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1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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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191화
191화
손을 잡고 천해에 대항해도 모자랄 판에 형제들끼리 싸워온 세월이 수백 년이다.
금라천이 무너진 후에야 담대위겸은 선조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정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선조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 때문에 후예들은 처절한 시련을 겪으며 수십 년 세월을 살아왔다.
천해가 뛰쳐나와 세상을 피로 물들이게 된 것도 천부의 힘이 갈라진 게 가장 큰 원인일 터. 천벌이 내린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담대위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두 눈 뜨고 지켜봤으니까.
그러나 누가 뭐래도 원수는 원수다.
자신의 가족들을, 동료들을 죽인 철천지원수의 혈육!
분노! 회한!
담대위겸은 두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마음만 먹으면 앞에 있는 좌소천을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다.
단 한 번의 손짓이면 목에서 머리를 떼어낼 수가 있다. 그리고 선령들에게 제물로 받칠 수 있다.
아마 이십여 년 전에 만났다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오십 년의 세월이 한을 희석시킨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난 이십수 년간 천해에 당해온 한이 더욱 큰 까닭이다.
하나를 위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하늘이여! 대체 나에게 무얼 바라는 것이오!’
한참 만에 담대위겸의 입이 열렸다. 그의 잇새로 한마디 한마디가 짓이겨진 채 흘러나왔다.
“이곳이 어딘 줄 아는가?”
“……?”
좌소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담대위겸을 쳐다보았다.
태백산에서 정신을 잃었다. 당연히 태백산 근처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담대위겸이 묻는 걸로 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게다가 조금 전의 이웃집 할아버지 같던 표정이 아니다. 마치 불구대천지수라도 마주한 표정이다.
좌소천은 의아해하면서도 담담히 물었다.
“태백산이 아닙니까?”
담대위겸이 느릿하니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태백산에서 천 리도 더 떨어진 촉산의 깊은 곳이네. 그리고 자네는 칠 일 만에 정신을 차렸지.”
촉산과 칠 일!
그 말에 좌소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맙소사. 그럼 영풍산장에서 난리가 났겠군.’
부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존 여부였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서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담대위겸의 이어진 말에 좌소천은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이 어딘가 하는 것이네. 저기를 보게.”
담대위겸의 손이 석문을 가리켰다.
좌소천의 눈이 그의 손끝을 따라갔다.
환상천부라 쓰인 글자가 보였다.
‘환상천부?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그때다. 두 가지 단어가 모이면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촉산과 환상천부.
입을 여는 좌소천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환상… 마궁?”
“환상마궁은 환상천부의 한 갈래에 불과하다네. 하지만 그리 불러도 상관은 없네. 밖의 폐허가 바로 환상마궁이 있던 자리니까.”
“어떻게 이곳을? 환상마궁은 망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담대위겸이 이를 악물고 좌소천의 눈을 직시했다.
“망했지. 그것도 철저히. 처음에는 금라천에게 당하고, 나중에는 그나마도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천해의 손발인 천외천가의 무리에게 대부분 죽어갔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라네. 나, 담대위겸이 살아 있는 것처럼.”
좌소천은 극도로 경악해서 온몸이 굳었다.
심지어 천해에 들어갔을 때보다도 더 놀랐다.
어찌 놀라지 않으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금라천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 환상마궁의 생존자라니!
좌소천의 입이 아교로 붙인 것처럼 딱 붙어버렸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길 일각, 좌소천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담대위겸이 먼저, 차마 벌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려서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더 있네.”
좌소천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수십 년간 사무친 원한이 하늘에 닿았을 것이다.
자신이 금라천의 후예라는 것을 알았으니, 자신의 목으로, 피로 한 맺힌 마음을 달래고도 싶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걸 가슴에 묻었다는 듯 그저 묻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늘.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조금 전 금판이라고 했는데…….”
좌소천은 고개를 들고 사정을 설명했다.
좌소천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담대위겸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러니까, 자네의 어머니가 가져온 그것을 아버지가 해석해 냈고, 자네가 그것을 익혔단 말인가?”
“예, 어르신.”
“허어어!”
담대위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한에 대한 미련조차 털어버리는 탄성이었다.
“정녕 하늘의 뜻은 넓고도 깊어서 감히 내 머리로는 짐작도 못하겠구나. 혈천마마공이 완성되어 막막했거늘, 묵천금판의 비밀도 풀렸다니.”
‘정녕 한을 잊으라는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담대위겸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좀 더 차분해진 목소리로 좌소천에게 물었다.
“묵천금황기(墨天金皇氣)를 얼마나 익혔는가?”
좌소천은 묵천금황기가 금라천왕공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담담히 말했다.
“아직 완성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구성 정도는 익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담대위겸의 주름진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제야 그는 좌소천이 천해의 해주와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성이라…….”
그는 묵령기환보를 집어 들고 좌소천에게 말했다.
“이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나?”
“저는 그저 묵령기환보로 알고 있습니다만.”
담대위겸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의 진짜 이름은 묵령천보라네. 달리 묵령시라고도 부르지. 왜 그리 부르는지 아는가?”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좌소천은 그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담대위겸은 바로 말해주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환상천부의 석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묵령기환보를 들고 일어나서 환상천부의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묻어두기로 한 한이 아닌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따라오게.”
좌소천도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다.
담대위겸은 석문 앞에 이르러 손으로 조각을 쓸어 만졌다.
