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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12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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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12화

은천검제

제12화

 

노인은 우람했고, 중년인은 평범한 체형이었다.

쓰러진 마등, 설중객, 모로 넘어진 피풍객을 돌아본 두 사람이 진무린의 검을 먼저 살핀 뒤에 고개를 들었다.

“아닌데?”

중년인이 혼잣말처럼 한 마디를 뱉어냈다.

무슨 뜻인지, 저 둘의 출신이 어디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한 마디였다.

“혹시 쓰러진 저자가 마등인가? 흑사련주 마등?”

“그렇소.”

“설중객과 피풍객, 그리고 마등을 홀로 상대했나?”

중년인의 연이은 질문에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자네와 같은 무위를 지닌 이가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더니 참으로 대단하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진무린은 지켜보기만 했다.

“오해하지 말게. 우리는 찾는 이가 있어서 왔을 뿐이네. 이른 시간에 근처에서 기운을 느껴 뒤지던 길에 요란한 충돌이 있어 달려온 것이고.”

“사문과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진무린이 건넨 질문에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사문은 어찌 되나?”

“내가 함부로 나서지 말라 했었지?”

“죄송합니다, 형님.”

질문을 던졌던 노인이 중년인에게 얼른 고개를 숙였다.

노복이라면 몰라도 노인이 중년인에게 형님이라 부르는 모습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가겠네. 자네는 계속 일 보게.”

말을 마친 중년인은 확인처럼 호북지부 안을 둘러보고는 훌쩍 몸을 띄웠다.

“뭐하냐!”

중년인의 외침은 멀찍이서 들렸다.

그런데도 바로 옆에서 건넨 것처럼 또렷했다.

“갑니다!”

담장을 향해 고함지른 노인이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연이 되면 또 보세.”

익살스럽게 말을 건넨 노인이 훌쩍 몸을 날렸다.

진무린은 강호에 저런 인물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데다, 출신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저 정도로 엉뚱한 인물 두 사람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노인을 보며 안도의 숨도 나왔다.

마등을 해결했으니 청강이 안전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여유였다.

마등과 설중객, 피풍객을 돌아본 진무린은 몸을 솟구쳐 지붕을 밟았고, 이어 소능산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정말 운기가 아쉬운 시간이었다.

 

**

 

고개를 숙인 백섭광의 보고였다.

“요란한 충돌음에 다들 놀란 눈치였으나 감히 흑사련의 호북지부를 들여다볼 용기는 없어 눈치만 살피고 있습니다.”

“총관이 직접 확인했나요?”

“그렇습니다, 루주. 마등은 목이 잘렸고, 설중객과 피풍객은 무수한 검상을 안은 채 죽었습니다.”

커다란 의자에 앉은 원예가 어쩐 일인지 자부심 넘치는 눈으로 소능산을 바라볼 때, 앞에 엎드린 설란과 은향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이었다.

“루주.”

아직 보고할 것이 남았던가?

백섭광이 나직하게 원예를 불렀다.

“대결이 끝난 직후에 반노쌍복이 진무린 공자가 있는 상태에서 호북지부를 방문했었습니다.”

퍼뜩 고개를 돌린 원예는 물론이고, 엎드린 두 명의 부루주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루주께서 잠시 보였던 내공의 기척마저 알아내는 자들입니다. 당분간은 좀 더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인 원예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께 음식을 가져가는 일도 어렵겠지요?”

“반노쌍복이 진무린 공자를 만났다면 당분간 그 주변에 다가가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원예는 분하고 억울한 기색이었다.

“마지막 고비가 이토록 힘겨울 줄은 몰랐어요.”

“쉬웠다면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주께 달린 많은 생명을 떠올리십시오.”

“알았어요.”

“반노쌍복이 물러간 것을 확인할 때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도 잠시 중단하고자 합니다.”

“총관이 알아서 하세요.”

원예의 답을 들은 백섭광이 상체를 숙여 보인 뒤에 몸을 돌렸다.

“설중객과 피풍객도 무서운데 마등마저 한 번에 상대하다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소녀 역시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언제 저리 훨훨 날 수 있을까.”

주고받은 대화의 끝에서 원예는 소능산을 바라보았고, 설란은 대꾸를 내놓지 않았다.

