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천왕 2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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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4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절대천왕 204화
204화
잠시 말을 끈 공손양은 소영령을 똑바로 바로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소영령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나직이 말했다.
“아직 듣지 못하셨지요?”
“뭘 말인가요?”
의아해하는 소영령의 봉목이 크게 뜨인다.
공손양의 미소가 짙어졌다.
“주군께서 돌아오고 계십니다.”
순간 소영령의 차갑게만 보이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정말… 인가요?”
“제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오늘 중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빠르면 오전 중에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영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았다.
문득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다고 느껴졌다.
공손양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조용히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소영령은 공손양이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도, 몸이 떨려 일어나지를 못했다.
가슴이 콱 막혀 고맙다는 말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오오오! 하늘이여!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누구보다 좌소천과 공야황의 무위를 잘 아는 그녀다. 하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 부딪치면, 최악의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한,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으로 인해 벌어졌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좌소천이 무리하게 천해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비천사룡 중 세 사람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상을 입고 공야황에게 쫓겨 행방불명될 이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오늘,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을 터.
미안하고 미안하다.
볼 낯이 없다.
더구나 소천 오빠에게는 부인이 있다지 않던가.
‘그냥 떠날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냥 떠나면 소천 오빠가 또 자신을 찾기 위해 천하를 뒤질지 모른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리고 숙부 역시.
잘못을 반복할 수는 없는 일.
‘그래, 만나서 말하자.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부인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내가 떠나더라도…….’
갑자기 속눈썹에 맺힌 이슬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바보같이!’
그녀는 도리질을 치며 눈자위의 눈물자국을 소매로 쓱쓱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 걸까, 어느새 동이 터온다.
그녀는 창문을 열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면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았다.
“덩치만 커졌지,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울보군.”
뒤에서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맙소사!
눈을 부릅뜬 소영령의 몸이 봄바람에 몸을 떠는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항상 귀청에서 맴돌던 목소리, 꿈속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 소천 오빠의 목소리다.
“허엉!”
끝내 소영령의 입에서 헛기침 소리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돌아서고 싶은데 두려워 돌아설 수가 없었다.
돌아섰는데 오빠가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닐까?
그때 또 좌소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는데?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홱 몸을 돌린 소영령은 튕기듯이 몸을 날렸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허약해진 심신으로 인해 환청이 들리고 환영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물을 닦을 동안 목소리가 끊기고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일. 그러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와락!
소영령이, 말괄량이 사매가, 구름덩이가 안겨든다.
좌소천은 품 안으로 안겨드는 소영령을 피하지 않았다.
안긴 채 잘게 떨리는 몸이, 비에 젖은 채 몸을 떠는 한 마리 외기러기 같기만 하다.
그는 손을 뻗어 품 안에 안겨 소리없이 우는 소영령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의 그녀는 냉혹한 신녀도, 복수를 하기 위해 천외천가의 고수들을 암살하던 한에 사무친 여인도 아니었다.
그저 무은도에서 깔깔거리며 말썽 피웠던, 한때 자신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영령일 뿐이었다.
소영령이 좌소천의 품에서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래 봐야 두 자 앞이다. 게다가 울면서 면사가 떨어져 나간 상태. 좌소천은 그제야 소영령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천해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 번 보면 세상 남자들이 넋을 잃는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겠는걸?”
소영령이 소매로 눈물자국을 닦아내며 피식 웃었다.
“오빠는 안 흔들리는 것 같은데요?”
“그거야 당연하지. 영령이가 내 눈에는 인상 바락바락 쓰며 밥에 주먹만 한 돌을 넣겠다고 위협하던 말괄량이 아가씨로밖에 보이지 않거든.”
“뭐예요?”
소매를 내린 소영령이 눈을 흘겼다.
순수함과 요염함이 어우러진 얼굴.
그 모습에 좌소천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진정시키려 해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급히 눈을 돌리려 했지만 도저히 돌릴 수가 없었다.
그때, 소영령이 장난하듯 좌소천의 눈앞에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연한 사향내가 확 밀려든다.
항거할 수 없는 유혹!
“봐요. 어디가 말괄량이 같은……. 읍!”
그녀가 입을 연 순간, 좌소천의 두터운 입술이 소영령의 붉은 입술을 덮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피할 수 있었는데도 피하지 않았는지 몰랐다.
두 눈을 꼭 감은 소영령은 손을 뻗어 좌소천의 목을 감싸 안았다.
머릿속에서 하얀 폭죽이 터지는 듯했다.
아득해진 정신은 이성을 찾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은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멈춰 버렸다.
한참을 지나서야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다.
소영령은 복사꽃처럼 붉게 물든 얼굴을 푹 숙인 채 좌소천의 가슴만 바라보고, 좌소천은 고개를 쳐든 채 멍한 눈으로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오, 오빠, 손 좀…….”
