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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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24화
124화
3
안개가 구름처럼 출렁이며 태백산 자락을 휘감고 흘러간다.
유난히 짙은 안개다.
삼층 전각을 쓸며 지나가는 안개의 유동에 건물이 금방 무너질 것만 같다.
하지만 전각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반대편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표정. 이마를 찌푸린 사람도 몇 명이나 된다.
“의외의 일이었소. 그 어린 계집이 유사와 대등한 실력이었다니…….”
칠순의 흑의노인이 칼칼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순우연은 흑의노인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살려 보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노야.”
듣는 사람의 귀에는 그 말이 꼭 책망처럼 느껴졌다.
흑의노인의 눈가 반점에 가느다란 세 줄기 주름이 그어졌다.
“그 어린 계집의 실력을 정확히 알아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오, 가주.”
“십암 중 셋에다가 유사 어르신까지 나오셨으니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요.”
그에 대해선 흑의노인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들 역시도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순우연은 입이 닫힌 흑의노인에게서 눈을 떼고 앞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신녀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살아서 도망쳤다는 계집들도 모두 부상이 심하니 당분간은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오. 모두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다음 단계의 계획을 수행하는데 만전을 기해주시오.”
“예, 가주!”
“걱정 마십시오, 가주. 명만 떨어지면 단숨에 쓸어버리겠습니다.”
순우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흑의노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천해는 언제 움직일 계획입니까?”
흑의노인의 눈에서 사이한 빛이 번뜩였다.
“모든 준비를 마쳤소. 해주의 명이 떨어지면, 세상은 천해의 위대함을 알게 될 것이오.”
그 말에 순우연의 눈에서도 기이한 광채가 어른거렸다.
마침내 천 년의 잠을 깨고 천해가 열린다.
그간 소수의 사람들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천해 전체가 봉인을 깨고 나오는 것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천해의 진정한 힘을 알고 있는 순우연이기에, 그들이 나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았다.
흑의노인의 말대로, 그들이 나온 순간 천하는 경악하고 숨을 죽여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을 천해에게 모두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오, 노야.’
지난 천여 년간 천외천가는 천해를 위해서 제자들을 구해주고, 강호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도록 바람막이 역할을 해왔다.
그 대가를 받아야 했다.
순우연은 자신이 그 대가를 챙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천하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날. 그날이 대가를 받는 날이 될 것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오직 하나. 본 가는 천하에 태양처럼 군림할 것이다.’
순우연은 뛰려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해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변함없는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무궁이는 어떻습니까?”
흑의노인이 주름 진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사이로 내보낼 것이오. 그럭저럭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소. 좀 더 냉정해진 것 같기도 하고.”
“원래 그렇게 못난 녀석이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군요.”
그러잖아도 정한궁과의 싸움으로 피해가 많아서 한 사람이 아쉬운 판이었다.
순우무궁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면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처 흑의노인의 묘한 표정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깊은 곳에서 번뜩이던, 뭔지 모를 기대감에 찬 그의 눈빛도.
‘순우연, 너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네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기에 순우기정을 바라보고는 말을 돌렸다.
“기정, 혁련무천은 여전한가?”
“현재의 그는 우리에게 화를 낼 정신도 없습니다, 가주.”
“흠, 좌소천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좌소천이 호북 일대를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설칠 정도라 합니다.”
“훗, 그렇다면 다행이군.”
“해서 이 기회에 선물을 하나 하면 어떨까 합니다.”
“선물?”
“혁련호승의 끊어진 혈맥을 이을 수 있는 방법이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까?”
오랜 세월, 천해와 천외천가는 뛰어난 자질이 지닌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다 연구했다. 끊어진 혈맥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도 그러한 연구의 소산이었다.
물론 끊어진 혈맥이 잇는 방법이 사법에 가까워서 몸이 낫는 대신 약간의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였다.
“호오, 그러니까 혁련호승의 혈맥을 치유해 주고 모든 것을 무마하자, 그 말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혁련무천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우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자식의 몸을 고쳐 주겠다는데 어떤 아버지가 싫어할까?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좋네, 즉시 혁련무천에게 서신을 보내 의향을 물어보게.”
4
황파로 갔던 밀정들이 돌아온 것은 열흘 만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정보를 모아 혁련무천에게 보고하러 가는 호연금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정보원들이 거의 모든 정보를 수집해 왔다.
만일 좌소천에게 미리 전서를 받지 않았다면, 좌소천의 능력에 의문을 품고 마음을 바꿨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적당히 내줄 겁니다. 그대로 보고하십시오.]
좌소천이 정보를 내주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후우, 설마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다니…….’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거의 모든 정보라 생각한 것이 실제 상황의 반도 되지 않는다는 걸.
호연금은 제천전으로 가기 전 다른 곳을 먼저 들렀다.
그곳에는 세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그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청한 사람들이었다.
그가 들어가자 가운데 앉아 있던 흑염의 노인이 물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것인가?”
“이걸 보시지요.”
흑염노인은 호연금이 내민 서신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가 결심을 한 건가?”
옆에 있던 노인이 수염을 꼬며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가능하다고 보나?”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겠지. 정말 호북이 완전히 그의 손에 들어갔다면 말이야.”
“으음…….”
흑염의 노인이 침음성을 흘리자, 옆의 노인이 수염을 꼬던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자넨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아무리 궁주가 처신을 잘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궁주께 충의를 맹세한 우리가 아닌가?”
