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88화
무료소설 절대천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88화
88화
“몇 년 전, 만패철검 선우궁현의 죽음을 둘러싸고 제천신궁과 천외천가 사이에 알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천외천가의 순우연이 혁련무천에게 모종의 친서를 보냈지요. 그 서신에 무엇이 쓰였는지는 혁련무천과 사공은환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릅니다만, 당시 저는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 그 일을 기회로 해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말이 서신에 적혀 있지 않았을까…….”
잠시 말을 끊은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만일 그런 뜻이 적혀 있었다면, 혁련무천은 그 말을 단순하게 흘려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조금만 틈이 보여도 망설이지 않고 밀어붙이는 패웅이 바로 혁련무천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제천신궁이 움직임과 동시에 천외천가가 한중을 쳤습니다. 충분히 의심이 갈 만한 상황이지요.”
“으음…….”
“허어, 그것참. 엎친 데 덮친 격이로고…….”
우경 진인의 목소리도 낮게 가라앉았다.
“그들의 야욕을 막을 대책은 있는가?”
제갈진문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게 당장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저 천외천가를 한중에 묶어두는 것과 제천신궁이 남양 위쪽으로 올라오지 않게 하는 것 정도가 현재로선 최선일 뿐입니다.”
“마냥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선공을 한 것은 저들입니다. 본 맹이 저들을 쳐도 명분은 저희들에게 있습니다. 하나 그리되면 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전쟁!
그 말에 장로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난 수십 년간 무림맹 전체가 나설 정도의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제천신궁이 신월맹을 쳤을 때도 지켜보기만 했다.
최근에 일어난 정한궁의 혈겁 정도가 가장 큰일이라 할 수 있었을 정도니, 전쟁이라는 말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제자들이 죽어갈 것이 분명한 일. 누구도 당장 전쟁을 하자며 나서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 제갈진문이 목소리를 낮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당장 전쟁을 하지 않을 거라면, 당분간은 힘을 모으면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허어, 답답하구먼.”
우경 진인이 탄식을 하며 눈을 반쯤 감았다.
그때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노도인이 제갈진문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당의 장로인 현우자였다.
<군사, 회의가 끝나면 잠시 좀 만나세. 장문인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네.>
제갈진문은 고요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4
태양이 작열하는 유월.
좌소천이 황파의 만월평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되었을 때다.
정보도 얻을 겸, 패천단에 남겨놓은 자들에게서 소식이 전해졌다.
한중이 천외천가에 넘어갔다는 것. 그리고 대공자 혁련호정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공손양으로부터 들은 좌소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혹시 본 궁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대공자가 돌아온 다음날, 제천단과 무천단이 남양으로 갔다고 합니다, 단주.”
“훗,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보다 빠르긴 하지만, 멍석을 깔아줬으니 판을 벌여야겠지요.”
공손양은 무릎에 올려진 손에 힘을 주고 좌소천을 직시했다.
“언제쯤 시작하실 겁니까?”
“먼저 소문을 내십시오. 소문이 무르익으면… 그때 시작하지요.”
담담한 목소리다. 그러나 공손양은 그 목소리에 어깨가 위축되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좌소천이 공손양의 뜬금없는 호칭에 눈을 들었다.
공손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그러니 마다하지 마십시오.”
좌소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입니다.”
“하늘은 하늘로 불리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지요. 수하들을 위해서라도 받아들이십시오.”
“흐음, 알겠습니다. 하나, 아직은 아닙니다. 진정한 하늘이 될 때까지는 미루겠습니다.”
“그럼 일단 말투부터 바꾸어주십시오. 반만이라도…….”
옳은 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말을 바꾼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거… 시작부터 꽤 어렵군요.”
투덜거리는 좌소천을 바라보며 공손양은 조용히 웃었다.
냉정한 듯하면서도 본성의 부드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는 좌소천이다.
공손양은 그래서 더 자신의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하늘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상존해야 한다. 자신이 본 좌소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큰 하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좌소천은 자신의 직속무사 열 명과 단주 휘하 호위무사 이십 명만을 데리고 황파의 만월평으로 갔다.
총지부의 상황도 알 겸, 지원받을 무사들에 대해서 총지부장과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첫날, 호북 총지부장이자 혁련무천의 사촌 아우인 혁련무성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잠강과 천문을 지원할 무사들의 소집을 미적거리며 좌소천과의 만남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했다.
닷새간 단 두 번을 만났을 뿐이니 일에 진척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문이 돌았다.
어디에서부터 먼저 돈 것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소문은 이틀이 지나기 전에 호북 남부 일대로 일파만파 번졌다.
처음에는 제천신궁이 천외천가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뿐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소문에 한 가지 말이 덧붙여졌다.
어쩌면 선우궁현의 장례 때부터 천외천가와 모종의 협약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태군사의 아들이자 패천단주인 좌소천이 천외천가와 원수지간인데, 궁주가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 소문이 사실일 경우 제천신궁의 궁주가 신의를 저버린 거와 다름없다며 술자리의 안주로 삼고 씹어댔다.
결국 궁주인 혁련무천이 연관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미적거리던 혁련무성도 좌소천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지부장의 집무실은 한때 신월맹의 맹주 초동강이 집무실로 쓰던 진월각이었다.
그곳에선 혁련무성과 네 중년인이 좌소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소천이 공손양과 도유관만 대동한 채 진월각 안으로 들어가자, 혁련무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험,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아서 집무를 볼 수 없었네. 그래, 잘 지내고 있었나?”
