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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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12화
112화
한 팔이 잘린 데다, 순우무궁이 천해에 들어가면서 찬밥 신세가 된 그였다.
언제부턴가는 전서나 정리하는 한직으로 밀려나서 신세한탄을 하는 게 하루의 일과 중 일부였다.
하지만 한 팔을 잃었다고 해서 머리마저 녹슨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같은 내용의 글이 적힌 전서가 보이자 의혹이 싹텄다.
그러다 한 시진 만에 비슷한 내용이 끼어 있는 전서를 또 찾아내자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시진. 그는 같은 내용의 전서를 두 장이나 더 찾아냈다.
하루에 쌓이는 전서만도 수십 장, 더구나 자양의 일이 벌어진 후 며칠간은 하루에 수백 장의 전서가 온 터였다.
세 사람이 전서를 읽고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며 관리하는 바람에 소홀히 지나친 듯했다.
모두 다섯 장의 전서에 적힌 전체적인 내용은 모두가 달랐다. 그러나 그 내용 중에 ‘채양이 달린 모자를 쓴 사람들’이라는 말이 똑같이 들어 있었다.
손자기는 전서를 날짜별로 구분하고 탁자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서 전서가 날아온 지역을 살폈다.
어느 순간, 손자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광가점(廣家店)의 사냥꾼이 대묘아산(大猫兒山) 근처에서…….]
광가점이 어딘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남정의 정보원이 전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정이라면 한중 바로 밑이다.
그는 급히 한중 일대에 관한 지도를 찾아서 펼쳤다. 운이 좋으면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손으로 지도를 죽 훑어가던 그가 어느 곳에서 손길을 멈췄다.
주요 산의 이름이 몇 개 적혀 있었는데, 그 이름 중에 대묘아산이 있었다.
대묘아산에서 한중까지는 기껏해야 삼백 리 정도.
“제기랄!”
벌떡 일어선 그는 탁자에 가득 펼쳐진 전서와 지도를 놔둔 채 급히 방을 나섰다.
순우무종은 짜증이 났다.
그러잖아도 흑암으로 인해 기분이 상해 있던 그로선 자신의 잠을 방해한 손자기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손자기는 순우무궁의 사람이었던 자가 아니던가.
당연히 대꾸하는 말투가 곱게 나오지 않았다.
“물러가게. 내일 이야기하세.”
하지만 손자기는 물러서지 않고 꼭 만나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지금 만나야 합니다, 대공자! 급한 일이니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빌어먹을, 겨우 잠이 들려고 했는데…….’
순우무종은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두르는 손자기를 놔둔 채 잠을 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 별 볼일 없는 일이기만 해봐라!’
그가 짜증난 목소리로 호위무사에게 소리쳤다.
“안으로 들여보내라!”
문이 열리자마자 손자기가 뛰듯이 들어왔다.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순우무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자기를 바라보았다.
“말해보게. 대체 무슨 일인데 내 잠을 깨운 것인가?”
손자기가 굳은 얼굴로 자신이 확인한 사실을 빠르게 설명했다.
말이 길어지면서 순우무궁의 눈이 커졌다.
그는 손자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손자기의 몇 마디 말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뭐야? 정한궁의 계집으로 보이는 자들이 근처에 와 있다고?”
“제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백 리 이내에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일각이 지날 즈음이었다.
순우무궁의 눈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손자기를 때려죽일 것 같던 마음은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언제쯤 그 계집들이 쳐들어올 것 같나?”
“이 정도 가까이 왔다면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녀들도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럼… 오늘이나 내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어쩌면 오늘밤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만…….”
이미 자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날이 샐 때까지 서너 시진 정도.
눈을 가늘게 좁힌 순우무궁이 손자기에게 명을 내렸다.
“즉시 사람들을 모이라고 해. 조용히.”
“그럼 천해에서 온 분들에게는……?”
순우무궁이 차가운 표정으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준비를 다한 다음에 말하겠다. 이곳의 책임자는 나니까 말이야.”
최대한의 무력을 동원해야 할 상황이다.
손자기는 천해의 무사들을 배제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우무궁의 비위를 건들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공자.”
그때 순우무궁이 손자기를 보더니 넌지시 말했다.
“손 단주, 그동안 내가 그대의 능력을 너무 가볍게 봤던 것 같군. 어떤가? 앞으로 내 손발이 되어 일해 줄 마음이 없는가?”
손자기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런 말씀 하시지 않아도 이미 제 몸은 대공자의 것입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나도 자네를 내 사람으로 생각하겠네. 가서 사람들에게 내 말을 전하도록 하게.”
“예, 대공자!”
축시가 되어갈 무렵.
정한궁 여인들이 소리 없이 양가장의 담을 넘었다.
장원 안이 너무 조용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미 한중까지 들어온 마당이어서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그녀들이 장원 안으로 진입한 지 열을 세기도 전에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계집들을 죽여라!”
“한 년도 살려 보내지 마라!”
찰나.
쾅!
양가장의 정문이 박살나며 신녀와 한령파파가 십이정한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장원 안에선 그 짧은 시간에 일대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녀, 놈들이 기다리고 있었나 보오!”
“이미 각오하고 왔어요! 여기까지 무사히 온 것만 해도 손해는 아니에요. 정한녀들은 손에 사정을 두지 말고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이세요!”
수백 명이 한중에 들어오는데 정보원을 곳곳에 둔 천외천가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알아챈 것 같긴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신녀는 정한궁 여인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이전과 달리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먼저 본 궁을 공격했으니, 죽어도 원망하지 마라!”