“어? 어……. 너도…….”
“어머…….”
좌소천은 허리를 감은 손을 풀고, 소영령은 목을 감은 손을 풀었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다.
좌소천이 용기를 내 물었다.
“저기, 영령아, 네 몸속에 깃든 마기를 몰아낼까 하는데, 괜찮겠어?”
소영령이 복사꽃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발딱 치켜들었다.
“정말요? 할 수 있어요?”
“내 몸속의 마기도 몰아냈으니 네 몸속의 마기도 몰아낼 수 있을 거다. 성공할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백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붉은 아지랑이다.
그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묵빛 금광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좌소천이 소영령의 명문혈을 통해 묵천금황기를 주입한 지 두 시진, 마침내 혈천마마공의 마기가 체외로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령아, 한천빙백공을 조금씩 운기해 봐라.”
좌소천의 심어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자 소영령은 조심스럽게 한천빙백공을 끌어올렸다.
단전과 심장 근처에 안개처럼 끼어 있던 마기가 서서히 걷히자 맑은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얼마 만일까.
기분 좋은 청아함에 온몸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다.
그녀는 그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한천빙백공을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는 마라. 어차피 한 번에 다 제거되지는 않을 테니까.”
좌소천이 급히 그녀를 말렸다.
욕심을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몸 안에 자리 잡은 기운이 쉽게 밀려날 리 없었다.
소영령은 좌소천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끌어올리던 기운을 누그러뜨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좌소천이 소영령의 명문혈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 시간을 두고 소영령이 돌아앉았다.
눈을 내리깐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미안했어요, 오빠.”
수주에서의 일을 말하는 듯하다.
“미안하기는 오히려 내가 미안했지. 영령이야 기억을 잃어서 그랬다지만, 나는 멀쩡한데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더구나 내 칼이 너를 다치게 했고…….”
“얼굴을 가렸잖아요.”
“그냥 보고 알았어야지. 나는 그럴 줄 알았거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보이기만 하면 언제든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피이, 엉터리…….”
소영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신녀가 되며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은 이제 봄날처럼 풀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너무 풀어졌는지 자꾸 눈물이 맺히려고 한다.
하긴 그동안 흘리지 못해 쌓인 눈물이 얼마던가.
그녀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몸이 나으면 저도 싸울 거예요. 저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
좌소천은 짐짓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라고 내상을 치료해 주는 건데.”
그 말에 소영령이 눈을 흘겼다.
그제야 조금 옛날의 말괄량이 소영령처럼 보인다.
그때 좌소천이 물었다.
“호운은 어떻게 되었지? 안 보이던데.”
소영령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제천신궁으로 보냈는데, 너무 내상이 심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겨우 숨만 쉬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래요.”
미안함인가, 연민인가.
웅얼거리듯 입을 여는 소영령의 눈이 잘게 떨린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 좌소천은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인이 자신의 사매인 영령이란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호운, 미안하다.’
달려가 혁련호운을 보고 싶었다.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을 생각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허락지 않았다.
‘내가 갈 때까지는 견딜 수 있겠지, 호운?’
다행히 제천신궁에는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신의 황연송이 있다. 그라면 혁련호운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간다고 해서 뚜렷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마기를 제거한다고 해서 몸이 낫기에는 너무 늦었다. 몸 자체가 자신의 묵천금황기를 견딜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좌소천은 고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어라.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올 테니까.”
밖으로 나가자 저만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소광섭이 보였다.
오래 앉아 있었는지 옷자락이 이슬에 젖어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소광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소 대협.”
검인보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이후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소광섭이 오늘은 고개를 들어 좌소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격동을 참는 듯 잘게 떨리는 눈빛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소. 못 만나고 죽을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다행이오.”
좌소천은 소광섭의 마음을 알고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령 매를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세상이 허락할지 모르겠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래 사셔서 손자를 안아보셔야지요.”
손자? 뜬금없는 말이다.
순간 소광섭의 눈에 묘한 빛이 반짝였다.
항상 차갑게 굳어만 있던 그의 눈에 가벼운 열기가 번졌다.
“그것도 그렇구려. 내가 잘못 생각했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래 살아야 할 것 같소.”
“당연히 그러셔야 합니다.”
소광섭과 헤어진 좌소천은 일단 공손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일각, 공손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문이 거세게 열리더니, 동천옹을 선두로 네 노인이 우르르 들어왔다.
“왔다고?!”
좌소천은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고 없냐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홀쭉해진 내 얼굴을 보게나. 여령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얼마나 고민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되었겠나?”
동천옹이 바락바락 소리치자 무영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론데? 살은 더 찐 것 같고 말이지.”
“검둥이, 너는 빠져!”
무영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괜히 나한테만 지랄이야.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