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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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34화
134화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는 눈빛.
제갈진경은 허탈한 마음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토록 총명하고 냉정하던 네가 어찌 이렇게 변했단 말이냐?”
제갈승이 변한 것은 좌소천을 쫓던 그때부터였다.
모든 일에 항상 자신만만했던 무정효가 아니었던가. 한데 그 한 번의 좌절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변하게 했다.
자신의 실수로 제갈진우가 죽었다는 걸 알고서 죽고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남들은 그의 탓이 아니라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제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숙부.”
제갈진경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제갈승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제갈진유가 앞으로 나섰다.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일을 함으로 해서 아까운 형제들의 피가 골짜기를 적셨다. 그것만큼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를 악다문 제갈승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가 독하다 해도 제갈진유에게 말대꾸를 하지는 못했다.
제갈진유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좌소천을 향했다.
“본 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이네. 다행히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었으면 하네만.”
삼십여 명이 죽거나, 죽기 직전의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이 제갈세가의 무사들이었다.
그에 반해 좌소천의 일행은 십여 명만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진세에 말려들지 않았기에 그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만일 진이 펼쳐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숲 속으로 진입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그냥 물러가지요. 하나,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갈세가가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좌소천의 무심한 말에 제갈진유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내 이름을 걸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네.”
좌소천은 제갈진유의 대답을 들으며 제갈승을 바라보았다.
제갈세가의 무사 두 사람이, 분노와 고통으로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진 제갈승의 팔을 지혈하고 있다.
‘기다려라, 제갈승. 장 형의 한에 사무친 검이 곧 너를 찾을 것이다.’
그때였다.
헌원신우가 앞으로 나오더니 제갈진유를 향해 걸어갔다.
좌소천은 그의 뜻을 알고 그대로 놔두었다.
제갈진유가 고개를 돌리더니 다가오는 헌원신우를 직시했다.
이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헌원신우가 제갈진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 제일의 검을 익혔다 들었소. 손속을 나누어봤으면 싶소만?”
순간 어둠 속에서 제갈진유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신 역시 바라던 바였다. 자신이 직접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상대가 좌소천에서 헌원신우로 바뀐 것이 조금 불만일 뿐.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 역시 자신에 비해 하수라 할 수 없는 고수다. 그와 비무해 보면 좌소천에 대한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좋소. 단, 결과가 어찌 나오든 오늘 일은 더 이상 따지지 말도록 합시다.”
제갈진유는 헌원신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넓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그렁, 헌원신우는 걱정 말라는 듯 옆구리의 검을 손바닥으로 툭 치고 발을 내딛었다.
제갈진유와 헌원신우가 마주 선 채 반 각이 흘렀다.
그사이 제갈세가의 무사들은 사상자들을 한곳으로 옮기고 부상을 치료했다.
그때 제갈조릉이 좌소천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좌소천을 향해 물었다.
“혹시 일전에 초려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소?”
제갈진우가 몇 마디 말을 남겼다.
그중 ‘초려 밑’이라는 말을 풀기 위해, 제갈조릉은 초려의 바닥을 샅샅이 파헤쳐 보았다.
하지만 그는 잡다한 물건만 몇 개 발견했을 뿐, 막상 제갈진우가 남겼을 것으로 보이는 뭔가는 찾아내지 못했다.
죽어가던 사람이 헛소리를 남겼을 리는 없는 일. 그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서 밤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에 좌소천을 만났으니, 그로선 입이 근질거려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좌소천은 딱 잘라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남의 물건을 탐해 그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오.”
제갈조릉이 곤혹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그럼 초려 밑이라는 말은 대체 왜 남기신 거지?”
좌소천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면서도 약간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그 말을 묻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물어보았다는 것은, 그래야 할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초려 밑이라…….’
떠덩!
그때 충돌음이 밤하늘을 울리며 잔잔한 충격파가 전해졌다.
대치하고 있던 제갈진유과 헌원신우가 정면으로 부딪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일각가량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일곱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일곱 번의 부딪침으로 그들 주위 십 장이 평지처럼 변해 버렸다.
팽팽한 접전!
누가 우세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실력은 비등비등했다. 심하게 말하면 머리카락 하나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을 듯했다.
제갈진유는 헌원신우의 강함이 의외인 듯 두 눈에 놀람이 가득했고, 헌원신우는 오제 육기에도 들지 못하는 제갈진유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에 바윗덩이처럼 얼굴이 굳었다.
후우웅!
고오오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전신에서 좀 전보다 더욱 강한 기운이 쏟아졌다.
어둠이 진저리를 치며 파도치듯이 출렁였다.
결국 승부에 온정신이 팔린 두 사람이 전 공력을 끌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좌소천이 그걸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전 공력을 끌어올려 부딪치면 두 사람 다 내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양쪽 누구에게도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내상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설마 쓰러질 때까지 하시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나직하면서도 낭랑한 일성이 두 사람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구성의 금라천황공이 실린 음성!
맑고도 강력한 힘이 담긴 목소리가 그들의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그제야 두 사람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단순 비무로 시작한 일이 생사를 가를 지경에까지 갈 뻔했다. 멈출 수 있었는데도 호승심이 그걸 용납지 못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제갈진유가 먼저 한 걸음 물러섰다.
