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47화
무료소설 절대천왕: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47화
147화
한 점 흔들림 없는 목소리.
허탈감에 휩싸여 있던 금룡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스릉.
무진도가 도집을 찾아들어 갔다.
좌소천이 돌아서기 전에 한마디 더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에겐 그대들보다 궁도들이 더 소중하오. 그러니 나를 따르지 않을 생각이거든 오늘 중으로 떠나시오. 내일까지 남아 있다면, 궁도들에게 위협이 된다 생각하고 목숨을 거둘 것이오.”
그러고는 조금도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턱에 손을 괸 채 담장 위에 앉아 있던 동천옹이 탁! 무릎을 쳤다.
“캬아! 말 하나는 청산유수다!”
무영자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꼬마는 칼보다 입이 더 무섭다니까. 저 말 듣고 어떤 놈이 떠나겠다고 하겠어?”
동천옹과 무영자 옆에 앉아 있던, 대나무처럼 비쩍 마른 노인이 눈빛을 번뜩이며 좌소천을 노려보았다.
“강호가 한바탕 난리나게 생겼군요.”
“클클클, 이미 난리는 시작되었지.”
“얼굴도 잘생겼네.”
뜬금없는 말에 동천옹이 비쩍 마른 노인을 흘겨보았다.
“대꼬챙이, 행여나 네 못생긴 손녀딸 생각하고 있으면 일찍 접어. 이미 임자 있는 몸이니까.”
“거, 술 들어가는 배 따로 있고, 밥 들어가는 배 따로 있다지 않습니까? 혹시 압니까? 내 손녀를 마음에 들어할지.”
“신경 끄라니까. 자네 손녀보다 백배는 이쁜 아이가 궁주 마누라니까.”
하지만 비쩍 마른 노인은 생긴 모습대로 곧은 대나무만큼이나 고집이 셌다.
“얼굴만 예쁘다고 다는 아니죠.”
“그 애는 심성도 맑고, 하는 행동도 아주 착실해.”
“그것도 좋지만, 여자란 자고로 밤에…….”
“근데 이 자식이…….”
끝내 동천옹의 동그랗고 귀여워 보이는 눈이 쭉 찢어졌다.
무영자도 이때만큼은 동천옹의 편을 들었다.
“죽귀(竹鬼), 너 쪼개지고 싶어?”
담장 위에서 노인들이 옥신각신할 때였다. 금룡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금룡이… 궁주를 뵈오.”
겨우 몸을 일으킨 적룡이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꿇었다.
“적룡이 궁주를 뵈오이다.”
뒤이어 백룡과 청룡이 합창하듯 입을 열었다.
“백룡이…….”
“청룡이 궁주께 인사드리오.”
돌아선 좌소천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웃음이 매달렸다.
단순히 뛰어난 고수를 얻어서만이 아니었다.
혁련무천의 그림자가 하나 걷어진 만큼 장애물도 하나 사라진 것이다.
‘이 기회에 담판을 지어야겠군.’
좌소천은 무릎을 꿇은 비천사룡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두 시진 후에 봅시다.”
그러고는 후원을 빠져나왔다. 금방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는 노인들은 그냥 놔둔 채.
‘하다 그만두시겠지. 애들도 아니신데…….’
3
아침 햇살에 감싸인 천화원은 너무 조용해서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좌소천은 공손양과 도유관과 능야산만 대동한 채 천화원으로 향했다.
그들이 천화원으로 다가가자, 호성당의 무사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즉시 허리를 숙였다.
“궁주를 뵈옵니다!”
정식 취임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천신궁의 모든 사람들에게 좌소천은 이미 하늘이었다.
“기별을 넣어주시오.”
“알겠사옵니다!”
일곱 채의 건물이 들어선 천화원 안에 사는 사람은 모두 오십이 조금 넘었다.
전에 비하면 삼분의 일도 안 되는 인원. 그나마도 시비와 천화원 내부를 감시하는 무사들을 뺀 혁련가의 사람들은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
인원이 적으니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웃음소리는 이미 사흘 전부터 사라진 상태. 심지어 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좌소천은 천화원의 정원을 가로질러서 혁련무천이 기거하고 있는 천화전으로 갔다.
천화전에는 혁련무천 혼자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좌소천의 방문이 뜻밖인지 굳은 얼굴로 책을 덮었다.
좌소천은 태연한 걸음걸이로 혁련무천 앞까지 걸어간 후, 의자를 당겨 앉고 앞을 바라보았다.
단 사흘이 지났을 뿐이다. 그 사이 혁련무천의 머리는 백발이 되어 있었다.
“찾아뵙는 게 조금 늦었습니다.”
좌소천이 먼저 말을 건넸다.
혁련무천은 입을 꾹 닫고 좌소천을 바라보기만 했다.
“제가 원망스러우십니까?”
혁련무천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원망, 분노, 후회, 허탈함까지. 그의 눈빛에는 많은 것이 녹아 있었다.
“왜 왔느냐?”
“세 가지 요구할 것과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허옇게 쇤 혁련무천의 눈썹이 발에 밟힌 송충이처럼 꿈틀거렸다.
요구할 것만 말했다면 노성을 내지르며 당장 나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이어진 ‘제안’이라는 말이 그로 하여금 분노를 억누르게 했다.
“말해봐라.”
“하나는 제천동을 여는 방법입니다.”
혁련무천의 몸이 잘게 떨렸다.
제천동은 제천신궁의 진정한 무공이 보관된 곳으로 천화원 내부에 그 입구가 있었다.
좌소천이 제천동을 여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말은, 혁련무천의 남은 힘마저 모두 빼앗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었지만, 혁련무천은 대답을 미루고 다음 요구 사항을 물었다.