한여름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포의 한천빙백소수공이 한중의 밤을 얼려 버린 것이다.
무사 수십 명이 신녀의 절대한공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누구도 그녀를 정면으로 막지 못했다.
심지어 양가장의 장로들조차 그녀의 일장에 온몸이 허옇게 변한 채 뒤로 튕겨졌다.
자신에 찬 표정으로 신녀에게 달려들었던 순우무종은 두어 수 만에 질린 기색으로 물러섰다.
“맙소사! 이 정도였단 말인가?”
단 두 번 부딪쳤을 뿐인데 손이 떨렸다. 한기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남들에게 내보이지 않았던 천승만력기의 기운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상을 입고 피를 토했을 것이었다.
순우무종은 뒤로 물러나서 신녀와의 정면 대결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았다.
‘빌어먹을 놈들, 이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신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무사들이 한겨울 한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쓰러졌다.
어찌나 위력이 강한지,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마저 몸이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정한궁의 여인들은 일말의 인정도 두지 않고 몸이 굳은 그들의 목을 치고, 가슴에 갈랐다.
“으아아아!”
“피해!”
“시, 신녀는 사람이 아니다! 물러서!”
공포에 물든 천외천가의 무사들이 신녀의 공격을 피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즈음, 마침내 그들이 나타났다.
“계집! 너희들은 우리가 맡겠다!”
단 세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나면서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신녀의 공격이 그들에 의해 막힌 것이다.
하지만 정한궁에는 신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령파파가 그들을 보고는 눈에서 독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이놈들! 개만도 못한 천해의 독종들이 드디어 기어 나왔구나!”
그녀가 달려들자, 신녀를 공격하려던 십암 중 한 사람이 몸을 돌렸다.
“늙은이, 네년은 누군데 천해를 아는 것이냐?”
“어떻게 아냐고? 그건 공야주경에게나 물어봐라!”
십암 중 여섯째, 우암의 눈에 경악이 물결쳤다.
한령파파가 말한 공야주경이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의문을 해소할 시간도 없이 한령파파의 공격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십암 중 둘이 신녀를 막고, 한 명이 한령파파를 막는 형국이 되었다.
흑암은 그 정도면 될 거라 생각했다.
천하에서 자신들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이십 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 고수가 둘이면 천하의 오제 육기 구마라 해도 막을 수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착각이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굳이 오랜 시간도 필요 없었다.
무쇠도 부순다는 자신의 흑수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녀의 소수공에 부딪칠 때마다 손이 저릿저릿했다.
결국 우세는커녕 십 초가 지나면서부터 신녀를 상대하던 그와 적암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흑암은 경악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녀는 셋이 합공해야만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절대경지의 고수였다.
‘이 계집은 사사 어르신들만이 감당할 수 있어!’
하지만 놀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신녀도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의 무공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한령파파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하니 두 사람이서 자신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문제는 자신이 두 사람에게 막히는 바람에 정한궁의 여인들이 천외천가의 고수들에게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녀는 내공을 구성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흑암과 적암을 공격했다.
순간, 새하얀 회오리가 흑암과 적암을 뒤덮었다.
“계집이 작정을 했다! 전력을 다해서 막아!”
흑암이 일갈을 내지르며 시커먼 흑색 수강을 뻗어 신녀의 소수에 대항했다.
적암도 암갈색에 가까운 검강을 뻗어 신녀의 소수에서 뻗친 회오리에 마주쳐 갔다.
콰르르릉!
번개가 치고, 천둥이 일었다.
가공할 격전에 반경 십여 장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오 초, 십 초…….
우르릉!
신녀와 이암의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주위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사이 한령파파는 전력을 다해 우암을 몰아쳤다.
한령파파가 미미하나마 우세를 보이는 격전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것은 우암보다 한령파파가 더했다.
신녀와 자신이 십암 중 셋에 의해 막혔다. 금방 결정 날 싸움이 아니다. 적어도 수십 초는 겨루어야 겨우 승부의 향방이 갈라질 것이다.
이미 백수십 명이 쓰러진 상태. 그 시간이면 정한궁의 제자들 중 반수 이상이 죽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때다.
신녀가 흑암과 적암을 향해 소수를 내치더니, 그들이 황급히 이 장 밖으로 물러나자 소리쳤다.
“파파! 일단 물러가도록 해요!”
순간 한령파파도 우암을 향해 강기가 서린 쇠 지팡이를 휘두르고는 뒤로 물러났다.
한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십암 중 셋을 죽이고자 정한궁의 여인들을 모두 죽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 이곳을 나가라!”
한령파파의 목소리가 양가장을 울렸다.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정한궁의 여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남겨놓은 채.
심지어 부상당한 여인들도 움직일 수 있는 여인들만 뒤로 물러나고, 움직일 수 없는 여인들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녀시여! 저희의 원한을 갚아주소서!”
그 지독함에 정한궁의 여인들을 쫓으려던 천외천가의 무사들이 주춤했다.
“쫓지 말고 놔둬라!”
그때 순우무종이 담장을 넘어가는 정한궁의 여인들을 보고 소리쳤다.
장원 안에서 싸우는 것과 밖에서 싸우는 것은 또 달랐다. 굳이 무리를 하면서 그녀들을 쫓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장원 안에는 자신조차 공포를 느꼈던 신녀와 한령파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사냥은 천천히 해도 돼. 부상자들이 많은 만큼 도망가 봐야 멀리 가지 못할 테니까.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