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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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13화
113화
한편, 신녀와 한령파파는 장원 한가운데 서서 정한궁의 여인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들이 남아 있어야 천외천가의 무사들이 정한녀들을 추적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외천가의 수장이 추적을 막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신녀는 흑암과 적암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입가에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기. 두 사람 다 상당한 내상을 입은 상태인 듯했다.
자신 역시 완전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에 비하면 그다지 큰 내상은 아니었다.
“쫓아오고 싶으면 쫓아와 봐라. 모두 죽여줄 테니까!”
흑암은 들끓는 기운을 억누르고 신녀를 노려보았다.
“네년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신녀가 흑암과 적암을 노려보며 한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흥!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천외천가는 여인의 한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될 것이다!”
신녀의 목소리가 양가장에 울려 퍼졌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귀를 틀어막고 비틀거렸다.
동시에 신녀와 한령파파의 신형이 둥실 떠오르더니, 바람에 날린 홀씨처럼 훌훌 날아갔다.
그렇게 신녀가 나타날 때만큼이나 신비스럽게 사라지자, 갑자기 장원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코를 찌르는 짙은 혈향.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신음. 장원의 넓은 연무장이 반 시진 만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을 돌볼 뿐이다.
그러길 반 각. 흑암이 차가운 눈으로 순우무종을 바라보았다.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 한천빙백소수공을 그대들이 막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냐?”
순우무종은 그사이 흔들린 내력을 가라앉히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귀하들의 임무는 신녀를 막는 것 아니오? 신녀가 올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알리지 않은 것뿐이오. 상황을 보니 미리 알렸다 해도 달라진 것은 없었을 테지만.”
흑암이라고 해서 순우무종의 말에 빈정거림이 섞여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둘이 상대하고도 신녀와의 대결에서 밀렸으니 더 이상 다그칠 수도 없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나중을 기약하고 일단 억눌러 놓는 수밖에.
‘건방진 놈! 우리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놈이 감히!’
천천히 몸을 돌리는 흑암의 동공에서 시커먼 묵기가 넘실거렸다.
그때 순우무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최대한 빨리 부상을 돌보시오. 날이 밝는 대로 계집들을 추적할 생각이니까. 나는 이 기회에 정한궁의 계집들을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오. 혹시라도 힘들 것 같으면 미리 말하시오. 본가의 어른들을 부를 테니.”
그 말에 이를 악물고 돌아선 흑암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우르릉.
비라도 내리려는 듯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이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나중에 처절하게 후회할 것이다!’
5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좌소천은 악양으로 가기 위해서 공손양과 도유관, 능야산과 함께 누렇게 변한 장강에 몸을 실었다.
어차피 우기가 시작된 터. 대규모 싸움은 벌어지지도, 벌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기가 되면 장강 일대가 진흙탕이 되어서 강호의 고수들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악에 받친 마음으로 상대를 치려 한다면 그 까짓 진흙탕이 문제일까 마는, 지금은 그렇게 다급히 싸움을 벌일 상대들도 없었다.
불완전한 평화 지대. 그것이 지금의 호북인 것이다.
그런 만큼 누구도 그의 행로에 대해서 전과 같은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사라졌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날 오후. 좌소천이 마침내 동정호에 들어섰다.
악양은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선창가도 그대로였고, 건물들도 비에 젖은 기와들이 검게 물들어 있을 뿐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동정호는 상전벽해가 되어서 완전히 달라 보였다.
남쪽에서 비가 많이 온 듯 작은 섬들과 갈대숲들이 누런 황톳물에 완전히 잠겨서 거대한 바다처럼 변한 것이다.
좌소천 일행을 실은 배가 악양의 선창가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몇 사람이 다가왔다.
배에서 내린 좌소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맨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오는 사람의 두 눈에 뭔가가 어른거린다.
‘훗, 그러고 보면 마음이 무척 약한 분이란 말이야.’
당금 호남을 긴장시키고 있는 구포방의 방주 구포봉.
그의 과거 경력이 포봉객잔 주인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수적채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누가 믿으랴.
“안녕하셨습니까?”
“어서 오게나. 독에 당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괜찮나?”
“이제 다 나았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어깨를 감싸며 반가워하지도 않았고, 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짧은 한두 마디 안에 수많은 감정이 묻어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다 모르지 않았다.
구포봉이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가세,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네.”
좌소천이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증거는 찾았습니까?”
“물론이지. 그 멍청한 놈들이 그새를 못 참고 배에 실린 물건을 내다 팔았다네.”
구포방의 총단이라 할 수 있는 구봉장은 예전과 그 규모가 천양지차였다.
구포봉이 계속 늘어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일대의 장원 다섯 개를 몰래 매입해 연결해 놓은 것이다.
그래도 중심은 여전히 본래의 구봉장이었다.
구봉장에 들어서자 각파의 수장들이 일제히 좌소천을 맞이했다.
구포방의 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잠강과 천문에서 각각 일백씩, 이백의 패천단 무사를 이끌고 합류한 적사응과 황신양도 있었고, 우의를 다지는 표시로 신검장의 무사 이백을 이끌고 온 신검장의 장로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눈길을 끄는 자들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여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형주에서 삼백여 명의 무사를 이끌고 온 전마성의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수장은 월영신마 전호. 잠강에서 봤던 바로 그였다.