“또 다른 요구를 말해 봐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주십시오.”
이를 악다문 혁련무천이 눈을 내리깔았다.
“세 번째는… 뭐냐?”
“단전을 비워주십시오.”
혁련무천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네놈이 감히……!”
좌소천은 이미 혁련무천의 반응을 예상했기에 무심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매몰차게 느껴질지 몰라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쓰지 못할 무공, 차라리 범인으로 살아가시는 게 나으실 겁니다.”
“이미 심마에 들어서 내력의 반 이상을 소실한 나다. 한데 그것마저 염려된다는 것이냐?”
사실이 그랬다. 사흘 전의 심마가 본신의 진원진기를 흔들어놓았다.
그 바람에 그는 반이 넘는 내력을 잃었다. 그의 머리가 사흘 만에 백발이 된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혁련무천은 파르르 떨며 좌소천을 향해 고함을 치려다가, 갑자기 든 어떤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호정이와 호운이도……?”
좌소천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혁련무천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자신에게는 단전을 비우라 하면서, 훗날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위협이 될 게 분명한 아들들은 그냥 놔두겠다고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때 문득 든 생각.
“제안이란 것이 그럼……?”
좌소천은 혁련무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두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잘못을 저지른 부친을 둔 것뿐이지요.”
“…….”
혁련무천의 입이 아교에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좌소천은 그런 혁련무천을 바라보며, 가슴 깊숙이 품고 있던 생각을 끄집어냈다.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만, 저는…….”
반 각.
좌소천이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자, 혁련무천의 몸이 폭풍우를 만난 난파선처럼 흔들렸다.
“너, 너는… 대체…….”
좌소천은 몸을 떠는 혁련무천을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자정까지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였다.
콰당!
방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네가 왜 여기를 온 것이더냐! 아직도 훔쳐갈 것이 더 남았더냐?”
얼굴이 벌게진 혁련호정이었다.
밤새 술을 마신 듯,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숨소리에 섞인 술냄새가 확 코를 찌른다.
“가져가라! 다 가져가! 하지만 잊지 마라! 나 혁련호정은 아직 네놈을 인정할 수 없다! 언제고, 언제고 네놈을 꺾고 내 것을 되찾을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주향과 함께 밀려들었다.
좌소천은 무심한 눈으로 혁련호정을 응시했다.
충격이 컸을 것이다.
한순간에 천하제일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두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족과 함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미칠 것 같은 마음이겠지.
하지만 좌소천의 눈에는 그런 혁련호정의 몸부림이 투정처럼 보일 뿐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소한 어려움 한 번 없이 자란 당신이 내 마음을 어찌 알겠소?’
아마 혁련호정이 고난 속에서 커왔다면 저리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좌소천은, 노성을 내지르며 눈에서 불길을 뿜는 혁련호정을 향해 냉랭히 말했다.
“마음대로 해보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세상은 귀하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는 걸 말이오.”
“오냐, 이놈! 두고 봐라! 내 반드시…….”
그때다. 혁련무천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 해라, 호정!”
“아버님, 저놈이…….”
“그만 하라지 않느냐!”
“…….”
혁련호정은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신보다 더 분노해야 할 부친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좌소천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한번 바라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방을 나가려는데, 등에 대고 혁련무천이 나직이 물었다.
“믿어도 되겠느냐?”
좌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왔다.
혁련무천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좌소천이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호승이 상태는 어떠하냐 ?”
“끊어진 혈맥은 붙었습니다만, 그놈들이 뭘 먹였는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으음, 황 당주는 뭐라 하더냐?”
“아무래도 약기운이 머리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면서, 일단은 좀 더 두고 보면서 손을 쓰자고 합니다.”
“후우…….”
혁련무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하를 호령하던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오자, 혁련호정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놈이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했기에 아버님께서 그런 표정이신 겁니까?”
혁련무천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혁련호정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술을 마시지 마라. 그 이유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직접 말할 테니까.”
“……?”
4
서신을 내려놓은 사도철군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우리의 출정을 원하고 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무사를 원하는군. 하긴 천외천가와 싸우려면 어지간한 놈으로는 안 되겠지.”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가 눈을 치켜뜨고 전면을 향해 물었다.
“도운,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군의 마음과 같습니다.”
“킁.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다니,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사도철군이 짐짓 콧소리를 내며 백리도운을 흘겨보았다.
백리도운은 빙긋이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일차 출정에 대공자를 보냈으면 합니다, 주군.”
“진무를?”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천하를 질타해 보겠습니까? 더구나 좌 궁주와 함께 다니다 보면 대공자께서도 많은 것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거야 뭐…….”
사도철군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자신이 갔으면 했다.
지루하게 성 안에 처박혀 있느니, 강호에 나가 자신의 웅심을 펼치고 싶었다. 그런데 백리도운이 사도진무를 보내자고 하자 골이 난 것이다.
백리도운은 작정한 듯 사도철군의 속을 박박 긁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좌 궁주와 함께 출정하시면 주군께선 좌 궁주의 들러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철군은 의자에서 등을 떼고 벌떡 몸을 세웠다.
“그 말,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도운, 네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나를 납득시켜라! 만일 허튼소리로 나를 놀리려 했다면, 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싸늘한 눈빛이 백리도운의 눈에 꽂혔다.
하지만 백리도운은 꿈쩍도 않고 사도철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도철군의 마음을 긁다 못해 심장을 푹푹 찔렀다.
“제천전에 단신으로 들어가서 제천신궁을 거머쥔 좌소천입니다. 듣기로는 제천무제와 잠룡공자를 혼자서 상대하고도 밀리지 않았다 합니다. 과연 주군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도철군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흘러나왔다.
백리도운은 오금이 저리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신다 해도, 사실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