“아니, 정확히는 제천신궁에 충의를 맹세했지.”
“그건 그렇네만…….”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본 궁의 장래를 위해서, 본 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도. 솔직히… 태군사와의 우의를 헌신짝처럼 차버리고 천외천가와 손을 잡은 것은 너무했어. 아주 위험한 생각이야.”
“그럼 자네는 그의 손을 들어줄 생각인가?”
흑염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를 지그시 물고 나직이 답했다.
“그가 확실한 명분만 내놓는다면.”
“명분? 그럼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것이 알려졌네만, 그 정도로는 안 되네. 그보다 더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돼.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제천무제를 바닥까지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의 뭔가가 말이야. 그러한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게 될 거네.”
옆의 노인이 다시 수염을 꼬기 시작했다.
“복잡하군, 복잡해.”
흑염노인이 호연금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자네는 자네의 임무에만 충실하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직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는 말이다.
외나무다리에 한발을 걸친 호연금으로선 차라리 그 말이 더 편했다.
“예, 전주.”
일각 후.
제천전에 들어간 호연금은 천이당의 수하들이 가져온 정보를 정리한 보고서를 혁련무천에게 내밀었다.
혁련무천은 말없이 보고서를 천천히 읽어갔다. 한 장 한 장 보고서가 넘어갈 때마다 혁련무천의 표정도 굳어졌다.
호연금은 혁련무천이 언제 분노를 터뜨릴지 몰라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혁련무천의 입이 열린 것은 보고서를 건넨 지 근 이각이 지나서였다.
“소천이가 본 궁과 갈라서려 하고, 호북의 모든 지부가 소천이를 따르고 있단 말이지?”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극한의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내뱉는 목소리였다.
혁련무천의 입이 열리자, 호연금보다 반 각가량 늦게 들어온 종효민이 고개를 숙이며 마저 보고를 올렸다.
“어떤 자들은, 본 궁이 남제천과 북제천으로 갈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합니다, 궁주.”
여가릉이 노성을 내질렀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남제천과 북제천이라니? 어디서 감히!”
혁련호정도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확실한 정보요?”
종효민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총지부의 중간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온 말입니다, 대공자.”
“그렇다 해도 좌소천이 직접 한 말은 아니니, 십 할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겠소?”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만, 십중팔구는 확실한 정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중팔구라…….”
혁련호정은 종효민의 말을 되씹으며 혁련무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다 더 정확한 걸 알아봐야 하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대로 두어선 안 됩니다, 아버님.”
당연했다.
제천신궁을 반쪽 낸 놈을 어찌 그냥 놔둔단 말인가!
‘한눈판 사이에 호북을 집어삼키다니! 괘씸한 놈!’
사실이라면 전 궁도를 이끌고 황파로 달려가서 좌소천의 목을 칠 것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대제천신궁의 주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손안의 노리개에 불과했던 놈이 감히 반역을 하다니!
하지만 그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가 감정을 앞세워 모든 일을 처리했다면 결코 제천신궁을 지금처럼 키우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이전의 혁련무천이 아니라 하지만, 그는 현재도 천하제일패 제천무제였다.
문제는 정보가 사실이고, 좌소천이 정말로 호북의 모든 지부를 완벽히 제압했을 때의 상황이었다.
패천단과 호북 전체 지부의 무사들 수가 무려 오륙천에 이른다.
물론 자신이 움직이면 그중 일부는 돌아서겠지만.
그러나 그 수가 얼마나 될 것인지는 자신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끌어들인 사람이 다름 아닌 좌소천이기 때문이다.
신유 좌유승의 자식, 어릴 적 제학전의 스승들을 감탄시킨 기재. 그런 좌소천이 파도가 치면 휩쓸릴 사상누각을 지었을 리가 없다.
어느 순간, 혁련무천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번뜩였다.
“열흘 동안 상황을 좀 더 살펴보고 나서… 소천이를 소환해라.”
혁련호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가 사실이라면, 소천이가 오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혁련무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혁련무천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 반역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면 나는 놈의 반역을 천하에 공포하고 놈을 칠 것이다. 아마 십이 개 지부 중 몇 군데는 꽁지를 말고 나를 따를 것이다.”
“만일 소천이가 온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아버님? 의심을 풀고 그대로 놔두실 겁니까?”
“소천이가 오는 경우에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올 수도 있고, 정말로 반역할 생각이 없어서 올 수도 있다. 하나 어찌 되었든, 나는 소천이가 오면 무조건 그의 호북 총지부장 지위와 패천단주의 지위를 박탈할 것이다.”
그제야 혁련무천의 뜻을 짐작한 혁련호정이 눈을 빛냈다.
어느 쪽이든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소천이를 이곳에 철저히 묶어놔야겠군요. 아니면 아예 삭초제근을 하든지요.”
“바로 그것이야. 가릉, 즉시 황파에 서신을 보내서 소천이를 소환해라!”
여가릉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궁주!”
과거의 혁련무천을 보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벅찼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제천전에 혁련무천과 혁련호정만이 남았다.
그제야 혁련호정이 한 장의 서찰을 건네주었다.
“태백산에서 온 서신입니다, 아버님.”
“서신?”
혁련무천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서찰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곧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순우무종이 오는 길에 호승이의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온다고 한다. 어찌 생각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