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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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물어보게.”
“계속 그렇게 사실 겁니까?”
계속 쫓기면서 살 거냐는 물음이다.
능야산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어디에 얽매일 수 없는 형편이네. 게다가 나로 인해 다른 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도 원치 않네.”
“크게 얽매이는 관계가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또한 그들이 누구든, 쉽게 건드릴 수 없는 곳이라면 말입니다.”
능야산이 좌소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곳일수록 모든 일이 철저해서 얽매이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네. 그럴 만한 곳도 천하에 몇 되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고한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희 고가장에 와 계시면 어떻겠습니까?”
능야산이 고개를 저었다.
“고가장은 그들을 막을 수 없네.”
고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가장이라면 남장제일의 세력,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하지만 능야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좌소천을 향해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한 조건을 충족시킬 곳이 있나?”
“있다면 가시겠습니까?”
능야산의 얼굴에 갈등이 스쳤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지, 능야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 달 정도 일하고 여비만 벌어서 떠나려 했는데, 그런 곳이 있다면 가야겠지. 지금으로서는 어떤 형편도 안 되니…….”
좌소천이 조용히 웃었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어디인가?”
“제천신궁 패천단입니다.”
능야산은 물론이고 고한의 눈도 커졌다.
제천신궁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세다. 지금은 천하사패라는 말조차 무색할 지경.
그렇기에 능야산은 의문이 들었다.
“제천신궁이라면 얽매이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자네가 한 약속이 지켜질 수 있다고 보나?”
좌소천이 앞에 놓인 술잔을 잡으며 못을 박듯 말했다.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제가 패천단을 맡고 있는 한은.”
순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고한이 좌소천을 보며 더듬거렸다.
“그, 그럼… 좌 형께서, 전마성의 응성과 천문 지부를 단 이틀 만에 함락시켰다는 제천신궁의 풍운아……?”
좌소천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술잔만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다음날.
좌소천이 능야산과 함께 떠나려 하자 고한도 따라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좌소천은 여운을 남기고 그의 뜻을 잠재웠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남장을 지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때 가서 봅시다.”
“정말입니까? 그럼 꼭 오셔야 합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좌 형.”
고한은 남장의 제일 세력 고가장의 후계자다. 한수 서북쪽으로 진출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약속하지요.”
3
황촉불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무거워진 것은 촛불의 그림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패천단이 너무 커졌사옵니다.”
“패천단이 문제가 아니야. 호북의 일이 자세히 알려진 이후 장로와 간부들까지 놈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어.”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 위험하옵니다, 주군.”
“나도 알아!”
혁련무천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손에 들린 인형처럼 생각했던 좌소천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아귀를 빠져나가더니, 십 년도 안 된 사이에 한 손으로 쥘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돌아왔다.
그때라도 확실히 다루었다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한순간의 방심이 놈을 너무 키워줘 버렸다.
‘괘씸한 놈! 은혜를 모르고 기어오르려 하다니.’
전이었다면 그리 생각할 혁련무천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아들이 당하자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였다.
더구나 장로들과 간부들마저 놈을 마치 후계자라도 되는 듯 생각하질 않는가 말이다.
‘이대로는 안 돼. 일단 놈의 힘부터 약화시켜야 해. 그리고 그다음에…….’
혁련무천의 눈에서 찰나간 살광이 맴돌았다.
그걸 본 사공은환이 재빨리 나섰다.
“주군, 이번 전마성과의 싸움에 패천단만 보내면 어떻겠사옵니까?”
“패천단만? 그건 너무 속보이는 일 아닌가?”
패천단만으로는 절대 전마성의 주력을 상대할 수 없다. 그걸 모르는 사람 또한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좌소천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자체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천하의 제천무제가 이제 이십대의 좌소천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제천단 백에 무천단 이십을 함께 보내라. 북쪽의 일은 나머지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사공은환은 반대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입을 닫았다.