“나에게 아직도 이런 감정이 있을 줄은 몰랐소.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구려.”
바윗덩이 같던 헌원신우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별말씀을. 저야말로 승부에 대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허허허, 어쨌든 정말 좋은 대결이었소.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외다.”
“저 역시…….”
좀 전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이는 헌원신우다.
그 모습에 좌소천은 내심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말이 통하겠어.’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제갈진유를 바라보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까지의 일은 잊고,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그리 생각한다니, 나 역시 오늘의 일은 잊겠네.”
형인 제갈진우가 죽었다. 조카들이 죽고 손자들이 죽었다. 그리고 오늘, 또 세가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원한에 사무쳐 분노를 터뜨려야 했다.
제갈승처럼 좌소천을 죽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분노조차 끓어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이쯤에서 마무리 지은 것이 다행이라는 마음마저 든다. 제갈진경이 추적을 포기했을 때처럼.
강호는 그런 곳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죽음을 항상 옆구리에 낀 채 살아가야 하는 게 강호인의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명분도 없는 분노보다 세가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어른 때문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그가 강호인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후우, 다 내 생각 같지는 않겠지. 승아처럼…….’
2
좌소천은 양양에서 하루를 지내고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객잔에 찾아들자, 헌원신우와 능야산의 형제들은 입을 꾹 닫고 자신들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충격이 큰 듯했다.
헌원신우는 그들 중 제일 강한 고수다. 그런 헌원신우가 제갈진유를 이기지 못할 줄은 생각조차 못한 것 같았다.
좌소천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고, 시끄럽던 객잔도 문을 닫아 사위가 조용해진 자시 무렵.
침상에서 일어선 좌소천은 창문을 통해 방을 나섰다.
방 앞에선 이자광과 전하련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자신이 이 시각에 나가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볼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따라오겠다고 할 것이 뻔한 일.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는 몰래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이각 후, 융중산의 초려 앞에 도착한 좌소천은 대나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청죽에 둘러싸인 초려가 보였다.
부서졌던 청죽만상진은 원상대로 복구된 상태였다.
좌소천은 전과 달리 청죽만상진을 힘으로 부수지 않고 진세의 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초려 앞에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이 초려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눈을 방해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아예 완전히 들어엎었군.’
초려 주위는 말끔히 단장되어 있었는데, 초려 아래쪽의 흙이 깨끗한 걸로 봐서 제갈조릉이 한바탕 뒤집은 듯했다.
좌소천은 냉소를 지으며 초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초려 안에는 수백 권의 책이 탑을 이룬 채 쌓여 있었다. 이리저리 옮겨서인지 책에는 사람의 손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고, 또한 바닥에 깔렸던 대자리도 몇 번을 젖힌 흔적이 여실했다.
자신이 또다시 살펴볼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좌소천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세밀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이각이 되도록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찾고도 찾지 못했다니. 이상하군, 설마 제갈진우가 죽기 전에 헛소리를 남겼을 리는 없…….’
그때다. 가만히 서서 고개만 돌리던 좌소천의 눈이 한곳에 멎었다.
그의 눈가로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초려라고 해서 꼭 진짜 초려일 필요는 없지.’
족자가 보였다.
제갈량이 초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족자 안의 초려 밑에 시구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남이 보면 단순한 시구를 적어놓은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일반 문사가 본다면 고개를 저을 정도로 평범한 시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좌소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시를 적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가 오언이나 칠언 등 일정한 운율이 있는 반면, 족자에 쓰인 시는 그렇지가 않았다.
제갈진우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문사다. 그런 그가 왜 이런 평범한 시구가 적힌 족자를 자신의 거처에 걸어놓았을까?
문제는 그 시가 초려 밑에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시는 좌소천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좌소천은 가만히 서서 족자에 적힌 시구를 읽어보았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난해한 시였다.
그럼에도 한자 한자 읽어가는 좌소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의 내용은 다름 아닌 천해! 바로 그곳에 대한 것을 시처럼 풀어쓴 것이었다.
마침내 천해의 비밀이 뜻밖의 곳에서 한 꺼풀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좌소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을 읽어보고는, 완전히 머릿속에 새겼다는 생각이 들자 족자를 향해 손을 저었다.
순간 초려 밑에 적혀 있던 글자가 마치 수세미로 닦아낸 듯 깨끗이 지워졌다.
3
좌소천이 제갈세가를 방문한 그날, 비밀리에 다섯 사람이 황강산의 제천신궁에 들어섰다.
그들은 미리 마중 나와 있던 밀천단 무사들의 호위 하에 곧바로 내궁으로 향했다.
순우무종, 마침내 그가 혼사를 앞두고 인사를 할 겸, 혁련호승의 몸을 치료할 사람을 데리고 제천신궁을 방문한 것이다.
“궁주를 뵈옵니다.”
“날도 더운데 오느라 수고했네.”
혁련무천은 고개를 드는 순우무종을 직시한 채 물었다.
“그래, 호승이의 몸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