그의 손이 가슴 높이의 용머리 위에 얹어졌을 때다.
덜컹.
나직한 마찰음과 함께 여의주가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바로 이것이 환상천부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네. 이곳에 묵령시를 꽂고 자네가 익힌 묵천금황기를 일으키면 안쪽에서 기관이 작동하고 문이 열리지.”
묵령기환보가 단순히 열쇠에 불과하다니.
조금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하지만 실망은 하지 않았다. 환상천부를 열 수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엄청난 가치가 있는 보물이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묵령기환보와 금라천황공 사이에 그러한 연관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사실.
좌소천은 오히려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담대위겸의 말을 경청했다.
“물론 지금은 자네의 내력이 워낙 약해서 혼자서는 열 수가 없네.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가 익힌 무공 역시 자네와 일맥상통하니까.”
사실 그가 모험이라 생각한 것도 묵천금황기가 아닌 자신의 내력으로 문을 열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천금황기를 익힌 좌소천이 있는 이상, 이제 문은 여는 일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비록 내상으로 인해서 소량의 공력밖에 쓸 수 없는 좌소천이지만, 자신이 차체전력의 방법으로 공력을 보태주면 문을 열 수 있는 정도는 될 테니까.
“나 역시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네. 다만 한 가지, 이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자네의 내상을 치료하고 천해의 야욕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네. 물론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긴 하네만.”
담대위겸은 묵묵히 말을 이으며 묵령기환보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스르릉.
묵령기환보가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다섯 치 정도를 남기고 멈췄다.
딸깍.
그때 석문 안에서 들릴 듯 말 듯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담대위겸은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좌소천을 돌아다보았다.
“금라천과 환상마궁을 비롯해서 묵령천의 모든 것이 바로 이 안에서 나왔다네. 이리 와서 이걸 잡고 묵천금황기를 일으키게. 모자라는 내력은 내가 도와주겠네.”
좌소천은 묵령기환보를 묵묵히 내려다보고는, 숨을 들이쉬고 그 끝을 잡았다.
여느 때와 달리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석문 안에서 누군가가 묵령기환보를 꼭 쥐고 있는 듯했다.
“시작하지.”
그때 담대위겸이 좌소천의 등에 손을 붙였다. 동시에 부드러우면서도 익숙함이 느껴지는 기운이 밀려들었다.
좌소천은 명문혈을 통해서 스며든 담대위겸의 기운을 천천히 단전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단전으로 모여든 기운이 자신의 오성 공력에 이를 즈음, 마침내 묵천금황기를 운기하기 시작했다.
담대위겸의 도움을 받고는 있다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온전한 내력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몸도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억지로 묵천금황기를 끌어올리는 상황.
좌소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그시 악다문 입에 힘이 들어가며 턱 근육이 불거졌다.
그러나 힘이 든다고 해서 중단할 수는 없는 일. 좌소천은 혼신을 다해서 우수에 집결된 묵천금황기를 묵령기환보에 밀어 넣었다.
‘담대 어르신은 한조차 포기하셨다. 한데 이 정도도 참지 못한단 말이냐, 좌소천!’
좌소천의 우수에서 흘러나오는 묵빛 금광이 짙어지고, 묵빛 금광이 묵령기환보로 밀려들어 간 순간!
웅웅웅!
석문 안에서 기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철컥!
짧은 기관음이 들림과 동시!
화악! 묵령기환보가 꽂힌 구멍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금빛 광채가 쏟아졌다.
“으음…….”
좌소천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구멍에서 밀려나오는 묵령기환보를 붙잡고 주춤 물러섰다.
담대위겸도 그제야 좌소천의 등에서 손을 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걸 보면 그 역시 적잖은 내공을 소모한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석문이 뒤로 밀리며 천 년 만에 환상천부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 * *
양쪽에 박힌 열두 개의 야광주가 이십 장의 길이의 통로를 은은하게 밝혔다.
석벽에는 수많은 군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정교한지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서 숨 쉬는 듯했다.
“환상천부의 탄생에 대한 비사를 새겨놓은 것 같군.”
담대위겸이 석벽의 조각을 보더니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좌소천은 그 말에 조각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담대위겸의 말대로 석벽의 조각이 환상천부의 탄생을 새긴 것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각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조각을 살피던 좌소천의 눈이 반짝였다.
‘천해!’
일곱 사람이 광장에서 싸우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곳. 그곳은 천해의 광장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에 손과 검을 꽂더니, 그중 세 사람이 한 맺힌 표정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깊은 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 담대위겸이 세 사람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저분이 묵령천의 가장 큰 어른이신 환천자시고, 저 두 분은 금라천의 시조이신 환무자, 환상마궁의 시조이신 환상자라는 분이시네. 세 분이 천부를 일으키셨지.”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었다. 동시에 통로도 끝이 났다.
좌소천은 통로의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그곳부터는 통로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입구에 각 통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환천동(幻天洞). 환무동(幻武洞). 환상동(幻想洞).
좌소천이 어디로 들어갈까 망설이는데, 뒤에서 담대위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저 안에서 세 분이 남기신 것을 얻도록 하게. 아마 적지 않은 세월이 걸릴 것이야. 자잘한 일은 나에게 맡기고 최대한 빨리 모든 것을 수습하게나.”
좌소천은 묵묵히 세 통로를 바라보다 환무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