혁련무천의 흔들리는 눈을 본 것이다.
‘이제 당신도 늙었군요.’
전이었다면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런 혁련무천이 이제 남의 눈치를 본다.
사공은환은 씁쓸한 마음을 속으로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주군.”
“대신 황파의 아우에게 전령을 보내서 놈의 움직임을 방해하라고 해.”
“존명!”
제천전을 나온 사공은환은 가만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오늘따라 웅장한 제천전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따로 어떤 수를 내든지 해야지.’
4
좌소천은 이틀 후 능야산을 대동하고 패천단에 도착했다.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에 들어가자 공손양이 곧바로 찾아왔다.
“마침 맞게 오셨습니다, 단주.”
좌소천이 자리에 앉자 공손양이 말을 이었다.
“어제저녁에 호북 총지부에서 긴급 전령이 왔는데, 점심이 끝나고 긴급회의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호북의 일이 거론될 것 같습니다.”
좌소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우리가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 될 거요.”
“패천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만큼, 저들 역시 우리가 가는 것을 반길 것입니다.”
“그러겠지요.”
좌소천의 깊게 가라앉은 눈이 공손양을 향했다.
“우기가 닥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 단주.”
호북으로 파견됨과 동시에 바람이 불 것이다.
그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걸 계획한 좌소천과 공손양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로 인해 천하의 판도가 변할 거라는 사실이다. 세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리고 오늘 데려온 사람, 직속무사로 둘 겁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데려왔으니 공손 형이 잘 보살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단주.”
가볍게 고개를 숙인 공손양이 작은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동안 수집된 정보들입니다. 꽤 재미있는 것도 많으니 한번 살펴보십시오.”
회의는 공손양의 말대로 점심이 지난 미시 무렵에 시작되었다.
생각했던 대로 패천단의 호북 출정이 결정되었다.
거기에 제천단 일백과 무천단 이십 명이 더해졌으나,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의문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패천단만으로 전마성을 상대할 수 있겠소?”
“허어, 대체 궁주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들만 보내겠다는 건지…….”
하지만 회의가 끝난 후 귓속말로만 떠들어댈 뿐, 누구도 혁련무천의 결정에 대놓고 토를 달지는 못했다.
5
패천단의 출정이 결정된 그날 밤.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삼천 리 길을 달려와서 제천신궁을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다섯. 하나같이 절정의 본신 무공을 지닌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지닌 둔형술을 이용한 살인 수법은 그들의 본신 무공보다 몇 배나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이 제천신궁에 들어온 지 네 시진이 지난 축시 초.
아름드리나무 위에서 다섯 쌍의 눈이 길게 뻗은 건물 한가운데를 향했다.
자신들이 받은 건물 배치도는 작은 건물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건물이 목표가 기거하는 곳이라는 말.
<이호와 삼호가 뒤를 치고, 사호와 오호가 내 뒤를 따른다. 시간은 일각 후, 달이 산 너머로 넘어가면 내가 먼저 시작하겠다.>
전음이 네 사람의 귀에 동시에 전해졌다.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굵은 나뭇가지처럼 보이던 자들이 나무 위에서 사라졌다.
좌소천은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기이한 느낌이 밀려오고 있다.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살기라고 하기도 애매한 미약한 기운. 아마 하늘의 매가 병아리를 노린다면 이 정도의 살기가 흐를까 싶을 정도다.
패천단 무사들의 기운은 아니었다.
‘나를 노리는 건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누가 시켰을까?
혁련무천? 사공은환?
누구라도 가능하다.
어쨌든 두고 보면 알 일. 좌소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진도를 손에 쥐고는, 태연히 의자에 앉아서 다가오는 기운의 주인을 기다렸다.
촛불조차 꺼진 방.
창문으로 스며들던 달빛조차 서서히 약해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방 안이 완벽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때 밤바람이 창문을 덜컹이고, 내전의 천장에 나 있는 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한줄기 기운이 실바람처럼 밀려들었다.
