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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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19화
119화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날아든 노인들은 급살이라도 맞은 표정으로 섭정산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가슴까지 수염이 늘어진 노인이 섭정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정산! 밖의 고함 소리는 뭐고, 지금 네 꼴은 또 뭐란 말이냐?”
이를 악물고 있던 섭정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처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제가 미진해서 오늘 본 방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섭정산이 아버지라 부르는 자. 중원구마 중 한 사람, 광한마존 섭궁안이 바로 그였다.
당대의 방주인 섭정산까지 나선 마당. 섭궁안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다 늙은 자신이 나설 이유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비웃듯이 단 일각 만에 광한방이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아들은 한 팔을 잃었고.
“그따위 약한 말은 하지 마라! 우리 광한방이 어디 한두 번 이런 일을 당했단 말이더냐!”
버럭 고함을 지른 섭궁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다그쳤다.
“뭐 하느냐! 침입자들을 치지 않고! 방주의 팔이 잘렸는데 왜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더냐! 삼로! 이곳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들은 외곽으로 가서 쳐들어온 놈들을 치게!”
광한방은 이백 년 역사의 문파다. 당연히 나이 먹은 노고수들도 많다.
그러나 당장 싸움에 끼어들 만큼 체력이 뒷받침되는 고수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강한 자들이 바로 광한삼로였다.
“알겠소이다, 태상!”
광한삼로, 세 노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날리려 할 때다. 좌소천이 소광섭을 불렀다.
“소 대협.”
순간 좌소천의 말뜻을 깨달은 소광섭의 손에서 세 발의 탈혼시가 벼락처럼 튕겨졌다.
투웅!
“허억!”
“헛! 조심!”
몸을 날리려던 세 명의 노인은 구르다시피 몸을 돌려서 탈혼시를 피했다.
겨우 중심을 잡은 그들은 경악한 눈으로 소광섭의 손에 들린 탈혼궁을 주시했다.
그때 좌소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귀하들은 이곳에서 떠날 수 없소.”
섭궁안은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건방진……!”
그러다 고요히 밀려드는 좌소천의 기운을 느끼고 얼굴이 굳어졌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끝 모를 심해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
섭궁안은 두 손을 움켜쥐고 좌소천에게 다가가며 잇새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섭정산이 다급히 말했다.
“그에게 제 팔을 잃었습니다, 아버님. 조심하십시오!”
천하의 광한마존에게 조심하라니.
그것도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아들이 그렇게 말할 줄이야.
섭궁안은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 손안에 땀이 찼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싸움이 벌어진 것은 기껏해야 일 각가량. 그나마 섭정산이 나선 것은 반 각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사이에 장로들 칠팔 명과 광한팔마. 그리고 자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섭정산이 당했다.
섭정산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섭궁안이 좌소천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이, 외곽에서 들려오던 격전음이 연무장 바로 옆쪽의 건물 뒤에서 들려왔다.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게 흐르고 있음이다.
섭궁안은 노안을 부릅뜬 채 좌소천을 직시했다.
이제 겨우 이십대의 청년이다. 그러나 광한방의 방주 얼굴에 두려움을 새긴 자다.
자신의 경험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눈앞에 있는 청년은 결코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네가 저들을 이끌고 있느냐?!”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오.”
“그럼 결판을 내자! 너와 내가 싸워서 지는 사람이 모든 것을 넘기기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 자신이 있다면 남자답게 승부를 보자!”
노회한 강호인다운 제안이었다.
사실 상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확률은 일 할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절망에 가까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이었다.
섭궁안의 제안에 좌소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로서는 굳이 섭궁안과 조건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상황은 자신의 생각대로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광한방이 무너지는 것은 여반장이나 다름없는 상황.
하거늘 섭궁안과 싸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좌소천은 순순히 섭궁안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요. 좋습니다.”
사람들이 의외라는 눈으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좌소천이 섭궁안의 조건을 받아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쳐서 없애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지.’
그때 섭궁안이 못 미더운지 좌소천의 결정을 다시 확인했다.
“남아일언 중천금일세. 설마 나중에 딴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좌소천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연무장 저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런 말할 시간에 수하들이나 물러나게 하시지요. 다 죽기 전에.”
틀린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격전이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그 시간이면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더 죽어나갈 것이었다.
좌소천을 바라보던 섭궁안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삼로! 가서 싸움을 멈추라 하고 방도들을 불러들이게! 다친 사람들은 속히 상처를 치료하고!”
“예, 태상!”
광한삼로가 부리나케 뒤쪽으로 몸을 날리고, 그나마 몸이 성한 호법들이 나와 섭정산을 보호한 채 뒤로 물러났다.
“모두 싸움을 멈추고 물러서시오!”
좌소천이 그때까지도 서로를 향해 원수처럼 달려들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는 소광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 대협.”
소광섭이 다시 품속에서 기다란 통을 하나 꺼내더니 탈혼시에 매달았다.
곧 하늘 높이 탈혼시가 솟구치고, 펑, 소리와 함께 파란 연기가 넓게 퍼졌다.
숨을 두어 번 쉴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다. 여기저기서 싸움을 멈추라는 외침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많은 무사들이 연무장을 향해 밀려들었다.
