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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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63화
163화
왠지 ‘령’이라는 여인의 등에 무거운 짐이 얹어진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가엽게 느껴져. 한없이 강한 여인인데…….’
유령처럼 느껴졌던 자를 자신이 죽였다 했다. 아버지라 해도 쉽게 죽일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이거늘.
상대적인 비교만으로도 ‘령’이라는 여인이 오제와 비등한 무공을 지녔다는 말.
혁련미려는 그런 여인이 가엽게 느껴지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런데 반쯤 돌아섰을 때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오제와 비등한 무공. 면사로 가린 얼굴. 사람이라 볼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눈과 피부.
그녀는 번개처럼 몸을 돌리고 눈이 번쩍 쳐들렸다.
‘신녀! 그래, 진짜 신녀야!’
하지만 ‘령’이라는 여인은 어느새 사라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혁련미려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서서 소영령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랬어. 그녀가 태백산을 찾은 것은 복수 때문이었어. 바보같이! 신녀를 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아쉽고 안타까웠다. 바보멍청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신녀는 태백산으로 떠났고, 자신은 신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꼭 다시 만났으면…….’
실낱같은 희망만 남긴 채, 혁련미려는 아쉬움을 접고 몸을 돌렸다.
주지현의 객잔에 머물며 태백산의 동태를 감시하던 오계상은 자신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한 여인이 황사 바람을 등에 지고 객잔에 들어섰다.
그녀가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만 해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자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자신이 아는 한 사람의 얼굴이 겹치는 것이 아닌가.
흐트러진 머리와 먼지 묻은 얼굴, 허름한 경장이지만 갸름한 얼굴선과 아름다운 봉목만은 자신이 아는 여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서, 설마……?’
바라보는 사이 여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점소이에게 음식 주문을 하는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은 듯했다.
말투가 하남 지방의 말투다.
게다가 여인이 주문하는 음식. 그것은 섬서 지방의 음식이 아니었다.
하남, 그것도 남부 지방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점소이가 난색을 표하자 여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알아서 가져다 달라고 한다.
‘틀림없어.’
그는 확신을 갖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비문으로 짧게 서신을 쓴 후 천장에 숨겨두었던 전서구를 꺼냈다.
잠시 후.
한 마리 전서구가 남동쪽으로 날아갔다.
3
산등성이에 오르자 끝없이 펼쳐진 산야가 눈에 들어왔다.
“좋군! 태백산과는 또 다른 맛이야!”
순우무종은 감탄을 터뜨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천하가 당장에라도 자신의 품 안으로 달려들 것 같은 기분.
그는 자신의 결정이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 생각했다.
‘천해와 합류해서 화산을 치고 아버님과 해주가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흥! 기정 숙부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안에만 박혀 있으니 바깥의 일을 어찌 알겠나?’
순우무종은 본 가와 천해 몰래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주를 비롯한 섬서의 동부를 장악해서 하남으로 갈 길을 열어놓는다면 분명 보는 눈이 달라지겠지!
자신이 섬서의 동부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죄보다 공이 클 터. 누가 자신을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화산이야 진안의 이로(二路)가 천해와 합류해서 쳐도 충분할 것이었다.
‘후후후. 좌소천이라는 애송이가 오기 전에 완벽히 섬서를 장악하는 거야. 그러면 사람들도 알겠지. 내가 그 애송이보다 뛰어나다는 걸.’
마음이 붕 뜬 순우무종은 옆구리의 검을 움켜쥐었다.
“손 단주, 본 가의 무사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네 갈래로 갈라진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려면 한 시진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래?”
한 시진이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온 다음에 움직여도 충분했다.
그러나 순우무종은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며 이곳까지 달려온 그였다. 누가 감히 자신들의 앞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까마득히 보이는 마을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저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상주로 간다. 가자!”
제천단의 오대주 후종신은 염불곡에게 선택된 다섯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수하 넷과 함께 서쪽으로 달려갔다.
백 리를 달려서 사가촌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그는 수하들로 하여금 교대로 마을 입구에서 망을 보게 하고 허름한 객잔에 머물렀다.
천이당의 정보원이 전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더 이상 갈 필요도 없었다.
‘산양 남쪽을 지났다 했으니 곧 어디로든 모습을 드러내겠지.’
오히려 너무 멀리가면 자칫 그들을 지나칠지도 몰랐다.
그렇게 석양이 질 무렵.
후종신이 팔목에 찬 귀령환을 거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마을 입구에서 망을 보던 수하 하나가 달려와 소리쳤다.
“놈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대주!”
“몇 놈이나 되느냐?”
“대충 백 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그래? 가보자!”
즉시 객잔을 나선 후종신은 마을 입구의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석양이 지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수하 말대로,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무사들이 날듯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빠른 속도, 거침없는 움직임. 족히 백 명이 넘어 이백에 가까운 숫자다.
기다리던 놈들이었다. 그들이 아니고서는 이 일대에서 저렇게 움직일 자들이 없었다.
“일단 이곳을 피하자.”
그는 수하들과 함께 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산속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일각.
삼백 호 정도의 사가촌이 천외천가의 무사들로 뒤덮였다.
“이제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하 중 하나인 장호가 나직이 묻더니,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후종신을 바라보았다.
나머지 세 사람도 곁눈질을 하며, 기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이 자식들이……!’
아마 당사자만 아니라면 자신도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기분일 리가 없었다.
“눈 돌려. 돌리지 않는 놈은 이마에 이걸 붙여 버리겠다.”