 

**

 

점심을 넘기면서부터였다.

호북의 상등은 보이지 않는 천으로 눌러놓은 것처럼 묵직한 침묵과 숨 막히는 긴장이 가득했다.

구대문파를 압박하던 흑사련이다.

그 모든 일의 중심이자 사파를 통일한 마등이 목이 잘린 채 호북지부에 널브러졌다.

그것도 설중객과 피풍객이 함께였다.

호북의 상등에 있는 정도 문파는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을 죽였고, 상인들과 객잔, 주루, 다점은 피바람이 불지는 않을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언제 날아들지 모를 매서운 매질을 기다리는 심정, 호북의 상등에서 숨죽인 이들의 속마음이 꼭 그랬다.

정도맹의 호북지부에서 무인들이 달려와 상황을 파악하는 모습에도 사람들은 긴장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다.

당장 목이 떨어지지 않을까를 염려하면서도 과연 누가 마등의 목을 가르고 설중객과 피풍객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어 입을 바삐 놀렸다.

정도맹이 구대문파와 함께 육성했다는 젊은 영웅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돌았고, 다음으로 화산의 숨은 고수가 더는 참지 못해 나섰다는 말이 떠돌았다.

간혹, 정도맹주 황종관이라는 소문도 돌곤 했는데 그리 힘을 얻지는 못했다.

이 모든 일과 소문이 떠돈 것이 고작 점심때였는데 그래서인지 소문과 억측은 눈덩이 불어나듯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

 

운기를 마친 진무린은 길게 숨을 내쉰 뒤에 옆에 누운 검을 내려다보았다.

길지 않은 강호 여정을 마치고 은천문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이제 사매, 사제에게 지금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며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고, 혹 청강 진인이 방문하면 그와 비룡방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반가움을 나누면 될 일이었다.

오래된 사당의 앞에 앉은 진무린은 검에서 고개를 들어 앞에 펼쳐진 상등을 눈에 담았다.

어제 백섭광이 가져왔던 바구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을 가져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치운 모양이었다.

밤사이 일이 없었고, 마등이 죽었으니 홍화루를 염려할 것은 없었다. 

다만, 뾰족뾰족 지기 싫어하는 원예의 얼굴을 마주하며 잘 있으라는 인사쯤은 전했으면 싶은데 그 또한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강호에 나서지 않을 텐데 굳이 눈빛과 얼굴을 담을 필요가 무어며, 바람결에 묻은 가을 냄새처럼 또렷하지 않은 마음을 남길 이유 따위 없었다.

 

**

 

섬서에서 산서의 경계를 따라 달리면 하북이 나온다.

피를 토하기 직전까지 경공을 펼친 청강은 점심 무렵에 정도맹이 있는 하북의 진경에 도착했다.

그나마 하남에 맞닿은 곳이라 다행이지만, 한 마리 새도 이렇게 날아오면 날개가 꺾일 거리였다. 실제로 청강은 초췌한 몰골이었고, 기혈이 엉켜 낯빛마저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화산의 검이라 불리는 청강이었다.

정도맹의 출입문을 지키는 무인이 그를 발견하고는 양손을 맞잡아 고개를 숙인 뒤에 급히 전갈을 넣었다.

사방 십 리에 걸쳐 자리한 정도맹은 동서남북으로 갈라 그 쓰임이 달랐는데 맹주와 부맹주, 장로들이 업무를 보는 용심거는 한가운데 있었다.

청강은 곧바로 용심거로 향해 먼저 맹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진인께서 어찌 통보도 없이 오셨습니까?”

“맹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여유를 주시오.”

“꼭 지금이어야 합니까?”

“맹주.”

다른 말 없이 나직하게 부르는 청강을 황종관은 거절하지 못했다.

“앉으십시오.”

그는 청강을 위해 시간을 내었고, 광장처럼 넓은 맹주의 집무실 한쪽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차도 나오기 전이었다.

“부맹주가 친필 서한으로 매화검수를 불렀는데 그 사실을 알고 계시오?”

고개를 갸웃하는 맹주를 보며 청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제 매화검수 열둘이 마등의 도에 당해 나무에 걸려있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고 곧장 달려온 길이오.”

