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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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5화
은천검제
제15화
아는 얼굴이라 그랬을까.
억울한 상황에서 형을 만난 아이처럼 양일은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이미 한바탕 당했는지 주방 앞에 선 노반은 안쓰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무슨 일입니까?”
진무린은 양일의 앞에서 가랑이를 벌린 채 앉은 젊은 무인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파란 영웅건으로 머리를 묶었고, ‘승조’란 두 글자를 새긴 무복에 소매는 토시를 감아 단단함을 강조한 복장이었다.
스물 후반이나 서른 초반으로 보였는데 찢어진 눈과 뾰족한 코를 지녀서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는 귀하는 누구시오?”
질문을 던지는 젊은 남자 뒤로 나이가 제법 보이는 무인 둘, 그리고 표사로 보이는 서른 중반의 무인 둘, 그밖에 쟁자수로 보이는 이들이 열댓 명쯤 있었다.
“진무린이라 합니다. 이곳에 보름쯤 머물러 아이의 심성을 짐작하는 터라 혹 오해가 있지 않은지 물었습니다.”
“흥!”
불쾌한 소리를 토해낸 뾰족한 인상의 젊은 무인이 꿇어앉은 양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놈이 우리 표물에 손대는 것을 잡아서 버릇을 고치던 참이오. 그러니 상관없는 분은 방으로 들어가시구려.”
진무린이 시선을 돌린 곳에서 양일이 고개를 짧게 저었다.
“무슨 일이냐?”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젊은 무인과 주변에 둘러선 이들의 시선이 단박에 진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표물을 욕심냈었어?”
“그게 아니라…….”
“이놈!”
입을 열던 점소이 양일이 움찔했다.
그런데 꾸짖는 순간이 참 묘했다.
바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마치 진무린을 향해 욕을 한 것처럼 보였다.
“도둑을 감싸겠다는 거요?”
“내용을 들을까 했을 뿐입니다.”
“내가 표국의 부국주요. 여기 표두 두 분에 표사가 둘이나 있는데 아무렴 죄 없는 아이를 앉혀두었을까.”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양일의 말을 들어보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도 안 된다 할 이유가 있습니까?”
“양일?”
“아이의 이름이 양일이오.”
진무린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부국주라는 젊은 무인이 눈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벌을 주는 것이 맞소. 그러나 본인이 억울하다면 항변할 기회를 주는 것 또한 도리요.”
“매번 찾아오는 이가 있을 때마다 항변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건가? 아니면 귀하가 그럴 자격이나 능력이 있다는 건가?”
거만한 부국주의 말에 진무린은 픽 웃었다.
“내게 자격이 있으면 들어도 되나?”
“이 자가……!”
언짢았던 진무린의 말투가 바뀌자 부국주가 발끈했다.
흑사련이 날뛸 때는 숨소리조차 죽이던 인간들이 약한 이들에게는 이토록 힘을 과시한다.
시비를 길게 끌 생각이 없는 진무린은 은천심법을 펼쳐 객잔 안에 있는 이들을 짓눌렀다.
“컥!”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실력으로 어찌 자리를 얻었을까 싶을 정도로 부국주의 내공은 형편없었고, 표두와 표사들은 비룡방에서 보았던 철비완에 비해 손색이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챈 노반과 양일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승조표국 일행은 모두 힘겨운 기색으로 진무린의 눈치를 살폈다.
“대협. 저희가 몰라뵙고…….”
“그 입 닫아라.”
입을 열던 표두 한 명이 진무린의 눈초리를 받고는 얼른 뒷말을 삼켰다.
“부국주의 말대로 능력이 있으니 알아볼 참이다. 만약 아이에게 죄가 있다면 내가 사죄할 테고, 죄가 없다면 너희에게 비슷한 벌을 내릴 테니 기다려라.”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진무린은 은천심법을 좀 더 강하게 뿜어냈다.
“크흑.”
“내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방해하거나 끼어드는 자가 있다면 그에 합당한 벌이 있을 게다.”
만두를 쥐여 주면 웃으며 받아가던 진무린이었다.
이런 능력을 갖춘 줄 짐작이나 했을까.
노반은 마른침을 삼켰고, 점소이 양일은 아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너는 일어나.”
“예, 대협.”
내내 ‘손님’이라 부르던 호칭이 단박에 대협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답하며 일어나던 양일이 허벅지를 움켜쥔 뒤에 겨우 몸을 세웠다.
“표물에 손을 댔었나?”
“그게 아닙니다. 말에게 여물을 주러 갔는데 마차에서 파란 천이 나와 있기에 그것을 넣으려 했습니다.”