후종신은 귀령환을 팔목에서 빼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고는 수하들이 눈을 돌리는 사이, 손목을 슬쩍 비수로 베어 피를 나오게 했다.
환의 굵기는 새끼손가락 굵기였다. 오목하게 뚫린 구멍은 두 푼 정도 되었는데, 그 작은 구멍 안으로 생각보다 많은 피가 들어갔다.
그런데 피가 거의 다 찰 즈음이었다. 파랗던 환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핏물에 젖은 것 같은 모습.
후종신은 환을 들어서 골이 파인 이마에 갖다 붙였다.
‘지미…….’
속으로야 떨떠름했지만, 겉으로는 염불곡이 알려준 몇 마디 말을 되뇌었다.
“귀령아, 네 주인에게 내 눈과 입을 전해주렴.”
순간, 이마가 뜨거워졌다.
머릿속으로 뭔가가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흐미, 설마 내 머릿속으로 귀신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머리가 아프다거나, 어지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후종신은 내심 안도하며 마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4
“놈들을 발견했군.”
형형색색의 깃발 수십 개가 꽂힌 방 안에 앉아 있던 염불곡이 파란 눈빛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자, 그를 보호할 겸 대들보에 누워 있던 무영자가 그림자처럼 내려왔다.
“어디라더냐?”
염불곡이 입을 오므리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사가촌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밤을 샐 것 같다고 합니다.”
염불곡이 후종신에게 붙은 귀령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곧바로 좌소천에게 전해졌다.
“사가촌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요.”
뻐드렁니가 재빨리 사가촌의 위치를 말했다. 그러자 들창코가 보충 설명을 했다.
“집이 삼백 호 정도 되는 마을입죠.”
공손양이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남들 눈에 안 뜨이게 마을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소?”
들창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뒤쪽에 제법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을 넘으면 마을 뒤까지 바로 갈 수 있습니다요.”
공손양이 좌소천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좌소천은 오행대의 대주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놈들 대다수가 그곳에 모여 있을 것입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피해가 적어질 터. 나 하나의 실수가 동료의 피해로 돌아간다는 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궁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몸에서 살을 에는 기운이 뭉게구름처럼 일었다.
섬서대전의 서막을 자신들이 장식한다는 생각에 전율이 이는 것이다.
5
밤이 될 때까지 사가촌에 도착한 자들은 모두 칠백여 명.
사가촌은 갑자기 몰려든 엄청난 손님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허름한 객잔은 물론이고 일반 집들까지 모조리 그들이 차지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이 춥지 않다는 것이었다.
집을 손님들에게 내주고 길거리로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그것만도 감지덕지였다.
마을의 집을 모두 차지한 후, 순우무종은 음식을 마련하라며 삼십 냥의 금자를 인심 쓰듯 던져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스무 마리의 돼지를 잡고, 백여 마리의 닭을 잡았다. 그야말로 마을에 있는 돼지와 닭을 싹 쓸어서 잡다시피 한 것이다.
거기다 숨겨놓았던 술마저 내놓았다.
그러면서 제발 조용히 물러가 주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 가끔 그렇듯이, 상황은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았다.
다름 아닌 여인들 때문이었다. 마을에 젊은 여인들이 제법 있었는데, 무사들 중 일부가 여인들을 보고 음심을 드러낸 것이다.
천외천가의 무사들이야 워낙 규율이 심해서 함부로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들과 섞인 각 문파의 무사들은 음심을 참지 못했다.
밤이 깊어가는 시각, 여기저기서 말다툼이 일었다.
“내 딸아이를 왜 데려가는 거요?”
“그냥 심심해서 잠시 이야기 좀 나누려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마라.”
“안 됩니다, 나으리!”
“걱정 말라니까!”
“놔줘요! 저는 따라가기 싫어요! 아버지!”
뾰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과 신음이 뒤엉켰다.
퍼벅!
“비키라니까!”
“허억!”
“아악! 아버지!”
대부분의 간부들은 수하들의 그런 행동을 알고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그머니 앞장서는 자마저 보였다.
몇몇 간부들이 나서서 눈을 부라렸지만, 그나마도 심하게 하지 마라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게 소란이 점점 커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일에 대한 것이 순우무종의 귀까지 들어갔다.
하지만 순우무종 역시 그들을 그냥 놔두게 했다.
사람을 죽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또 피를 봐야 한다.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상천단주 강대종도 순우무종과 뜻을 같이했다.
“총령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정 뭐하면 몇 푼 던져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흠, 그도 그렇군. 손 단주, 계집 하나당 열 냥의 은자를 주라고 해라.”
손자기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마을의 여인들은 기루의 여인들이 아니다. 돈을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돌려 말했다.
“총령주, 내일 일을 위해서라도 무사들을 단속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순우무종은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칫하고는, 눈만 치켜뜨고 손자기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쾌락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하지. 내일 상주의 풍성보를 치면서 그 덕에 열의 목을 더 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익이 아니겠나?”
순우무종은 술잔을 마저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고 손자기를 응시했다.
“그리고… 결정은 내가 한다. 자넨 따르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총령주.”
손자기는 순우무종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의 충고를 포기했다.
사실 순우무종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기에 전장에서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지고는 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민심을 잃은 정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후우, 지나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텐데…….’
그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려 할 때다. 뒤에서 순우무종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팔 하나 없어도 머리 돌아가는 것이 아까워서 아껴주려 했거늘, 어째 갈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