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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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62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06화
106화
순우연의 찌푸려진 눈매가 가늘어졌다.
“천해라…….”
“솔직히 말씀드려서, 정보대로라면 본 가에서 신녀를 단독으로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가주님과 노가주님뿐입니다. 하나, 두 분이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만약 천해가 힘을 드러낸다면 누가 나설 것 같으냐?”
“사사(四師)가 나서면 좋겠지만 그들은 바로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도 십암(十暗) 정도가 나서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들이라 해도 둘이 합공만 해준다면 신녀의 소수공을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흐음…….”
“물론 본 가의 힘만으로도 정한궁을 멸망시킬 수는 있습니다. 신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본 가의 힘을 모두 드러낸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본 가 역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데, 피해가 커지면 다음 일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인즉 옳았다. 다만 알게 모르게 거리를 두고 있는 천해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순우연은 말문을 닫고 잠시 침묵에 잠겼다.
순우기정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가주가 내려야 하는 일이었다.
순우연의 입이 열린 것은 일각가량이 지나서였다.
“할 수 없군. 정한궁을 상대하자고 삼령을 모두 동원할 수도 없는 일. 좋아, 네 말대로 천해에 도움을 청하기로 하자.”
6
반쪽으로 조각난 달이 창공을 유영하며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각. 암천에서 그림자 하나가 바람의 결을 타고 지붕 위에 유유히 날아 내렸다.
반달이 부유하던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춘 순간, 암천에서 날아 내린 그림자가 밀천단의 건물 속으로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잠든 밀천단주의 방을 호위하고 있는 비밀 호위는 모두 넷.
건물 안으로 안개처럼 스며든 그림자는 손에 든 네 개의 고리를 그들에게 던졌다.
순간 소리 없이 날아간 네 개의 고리가 마치 스스로 움직이듯 네 호위의 뒷머리에 달라붙었다.
그 직후 네 호위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깊은 잠에 빠졌다. 고리 안에서 잠들어 있던 망각령(忘却靈)이 그들의 뇌리에 스며든 것이다.
그림자는 그들이 고개를 푹 숙이자, 먼지조차 일으키지 않고서 십여 장을 날아 자신이 목적했던 방으로 스며들었다.
사공은환은 이상할 정도로 멍한 기분에 눈을 떴다.
거미줄이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기분이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움직일 수가 없고, 입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 무엇도 내 것 같지가 않은 느낌.
‘응?’
그때다. 침상 앞에 희미한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막 뜬 눈으로 인해서 사물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긴 머리가 늘어진 것이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었다.
대경한 사공은환은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입안에서 욕지거리가 굴러다녔다.
그러나 욕지거리는 목구멍까지만 올라올 뿐 입 밖으로는 뱉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가끔 그럴 때가 있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날 밤에는 심심찮게 몸이 결박당하는 꿈을 꾸곤 했다.
때로는 사지가 찢기는 꿈을 꾸고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나기도 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인가보다.
낮에 좌소천을 만난 이후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문제는 찜찜한 기분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가슴 한켠에 돌덩이가 매달린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젠장! 그놈 때문에 이게 무슨…….’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희미하면서도 시커멓게 보이는 그림자. 그 그림자의 모습이 꼭 그놈 같았다.
좌소천, 바로 그놈 말이다.
‘재수 더럽게 없군. 꿈속에서도 저놈이 보이다니.’
그때, 꿈결에서 들리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귀청을 파고들었다.
“사공은환, 두 가지만 묻고자 한다. 대답 여하에 따라 죽음의 방법이 결정될 것이다.”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좌소천의 목소리다. 꿈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도 기분이 나쁜 것은 마찬가지다.
‘내 꿈속에서 꺼져!’
좌소천은 입만 벙긋거리는 사공은환을 내려다보았다.
사공은환은 단순히 혈도가 제압당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금라천황공에 의해 모든 기운이 억압당한 상태다.
심지어 정신마저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염불곡이 준 붉은 옥환에서 나온 몽귀령(夢鬼靈)이 금라천황공의 기운을 피해서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 바람에 그는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좌소천은 사공은환을 억압하고 있는 금라천황공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몽귀령도 사공은환의 정신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 사공은환의 반쯤 뜬 눈이 가늘게 떨리며 초점이 사라졌다.
그 즈음에야 좌소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 아버지의 죽음을 이용하자고 한 것이 너였더냐?”
입을 벙긋거리던 사공은환이 눈에 힘을 준다. 파르르 떨리는 것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의 병증을 악화시켰느냐?”
‘그, 그것은…….’
좌소천의 손이 목 부분을 향해 저어졌다.
순간 사공은환의 목구멍 속에 잠긴 말이 튀어나왔다.
“상극의 약재를 몰래…….”
스스로 놀랐는지 사공은환이 입을 닫았다.
좌소천의 목소리가 너울지며 사공은환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버지의 병증을 공령초의 열매가 아니면 고칠 수 없게 악화시켜서, 아버지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던 건가?”
눈이 거세게 흔들린 사공은환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그래 봐야 가래 끓듯이 겨우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무, 물론 그러긴 했지만……. 그러나 처음에 계책을 말한 사람은 좌유승이었어! 신월맹을 단숨에 부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지. 나, 나는 그저 궁주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야!”
“혁련무천이 시기를 앞당기라 하던가? 아니, 계책의 대상으로 아버지를 말하던가?”
