놓고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좌소천은 은은한 주홍빛이 감도는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백리도운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잔잔한 미소가 귀밑까지 번졌다.
자신이 전마성의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술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망설임 없이 마신다.
독이 없다는 확신인가, 아니면 독 정도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신감인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좌소천이 술잔을 내려놓자, 백리도운이 다시 술잔을 채우며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오늘을 생각하고 셋째 공자를 사로잡으신 겁니까?”
“그가 성주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이지 않고 그냥 보냈지요.”
좌소천이 이번에는 입만 축이고 잔을 내려놓았다.
말을 맺는 좌소천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백리도운의 눈빛도 굳어졌다.
단순히 사도진성이 성주를 닮아서 보냈다는 뜻이 아니다. 사도진성의 죽음과 삶의 차이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다 알고 보냈다는 뜻.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는 모든 것을 계산에 넣고 사도진성을 살려서 보낸 것이다.
“성주께선 공격을 한 달간 유보하기로 하셨습니다. 그 역시 예상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마 더 길어져야 할 겁니다.”
백리도운의 눈이 좌소천을 직시했다.
“성주께서 내린 결정입니다.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변해야 합니다. 아니, 변하게 될 겁니다. 일단은 그걸 전제로 해서 이야기를 진행해보지요.”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좌소천의 말투에 백리도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대체 이자의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사도진성과 종후전을 혼자서 제압할 정도의 절대적인 무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서는 아무리 강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상대는 전마성이 아닌가?
그걸 모를 자가 아니거늘…….
백리도운은 숨을 들이쉬어서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번에는 먼저 공격했다.
“뭘 위해 대화를 나누고자 하시는지 그걸 먼저 확정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백리 공에게 어느 정도의 자격이 있습니까?”
“성주께서 모든 것을 일임하셨습니다.”
좌소천이 백리도운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천하(天下)를 논해봅시다.”
입이 살짝 벌어진 백리도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처, 천하……?’
2
좌소천 일행이 동호장으로 돌아온 것은 신시가 다 지날 무렵이었다.
네 노인이 정문으로 들어서는 좌소천 일행을 노려보았다.
마치 ‘너희들만 재미 보고 오기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좌소천이 방으로 들어가자 슬그머니 따라 들어왔다.
“험,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예, 천하를 좀 논하고 왔지요.”
동천옹이 동그란 눈을 좁히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천하를 논해보니 어떻던가?”
“갈대가 늘어선 배 위에서 한잔하며 논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천하가 좁더군요.”
네 사람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심지어 위지승정의 눈조차 가자미처럼 슬며시 한쪽으로 몰렸다.
“흥! 배에서 술을 마시면 흔들릴 텐데, 어지럽기만 하지 재미는 무슨 재미?”
“술은 자고로 산에서 마셔야 제 맛이지, 아암!”
“아직 어려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킁!”
“역시 어르신들께서 술 맛을 아시는군요. 허엄.”
좌소천이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내일은 어르신들과 함께 갈까 생각하고 예약해 놨는데, 취소해야겠군요.”
홱!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슨 소리! 예약을 했으면 별수 있나, 당연히 가야지!”
“옛날에 장강에 사는 조카들하고 배 위에서 마셔봤는데, 뭐 그럭저럭 괜찮더군요. 어험!”
“그러고 보니 배 위에서 술을 마시면 그 풍취가 색다를 것 같군. 안 그래?”
“물론이죠, 어르신!”
좌소천은 금방 태도가 돌변한 네 노인을 천천히 돌아보고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 내일 그곳에 가서 다시 천하를 논해보죠.”
“천하라! 하, 하, 하! 좋지!”
동천옹이 그답지 않게 목에 힘을 주고 웃었다. 다른 세 노인의 얼굴도 햇살이 비친 것처럼 밝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좌소천이 정말로 그 자리에서 천하를 논했다는 걸. 그리고 내일도 천하를 논할지 모른다는 걸.
3
정한거의 출현 소식이 강호를 흔들었다.
의성의 한가장이 백칠십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멸문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살아난 사람은 일반 가솔들과 여인들, 그리고 삼십여 명의 무사가 전부라 했다.
단순히 그 일뿐이었다면 또 한 번의 혈겁이 일어났구나 하고 말았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정한거의 한가장 혈겁은 강호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름이 아니었다. 혈겁 와중에 정한거라 이름 붙은 백색 마차를 봤다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그들은 백색 마차 안에 탄 여인들까지 봤다고 했다.
그들의 증언은 모두가 일치해서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백색 마차를 눈처럼 하얀 백마가 이끌고 있었네.”