전호가 좌소천을 직시하더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대가 나에게 전음을 보낸 사람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때, 정말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하나?”
“그게 최선이었지요. 아니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전호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후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사가, 그것도 한 무리의 수장이 되어서 후퇴 명령을 내린다는 게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월맹의 한을 풀어줄 방법이 있기에 그런 말을 했을 터. 어떻게 우리의 한을 풀어줄 생각인가?”
“이미 만월평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요. 원하신다면… 훗날 만월평을 되돌려줄 수도 있습니다.”
좌소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특히 공손양은 화들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주군!”
전호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크게 뜬 눈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좌소천의 눈빛은 전호를 향한 채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단, 제 하늘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가부는 육 단주와 상의해서 결정을 내리십시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정이 내려진 뒤에는 무조건 제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전호는 현재 전마성의 사람이다. 그런데도 좌소천이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도철군과 벌인 협상 중에 과거 신월맹 무사들이었던 사람들과 관련된 내용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좌소천은 사도철군에게 신월맹의 무사들을 넘겨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사도철군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협상이 깨질 것 같은 분위기였을 때, 백리도운이 나섰다.
“주군, 좌 단주는 어차피 과거 신월맹의 무사들 상당수를 영입한 상태입니다. 그런 좌 단주가 만월평에 새로운 하늘을 세우면, 신월맹 출신의 무사들로선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상당수가 빠져나가겠지요. 그러니 기분 나쁘게 빼앗기는 것보다, 기분 좋게 먼저 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도 손해만 볼 생각은 없었다.
“대신 성주께서도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면 됩니다. 좌 단주도 성주님 못지않게 통이 크니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철군은 백리도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인심 쓴다는 표정으로.
“좋아. 다 주지! 대신 자네도 나중에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하네.”
전호도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난 후 자괴감에 한숨을 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이리저리 부유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에, 신월맹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마음에.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감정이 하나로 뭉쳤다.
만월평, 그 이름 때문에!
전호는 과감히 만월평을 넘겨주겠다는 좌소천의 말에 가슴이 떨렸다.
만월평은 신월맹의 심장이었다.
그곳이 무너졌기에 신월맹도 무너졌다.
그런 만월평을 되돌려주겠다고 한다.
물론 당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했다.
“정말… 만월평을 우리들에게 돌려줄 건가?”
“욕심나는 곳이긴 하나, 좋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요. 만월평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여러분만 하겠습니까?”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솟구친다.
전호뿐이 아니었다. 듣고 있던 모두의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구 신월맹의 무사들은 주먹을 움켜쥐고서, 이를 악문 채 격동을 참아야만 했다.
그때 좌소천의 말이 이어졌다.
“나 좌소천,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가슴을 내밀 것이고, 신의를 버리는 자에게는 칼을 빼 들 겁니다. 그 점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6
구봉장에 모인 무사의 수가 일천이 훌쩍 넘는다.
그것도 일류 이상의 고수들이 근 삼할에 이른다.
강호의 거대 방파들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태풍의 눈이 악양에 자리한 것이다.
좌소천이 악양에 도착한 다음날.
구봉장에서 제일 큰 전각인 구양전에 각파의 수장들이 모였다.
“준비는 다 되었네.”
탁자 위를 바라보던 구포봉이 짧게 입을 열었다.
좌소천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지도에는 붉은 물감으로 표시된 곳이 두 곳 있었다.
그중 하나는 형산이었고, 또 다른 곳은 상양의 광한방이었다.
“일단은 저와 소 대협을 비롯한 몇 사람이 먼저 상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구포봉이 걱정스런 눈으로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놈들에 대해서 알 만큼 알아놓은 상황인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요. 직접 보면 그들의 무력을 보다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무작정 치는 것보다는 피해가 덜어지겠지요.”
“흠, 그건 그렇지.”
비록 당금에 이르러 그 위세가 약해졌다 하나, 한때는 팔대마세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호남십대세력 중 수위를 다투는 광한방이다.
무사들의 숫자만도 일천오백에 이르는 거대 방파.
그런 광한방을 단순히 정보에만 의지한 채 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육부경이 물었다.
“신검장과는 합병을 먼저 생각했으면서, 왜 광한방은 합병을 생각하지 않는 거요?”
좌소천이 고개를 돌려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탁자를 빙 둘러서 열두 사람이 서 있다.
자신과 구포봉, 육부경을 비롯한 구포방의 핵심 인사 다섯. 전호를 비롯한 전마성의 대표 셋. 그리고 신검장의 장로 둘.
모두가 자신을 바라본 채 답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신검장의 장로 두 사람은 유난히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인다.
좌소천은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말이 통할 상대가 있고, 통하지 않을 상대가 있습니다. 신검장은 상인의 기질이 강한 곳이어서 어느 정도 힘만 보여주면 충분히 말이 통할 수 있는 곳이었지요. 하나, 광한방은 철저한 무인 집단인데다가, 호남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어지간한 충격이 아니고는 말조차 통하지 않을 상대, 그들이 바로 광한방이라는 말이다.
“복수를 핑계로 그들을 시험해 볼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끌어안아야 할지, 아니면… 버려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