“그, 그렇게 말하지는……. 그냥 제일 좋은 대상이 좌유승이어서, 내가 그의 죽음을 앞당기겠다고 하니까 반대하지 않았지…….”
사공은환은 처한 상황이 꿈인지 생신지 모르고, 뇌리 깊숙이 감춰져 있던 말을 꺼내며 횡설수설했다.
좌소천의 그의 말을 듣고 이을 부서질 듯이 악다물었다.
처음에 아버지가 계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당장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그 대상이 아버지 자신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사공은환이 넌지시 궁주에게 그 계책을 말하면서 아버지의 목숨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까지 말해주었다.
궁주는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사공은환이 손을 쓰는 것에 대해서 간접적인 승인을 했고.
‘결국 아버지는 당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스스로 계책의 대상이 될 생각을 했던 거야.’
혁련무천은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극구 반대하는 척하고 말이다.
방조(傍助). 가식(假飾). 불의(不義)!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제천신궁을 도모하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에 죄스러움이 찌꺼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은혜는 아버지가 목이 잘려서 돌아가신 그날 이후로 상쇄되어 사라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가 한 짓에 대해 글로 남겨라.”
좌소천의 시선이, 덜덜 떨며 눈알만 굴리고 있는 사공은환의 두 눈에 꽂혔다.
‘이건 꿈이다, 꿈이야. 그래, 분명 꿈이야.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도 그건 안 돼…….’
사공은환은 머리만 굴리는 단순한 군사가 아니었다.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밀천단의 단주 직을 맡을 정도로 무공 역시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자였다. 좌소천이 정신을 제압하기 위해 편법을 써야 했을 정도로.
하기에 그는 비몽사몽간에도 안간힘을 다해서 자신의 의지를 지키려 했다.
“그럴 수는…….”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싶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마라.”
악마의 숨결 같은 목소리가 파고든다.
사공은환은 몽유병 환자처럼 뻣뻣이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눈빛의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좌소천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침상 바로 옆의 탁자 위에는 술이 가득 찬 술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종이가 펼쳐져 있고, 먹물이 미리 갈아져 있는 벼루 위에는 붓이 하나 놓여 있었다.
유령처럼 느릿하니 걸음을 옮겨서 의자에 앉은 사공은환이 붓을 들었다.
잠시 후.
모두 두 장의 서신이 작성되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남긴 사공은환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좌소천은 무심한 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한 잔의 술은, 본의 아니게 나를 도와준 너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다. 죽어 아버지를 만나거든 무릎을 꿇고 죄를 빌어라, 사공은환.”
찰나!
좌소천의 구부러진 손가락이 사공은환의 천령개에 떨어졌다.
퍽!
호위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좌소천이 밀천단을 벗어난 지 일각이 지나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자 호위에만 신경을 썼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했다. 항상 묘시 안에 일어나는 사공은환이 진시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비가 조금 전에 지나가던 것 같은데……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나?’
결국 호위 중 하나가 의문을 품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공은환이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흠칫한 호위는 사공은환을 부르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사공은환의 머리 위쪽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붉게 물들어 있는 탁자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
머리 옆에 놓인 술잔에 가득 찬 술 색깔마저 붉게 보였다.
급히 다가간 그가 탁자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신음이나 다름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맙소사! 다, 단주께서……!”
날이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제천신궁의 내궁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부단주 종효민은 밀천단의 무사들에게 밀천단 일대를 봉쇄하라 이르고는, 다급히 사공은환의 죽음에 대해서 제천전에 알렸다.
혁련무천이 그 소식을 들은 때는 사공은환의 시신이 발견된 지 일각가량이 지나서였다.
그는 제천무령주 여가릉과 열 명의 제천무령을 대동하고 직접 사공은환의 방을 찾아갔다.
“어떻게 된 것이냐?”
무릎을 꿇고 있던 부단주 종효민이 참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밀천단의 호위들이 단주를 발견했을 때, 이미 저 상태로…….”
혁련무천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공은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탁자에 한 잔의 술과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천령개가 깨진 머리에 가려져서 종이에 쓰인 글이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탁자로 다가간 혁련무천은 옆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여가릉이 나서더니 사공은환의 머리를 치웠다.
혁련무천의 눈이 서신으로 향했다.
순간, 사공은환의 시신을 보고서도 미미한 반응을 보였던 혁련무천의 눈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곧 안정을 찾은 그는 손을 뻗어서 종이를 접었다.
천천히 돌아선 혁련무천이 종효민에게 물었다.
“탁자 위를 본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처음에 단주의 시신을 발견한 호위들, 넷…… 정도입니다.”
그들이 유언장을 읽어봤는지 읽어보지 않았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조건 봤다는 전제 하에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들을 들어오라 해라.”
종효민은 멈칫했지만, 하늘의 명이었다.
잠시 밖으로 나간 종효민이 네 호위를 데리고 들어왔다.
“속하들이 단주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하옵니다, 궁주!”
네 명의 호위가 무릎을 꿇자 혁련무천이 나직이 여가릉을 불렀다.
“여가릉.”
“예, 주군.”
굳이 명을 받을 것도 없었다.
여가릉의 손이 옆구리로 향했다.
그의 손이 검을 움켜쥐었을 때, 호위 중 하나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드릴 말씀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