“노반.”
“예, 대협.”
노반이 참으로 공손한 태도로 다가왔다.
낯빛마저 하얗게 변해 고통스러워하는 승조표국 일행을 돌아본 그가 얼른 진무린의 앞에 섰다.
“노반은 그 장면을 보았소?”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양일이 이리 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셨소?”
“말씀드렸는데 쟁자수 한 분이 물건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셔서…….”
시선을 돌린 진무린은 은천심법의 기운을 풀었다.
막혔던 숨이 터진 듯 거친 숨을 몰아쉰 이들이 조심하는 표정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내가 들은 내용은 이렇다. 훔치는 장면을 보았다는 쟁자수는 누구냐?”
굳이 찾을 것도 없이 승조표국 일행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대협. 저는 점소이가 천을 손에 쥐었기에 말씀드렸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표물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최소 세 겹, 귀물은 다섯 겹으로 묶습니다.”
진무린에게 놀란 기색이 역력한데, 한편으로 쟁자수는 막힘이 없었다.
“파란 비단은 표물을 감싼 안쪽 물건입니다. 그것도 나무상자에 담아두어서 저절로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보니 쟁자수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표두나 표사 한 분이 가서 표물을 확인하고 오시오. 일단 물건이 무사한지 봅시다.”
“대협. 승조표국의 표두 반중도라 합니다. 조용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미 일어나 있는 부국주의 뒤에서 나이 든 표두 한 명이 진무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가슴에 ‘승조’란 글자를 달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았는데 무복의 상의가 황토색인 것이 일행들과 달랐다.
“대협의 말씀을 들었고, 다시 노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우리의 행사가 일방적인 것을 알았습니다.”
좋게 나오는 이에게 굳이 욕할 이유는 없었다.
“너는 가서 얼굴을 닦아.”
“예, 대협.”
서러움이 올라왔는지 눈을 소매로 문지른 양일이 물러났고, 노반이 챙기듯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이 아이는 국주의 아들로 조경만이라 합니다. 너는 대협께 경망하게 군 것을 사죄드리고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반중도의 말을 들은 조경만이 양손을 잡아 인사했다.
“승조표국의 부국주 조경만이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반감이 선명했고, 인사하는 태도 역시 공손하지 못했다.
진무린이 손을 맞잡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자 분위기가 단박에 어색하게 바뀌었다.
그 뒤로 표두 한 명, 표사 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불편한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협. 사정이 있어 표물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 점을 말씀드리고자 했습니다.”
“훗날 객잔에서 표물을 잃었다는 원망이 나오면 서로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절대 그럴 일 없으리라 약속드립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 이해해 주시면 승조표국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굳이 다툴 일도, 문제를 키울 이유도 없는 마무리였다.
적당하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진무린은 함께 저녁을 하자는 반중도의 권유를 사양하고는 방으로 움직였다.
방에 들어간 진무린은 닫혀 있는 창을 열어 나무로 받쳤다.
지켜보기 어려워 나섰으나 진무린이라는 이름이 입에 오르내릴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임무를 기다리라는 은천문은 보름이 되도록 연락이 없고, 조용히 지내고자 찾은 우양에서조차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일을 피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까.
진무린이 우양의 밤을 지켜볼 때였다.
“대협.”
양일의 음성이 문밖에서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양일은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워?”
“예?”
“왜 그리 어렵게 대하냐고?”
“그게…….”
뒤통수를 매만지는 양일의 모습에 진무린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협. 아까 혹시 내공을 펼치신 것입니까? 갑자기 표국 분들이 힘겨워한 모습 말입니다. 하늘도 막 날고 그러십니까? 대협께서는 정도맹에서 파견한 무인이신 게 맞지요?”
진무린의 웃음을 본 양일은 막혔던 입이 다시 열린 모양이었다.
“분명 훔치려던 것은 아니지?”
“제가 비단을 훔쳐 무엇에 쓰겠습니까? 우양은 좁아서 그런 물건을 팔려고 나서면 단박에 입에 오르내립니다.”
“아래쪽이 바쁘지 않냐?”
“아까 불편한 일이 있으니 표국 분들이 떠나실 때까지 대협만 모시라 했습니다.”
무릎을 꿇었던 양일이었다.
가슴에 남은 응어리가 분명 있을 터여서 진무린은 잠자코 양일의 수다를 받아주었다.
“처음에는 천이 나온 것도 몰랐습니다. 말에게 여물을 먹이려고 가는데 수레 쪽에서 묘한 냄새가 풍겨서 고개를 돌렸다가 알았습니다.”