“마차 안에는 두 여인이 타고 있었지. 백 살은 되었을 법한 노파하고 무척 젊은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을 신녀라 부르더군.”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중 신녀라는 젊은 여인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절대 정한거의 여인들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나쁘게 말하기는커녕 몽롱한 눈으로 그녀들을 변호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그중에는 한가장에서 살아남은 무사들도 있었다.
“신녀는 사람이 아니라 선녀였소. 하늘에서 내려온 진정한 선녀. 그런 여인이 어찌……. 나는 신녀가 원한다면 목숨이라도 내줄 수 있소.”
강호가 요동쳤다.
무림맹은 그녀를 마녀로 규정지었다. 그러고는 개별적인 추적이 아닌, 맹 차원에서 정한거를 본격적으로 추적할 추적대를 조직했다.
4
강호가 뒤숭숭해질 즈음, 좌소천은 제천신궁으로의 귀환을 위해 천문 지부인 동호장을 나섰다.
제천신궁을 떠난 지 열흘 만이었다.
그날 석양 무렵. 좌소천이 패천단과 효창 지부 무사들을 데리고 효창에 도착하자 벽수양이 십 리 밖까지 나와 반겼다.
검인보에서 선발된 일백의 무사 중 피해는 열세 명. 그나마도 죽은 자는 셋뿐이었다.
벽수양은 뛰어난 계략을 세운 좌소천이 고마워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네, 향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허허, 그게 어찌 운만으로 될 일이던가?”
“그럼 수하들 덕분이라 해두지요.”
“껄껄껄, 거참. 이 벽수양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네만, 향주 같은 사람은 처음이네.”
벽수양의 웃음이 내전을 울렸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술자리는 해시가 다 지나갈 때까지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날을 새면서 마시고 싶지만, 내일 길 떠날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구먼.”
벽수양의 선언에 모두가 아쉬워하며 자리를 파했다.
잔치의 여운은 자시가 되어서야 조용히 가라앉았다.
좌소천은 시끄럽던 장원이 조용해지자 방을 나섰다.
시원한 바람이 귀밑을 스치며 지나간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다 스러진다.
단아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좌소천은 후원의 정원을 천천히 거닐며 머릿속에서 울리는 혁련미려의 목소리를 되새겨 봤다.
과연 혁련무천과 천외천가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져 있는 것일까?
내일 아침 검인보를 출발하면 오후쯤 제천신궁에 도착한다.
그때부터 피 말리는 머리싸움이 시작되겠지.
‘혁련 백부, 부디 내 생각이 틀리기만을 바라야 할 것이오.’
정원의 구석진 곳, 연못가에 다다르자 버드나무 잎이 바람에 날려서 코앞으로 떨어졌다.
“여기 계셨구려.”
그때 벽화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좌소천은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담담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지부장님께서요?”
“예, 지금 내전에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공손한 어조. 벽화웅에게 좌소천은 나이를 떠나 이미 하늘이었다.
벽수양이 자리에 앉은 좌소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좌 군사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었지.”
아마 제천신궁의 무사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크게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혁련호승이 자네의 선친을 모욕하는 바람에 매우 분노했다더군.”
“꼭 그것 때문에 분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죄없는 수하를 죽였다고 들었네.”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지요.”
“맞네, 그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
그때 방문 밖에서 벽여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벽여령이 들어왔다.
전처럼 백색 궁장을 입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좌소천은 그녀가 차를 따르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정말 령매하고 닮았어.’
찻잔이 채워지고, 벽여령이 한 걸음 물러서자 벽수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네. 물어볼 말이 있거든.”
“물어보시지요.”
벽수양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떼었다.
“만약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자네의 편을 들 생각이네.”
예상치 못했던 말에 좌소천은 가만히 벽수양을 바라보았다.
벽수양이 찻잔을 놓고 말을 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 들은 말대로라면, 자네의 능력은 사단의 단주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네. 그에 반해 제천신궁의 후예 중에선 대공자인 혁련호정만이 자네와 비견될 정도지. 그런데… 그 와중에 자네가 혁련호승을 단죄했어. 분명 궁주나 대공자는 자네를 좋게 보지 않을 걸세.”
거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앞으로 제천신궁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 같은데, 자네는 그래도 끝까지 제천신궁에 남아 있을 생각인가?”
좌소천은 잠시 여유도 가질 겸 찻잔을 들었다.
그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가만히 벽수양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깊게 파고든다. 인의를 중요시하는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의외라 할 정도로.
과연 벽수양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진 걸까?
그 말이 가져올 파장이 얼마나 클지 알고 하는 말일까?
그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