정도맹을 책임진 맹주답게 황종관은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황종관의 무거운 표정은 사태의 심각함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노도는 정도맹과 맹주를 믿소. 그러나 참혹한 결과에 따른 책임만은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오.”

“원하는 바를 말씀하십시오.”

“왜 부맹주가 매화검수를 요청했는지, 어떤 이유로 그 사실을 맹주께 보고하지 않았는지, 이 요청을 아는 이들이 누구누구인지를 알았으면 하오.”

“흐음.”

볼을 매만진 황종관은 나직한 신음을 먼저 흘렸다.

“비룡방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진 대협이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을 모두 쓰러트렸다오.”

“오.”

몹시도 반가운 기색이었으나 감탄은 크지 않았다.

청강이 전한 아픈 내용 탓이었다.

“본주를 믿으신다면 이 일을 함구하고 거처에 계십시오. 조용하게 조사한 뒤에 진인을 찾겠습니다. 오늘 방문은 비룡방의 결과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 할 테니 그리 아십시오.”

“고맙소, 맹주.”

“화산에서 비보가 도착하기 전에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바요. 그럼 그리 알고 물러나겠소.”

힘겨운 얼굴의 청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가의 환약이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그 귀한 것을 어찌 이런 몸에 쓰겠소? 노도는 운기를 통해 기운을 차릴 것이니 맹주께서는 협을 위해 애쓴 이가 있다면 그를 도와주시구려.”

황종관의 성의를 거절한 청강이 양손을 잡아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

 

은천문을 향해 출발하려던 진무린은 소능산의 오래된 사당 앞에서 좀 더 시간을 보냈다.

이유는 장 노대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마등과의 대결과 결과를 빨리 알아차릴 그가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걸렸다.

본가의 지시를 기다릴 일도 아니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돌아가면 될 일이고, 그렇다면 당연하게 이쯤에서 장 노대가 나타나 이후의 일을 의논해야 했다.

진무린의 귀가를 확인하는 일 또한 장 노대가 해야 할 임무임을 떠올리면 남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진무린을 찾는 것보다 급한 일이 생겼거나, 모습을 드러내기 곤란한 누군가가 이곳을 감시하거나.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홍화루를 보았다.

아침을 보내는 것으로 안위를 알릴만큼 재치 있고, 흑사련 호북지부가 비었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정도로 빠른 원예 역시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가 오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예라면 백섭광을 시켜 석 잔의 술을 보낼 정도는 될 텐데, 마등이 죽은 후에 오히려 움직임이 아예 없었다.

‘두 사람이 문제라는 건데.’

진무린은 엉뚱한 말을 남기고 떠난 중년과 노인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장 노대가 몸을 감출 정도라.”

장 노대의 상황을 짐작한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홍화루와 원예의 침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오해하지 말게. 우리는 찾는 이가 있어서 왔을 뿐이네. 이른 시간에 근처에서 기운을 느껴 뒤지던 길에 요란한 충돌이 있어 달려온 것이고.

 

진무린은 중년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강호에 나서 사문을 말하지 않은 이도 처음이고, 한 걸음 나가 노인이 진무린의 사문을 물었을 때 중년은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어떻게 할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진무린은 그 끝에서 홍화루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

 

원예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움직임이 없었다.

서탁을 옆에 놓고 책을 읽었는데 이각이 넘도록 같은 면을 펼친 것으로 보아 짐작건대 집중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임이 없는 그녀를 대신해 뒤편 창에서 길게 들어온 볕은 그사이 두 걸음이나 왼편으로 움직였다.

아침도 점심도 걸렀다.

물은 물론이고, 오늘은 차도 한 모금 넘기지 않았다.

염려된 부루주 은향이 식사를 권했다가 차가운 눈빛에 물러난 뒤로 누구도 감히 같은 권유를 꺼내지 못했다.

“루주. 설란입니다.”

그렇게 움직임이 없던 원예가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렸고, 조용하게 걸어온 설란이 원예 앞에 몸을 엎드렸다.

“진무린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받지 못한 아침을 대신해 점심을 드실 요량이라 전해달라셨습니다.”

내내 동상처럼 있던 원예였다.

“가격이 한 냥인 것을 알면 다들 주문할 테니 계산은 남들 모르게 하고 싶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란의 보고를 들은 원예는 지금까지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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