진무린은 시선만 주었다.
“냄새가 복잡했습니다. 시원하기도 하고, 쓴 냄새도 있었고. 하여간 여러 가지 냄새가 뒤섞였는데 그것들이 줄 서 있다가 순서대로 맡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진무린은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백향초가 아닌가 하는 짐작만 했다.
표물이 백향초라면 표국의 일행들이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 또한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물건을 바로 확인하지 않더니.’
다섯 수레에 온통 가짜 백향초를 담아두고 진품은 수레 아래나 다른 곳에 지녔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온갖 약재를 실었을 수 있고.
공연히 저녁을 함께했다가 표물이 백향초인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불편할 일이라 진무린은 이리 방에 올라온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무릎을 꿇었지요.”
양일의 수다가 그칠 기미가 없어서 진무린은 만두를 뜯어 입에 넣었다.
**
홍화루의 원예는 며칠 기운이 없었다.
그 뒤로 기운을 차리기는 했는데 예전 같은 날카로운 모습은 쉬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에 승조표국이 당도할 텐데 준비는요?”
“문제없이 준비해두었습니다.”
“총관. 이제 표국을 바꿀 때가 된 듯싶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표물을 끝으로 다른 표국으로 교체할 예정입니다.”
총관 백섭광의 답을 들은 원예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노쌍복은요?”
“그날 이후로 눈에 띈 적은 없습니다.”
“방심하지 말고 계속 살펴주세요.”
원예의 답을 들은 백섭광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방을 나섰다.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고 했었지?”
“진무린 공자께서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바닥에 엎드린 설란이 원예의 질문에 얼른 답을 내놓았다.
설란이 고개를 들었을 때 원예는 창밖에 있는 소능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부족해.”
“마지막 벽을 넘어서시면 감히 루주님과 맞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 공자도 그러리라 생각해?”
답을 하지 못하는 설란을 본 원예는 다시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다음 날, 승조표국 일행은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대협. 양일입니다.”
아침으로 간단한 죽과 만두를 가져온 양일은 승조표국의 출발이 후련한 얼굴이었다.
“표두께서 인사드리지 못하고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제게 미안하다며 동전도 주셨습니다.”
진무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도 산에 가십니까?”
“그럴 참이다. 왜?”
“만두를 준비해드리려고 그렇습니다.”
쑥스러운 미소를 남기고 양일이 방을 나섰다.
수다가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진무린이 죽을 몇 수저 떴을 때였다.
창을 통해 들어온 은천심법의 기운이 진무린을 찾았다.
기다리던 참이었다.
사매와 사제 일로 궁금한 점도 많았다.
진무린은 천을 감은 검을 들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에 있는지 양일은 보이지 않았다.
객잔을 나선 진무린은 낯익은 거리를 빠져나가 지난 보름간 운기하던 산을 향해 움직였다.
평소 사람이 다니는 길도 아니고, 나무꾼을 보려면 점심나절은 돼야 하는 곳이다.
주변을 둘러본 진무린은 경공을 발휘해 곧장 운기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진무린이 기운을 뿜어내고 일각쯤 지난 뒤였다.
“진 대협.”
장 노대가 뒤편 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그를 보면서 이토록 무거운 표정과 눈빛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원남에 있던 모 소저가 실종되었습니다.”
사매 ‘모려원’이 실종되었다는 말에 진무린은 먼저 고개를 갸웃했고, 이어 차갑게 변한 눈으로 장 노대를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흉수는요?”
“암연이 모두 동원되다시피 찾고 있는데 흔적이나 단서가 될 만한 점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답이었다.
모려원은 섬전검법을 익혀 검에 고어를 새긴 고수였다.
순순히 따라가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사매가 실종된 장소가 원남 어디입니까?”
“진 대협이 찾아 나설 것을 염려하셨는지 본가에서 절대 나서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장 노대. 사매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더러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라 하십니까? 어디입니까, 사매가 실종된 곳이?”
진무린의 질문을 받은 장 노대는 먼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진 대협.”
아직 놀랄 소식이 더 있나?
진무린의 의아한 시선 앞에서 장 노대가 입을 열었다.
“감숙의 조하부에 마등이 출현했습니다.”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은 소식이어서 천하의 진무린도 멍하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와 마주친 공동의 제자 스물 중 열여섯이 죽었는데 도법 또한 분명히 마등의 것이었습니다.”
목을 자른 놈이 다시 살아나 공동파의 제자를 살해했다고?
이게 지금 꿈인가.
주변을 돌아본 진무린은 다시 장 노대에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