그의 앞자리에 앉은 좌소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안건만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내일 아침에 출발할 생각입니다.”
혁련무성은 목적이 있어서 자신과의 만남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사이에 황파 총지부의 상황을 대충 파악한 상태였다.
이대로 떠난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지원 무사야 시간이 조금 늦을 뿐 보내주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일단 혁련무성을 떠봤다.
“지원 무사를 보내주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이 저희의 힘만으로 적과 싸워야 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혁련무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네. 지원 무사를 보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는 마당이다. 그런 마당에 자신이 지원 무사를 보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마저 씹어댈 것이었다.
더는 미적거릴 수가 없는 상황. 혁련무성이 좌소천을 보고 물었다.
“그래, 얼마 정도의 인원이면 되겠는가?”
“오백 정도는 있어야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일반 무사들을 보내주실 거라면 그냥 놔두십시오.”
혁련무성의 눈이 커졌다.
“오백은 적은 인원이 아니네. 그 정도면 만월평의 쓸 만한 무사 중 반은 가야 할 것이네. 무리한 인원이야.”
그랬다. 오백이면 호북 총지부인 황파의 정예 중 반에 해당했다.
하기에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마성에게 지면 무리고 뭐고 없습니다. 그들이 잠강과 천문만 차지하고 말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결정하시죠. 보내주실 건지, 말 것인지.”
생각 외로 좌소천이 강하게 나가자 혁련무성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너무 많은 인원이야. 궁주께 허락을 얻기 전에는…….”
“할 수 없지요, 그럼.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단, 이번 싸움에 문제가 생기면, 모두 지부장께서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좌소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혁련무성이 손을 들어 말렸다.
“이, 이봐! 보내지 않는다는 게 아니잖은가?”
자리에서 일어난 좌소천이 고개만 돌려 말했다.
“오백입니다. 먼저 출발할 테니, 내일 출발시켜서 두 지부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였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단혼검 엽풍이라는 자였다.
“좌 단주,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너무 지부장께 무례한 것이 아니오?”
좌소천이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무례란 말이오? 파견단의 수장으로서 지원 무사를 내달라는 게 무례하다는 거요, 아니면 지원 무사를 내주지 않을 경우 혼자 가겠다는 것이 무례하다는 거요?”
“누가 지금 그걸 말하자는 거요? 지부장께서도 사정이 있어 그러는 건데 너무 강압적이지 않냐는 말이외다.”
“강압? 귀하는 강압에 대한 말을 잘 모르는 것 같구려.”
좌소천이 엽풍을 직시한 채 물었다.
“그대에게 묻겠소. 지위가 같을 경우, 임무의 전권을 지닌 책임자와 지원단 수장 중 누가 상급자요?”
엽풍이 대답을 못하고 눈치만 봤다.
사단 중 하나인 패천단의 단주는 총지부장과 서열이 같다. 그러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당연히 전권을 지닌 책임자가 모든 것을 지휘하게끔 되어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장내에 아무도 없었다.
좌소천이 혁련무성에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오히려 예를 다해 지부장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생각하는데, 총지부장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허험, 누가 뭐랬나? 걱정 말게. 내일 오후까지 지원 무사들을 잠강과 천문으로 출발시키겠네.”
“그리하시겠다니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정예를 부탁합니다. 그래야 피해가 그만큼 적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허, 허. 알겠네. 내 최선을 다해보겠네.”
살짝 고개를 숙인 좌소천은 혁련무성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중년인을 쓸어보고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좌소천의 얼굴에 만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훗, 삼사백이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오백이라…….’
황파의 정예 중 반을 빼냈다.
그들이 빠지면 호북 총지부란 이름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언제든 집어삼킬 수 있는 곳.
다음날 아침, 만월평의 총지부를 떠나며 좌소천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양면이 백 장 절벽으로 되어 있고, 후면은 무려 삼백 장의 깎아지른 절벽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일천으로 일만을 막을 수 있다는 곳.
아버지에 의해 그 통설이 무너진 곳.
천혜의 요지라는 만월평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말 굉장한 곳입니다, 단주.”
공손양이 눈빛을 빛내며 감탄했다.
좌소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웃었다.
“나 역시 우리의 터전으로 삼기에 부족하지 않다 생각하고 있지요.”
조용히 웃는 그의 눈이 우거진 송림을 지날 때였다.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비틀렸다.
만월평에서 멀어지는 좌소천 일행을 주시하는 여섯 쌍의 눈이 무색으로 가라앉았다.
“놈들이 떠나려나 봅시다, 대형.”
여섯 쌍의 눈 중 유난히 검은 눈동자의 주인이 눈매를 좁혔다.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 사이로 목표가 보인다.
허리에 꽂힌 한 자루 도. 그리고 장포 안에 꽂힌 기다란 무엇. 그것이 전부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그런 청년일 뿐.
그런데 강하다 했다. 패천단의 단주를 맡아도 될 만큼.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의 옆에 있는 고수들 때문이 아니다. 그들 중 서넛이 강하긴 하나, 그들은 결코 자신의 손을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 강함의 정도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작 목표로 하는 자는 강함의 정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제다.
저자는 얼마나 강한 걸까?
전마성의 호법을 이겼다고 하던데, 사실일까?
“느낌이 안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