딸깍.
좌소천이 좌수 엄지로 무진도를 밀어 올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순간 실바람처럼 밀려들던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좌소천은 꿈쩍도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찰나였다!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고, 좌소천의 손에서 방 안의 어둠보다 더 시커먼 선이 쭉 뻗었다.
사악!
그때였다.
천장이 갈라지고, 갈라진 틈에서 두 줄기 기운이 쏟아졌다.
좌소천은 손목을 비틀어서 쭉 뻗어나간 묵선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동시에 앞쪽 방문을 통해서 두 줄기 안개가 더 스며들었다.
쾅!
탁자를 앞으로 내찬 좌소천이 좌수를 들어 허공을 찍고 무진도로 허공을 그었다.
도기가 어둠과 천장과 그 위쪽의 무언가마저 갈라버렸다.
“헙!”
천장에서 나직한 신음이 처음으로 흘러나왔다.
확, 퍼지는 혈향.
좌소천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비릿한 혈향이 퍼진 어둠 속에서 광채도 없는 도기와 검기가 난무한다. 기괴하게도 탁자를 내찬 것 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름 돋는 암중의 격전.
좌소천조차 긴장이 되었다.
단순한 고수들이 아니다. 철저히 암습을 위해 수련을 한 자들이다.
자신들보다 두 배는 강한 자도 암습으로 죽일 수 있는 자들. 그런 자가 다섯이나 된다.
‘제천신궁 무사들이 아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철저히 감춰진 자들이라 해도 기도와 무공의 본질은 어쩔 수 없는 법. 그런데 이들이 지닌 모든 것이 제천신궁의 것과 달랐다.
왠지 이질적인 무공. 오래전 언젠가 겪어본 것처럼 느껴지는 기운.
문득 좌소천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혹시……?’
암습자들의 정체를 대충 짐작한 좌소천의 눈에서 살광이 쏟아졌다.
‘너희들이었더냐!’
찰나간, 좌소천의 손에서 펼쳐지던 도법이 일순간에 변했다.
끼이이이!
대기의 흐름을 억지로 비트는 소리가 고막을 긁는다 싶더니, 어둠이 쩍쩍 벌어졌다.
“허억!”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선혈이 튀었다.
그 직후 팔목 부위에서 잘린 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두두두!
천장과 벽과 바닥으로 쏟아지는 선혈!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찌른다.
순간이었다. 철저하게 모습을 감춘 채 따로 움직이던 자들이 일시에 짓쳐들었다.
결판을 내자는 듯!
좌소천은 내력을 팔성까지 끌어올렸다.
전력을 다한다면 이들을 단숨에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다 내보이는 셈이 될 터. 아직은 때가 아니다.
‘결국은 너희들이 먼저 이를 드러내는군.’
네 줄기 기운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좌소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그 직후 먹물 같은 선이 둥글게 띠를 이루며 너울처럼 퍼져 나갔다.
쩌저저정!
“컥!”
“허억!”
“흐읍!”
비명 같은 신음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고, 달려들던 자들이 뒤로 튕겨졌다.
하나는 튕겨진 그대로 널브러져 일어나지 못했지만, 셋은 재빨리 몸을 추스르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을 향해 좌소천의 공격이 이어졌다.
몸서리처지는 섬뜩함이 방안을 휘감으며 어둠을 난자했다.
“빠져나가라!”
암습자 중 누군가가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세 개의 그림자가 창문과 천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와장창!
암습자들은 공격할 때만큼이나 빠르게 방안에서 사라졌다.
좌소천은 그들을 쫓지 않고 흔들린 내력부터 다스렸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고 싸운 시간도 짧았다. 그러나 근처의 사람들이 몰려들기에는 충분한 소리고, 시간이었다.
게다가 패천단에는 패천단의 단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클클클, 그놈들. 제법 귀엽게 노는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