처음에는 광한방의 무사들이 밀려들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 구포방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건물의 지붕 위는 물론이고, 장원을 통째로 둘러싼 구포방의 무사들을 보고 섭궁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무기를 든 채 고요히 서 있는 그들의 기세가 광한방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호남제일세라는 광한방을!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많은 고수들이 몰려왔는지 의문일 정도다.
그런데 그때 문득, 지붕 위를 바라보던 섭궁안의 노안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붕 위에 고요히 서 있는 두 사람. 자신이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설마… 전호와 육부경?”
월영신마 전호와 백월신마 육부경.
한때 신월맹 최강의 고수들이었던 칠대신마(七大神魔) 중 두 사람이다.
하나라면 자신이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지는 않겠지만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문제는 그들이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수하로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섭궁안의 경악한 눈이 좌소천을 향했다.
“저들이 전부 구포방의 사람들인가?”
“그렇습니다.”
“설마 구포방이 신월맹의 후신은 아니겠지?”
“구포방의 무사들 중 과거 신월맹에 있었던 사람이 제법 많이 있긴 하나, 구포방은 구포방일 뿐입니다.”
섭궁안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름 없는 중소 문파 정도로 알았다. 그런 구포방에게 당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전호와 육부경만이 아니다. 신검장의 장로인 설수문과 진청호도 보이고,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적어도 이십여 명 이상이다.
광한방의 전성기 때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은 전력.
“자네, 이름이 뭔가?”
섭궁안은 진정 좌소천이 누군지 궁금했다. 그러나 좌소천은 아직 자신의 이름을 알려줄 마음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될 것이오.”
이름이 알려지면 순식간에 호남 전체로 퍼진다.
며칠 사이 혁련무천의 귀에 들어갈 것은 분명한 일. 아직 남은 일이 있는 이상은, 설령 알려지더라도 시일을 늦춰야 했다.
“하긴…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섭궁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천천히 장포 자락을 잡아 허리에 맸다. 그러자 장포 안에 차고 있던 한 자루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한마존의 애병인 광혼검이 십여 년 만에 세인들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스르르릉.
검을 잡고 뽑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가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광한마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조건을 받아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 어쨌든 후회 없는 대결이 되길 바라겠네.”
마기조차 다스리는 극마의 경지에 이른 섭궁안이다. 그래서인지 마공을 익힌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전신에서 일렁거리는 마기만 아니라면 정파의 노고수라 해도 될 정도의 엄중한 기품마저 보인다.
신녀와 사도철군. 그 두 사람에 비하면 약할지 모르지만, 생사결은 단순히 무공의 고하로만 승부가 결정 나는 것이 아닌 법.
그걸 잘 알기에, 좌소천은 섭궁안을 경시하지 않고 금라천황공을 구성까지 끌어올렸다.
세맥의 기운을 얻기 이전과 비교하면 능히 십성의 공력을 끌어올린 것과 같은 상태.
일순간, 시커먼 묵룡이 꿈틀거리며 무진도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진도의 도신이 영롱한 묵광에 휩싸이며 죽 늘어났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지했다.
사람들의 눈은 연무장 가운데를 향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줄기 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쓸며 지나가다 회오리치며 하늘로 치솟았다.
찰나였다!
고요히 서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한 발을 내딛으며 도검을 내밀고, 이 장의 간격을 둔 채 시커멓고 파란 벼락이 얽혀들었다.
콰앙!
고막이 먹먹할 정도의 굉음과 함께 두 사람 주위의 청석이 들썩였다.
두 걸음 밀려난 좌소천은 여전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세 걸음 물러선 섭궁안도 이를 악다물고 좌소천을 노려보았다.
그도 잠시, 손해를 만회하겠다는 듯 섭궁안이 앞으로 죽 미끄러져 나아갔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광혼검에서 광포한 청룡이 꿈틀거리며 피어났다.
찰나였다. 좌소천의 무진도가 허공으로 들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좌소천이 천천히 허공을 그었다.
밤도 아닌데 앞이 캄캄해졌다.
암천의 허공을 그어 내리는 거대한 도!
섭궁안의 눈에 보인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콰르르릉!
뇌음이 일고, 목이 잘린 청룡이 비명을 토했다.
들썩인 청석이 터져 나가며 먼지구름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세 걸음 물러선 좌소천은 내려친 무진도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이 장 이상 물러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섭궁안을 향해 나아갔다.
순간, 무진도의 도첨이 미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묵빛 도강이 회오리처럼 휘돌며 대기를 잘게 찢어발겼다.
천망회류참(天網回流斬)!
찰나간에 거대한 묵빛 회오리가 섭궁안의 온몸을 옭아맸다. 그것이 상대의 도첨에서 흘러나온 강기의 회오리라는 것을 알고도 섭궁안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정면 대결뿐!
“차아아앗!”
섭궁안은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린 채 검과 하나가 되어 묵빛 회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펼치는 일검이라는 마음이 실린, 자신의 칠십수 년 삶이 녹아 있는 검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그렇게 소원했던 검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언뜻 그의 입가로 희열이 떠올랐다. 상대가 죽여야 할 적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우우웅웅!
소리는 크지 않았다.
먹먹한 고막이 미처 소리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는지 사람들은 그저 미간을 찡그렸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연무장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구름처럼 피어올랐던 먼지도 가라앉은 상태.
반경 오 장여가 반 자 가까이 움푹 파여 있다.
그 한가운데, 좌소천과 섭궁안이 서로를 향해서 도와 검을 겨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