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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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2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0화
은천검제
제10화
밤이 되면서 진무린은 상등이 내려다보이는 소능산의 오래된 사당에 자리했다.
상등은 아직 잠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등으로 치장한 건물들과 그 사이를 걷는 이들이 가득했는데 그중에도 압권은 홍화루였다.
수십 개의 홍등을 두른 홍화루는 그 어떤 건물보다 눈에 띄었고, 기와의 끝을 바싹 위로 들어 주변 건물을 아우르는 느낌이었다.
내일이면 마등이든, 설중객이든 오리라.
이왕이면 머리인 마등이 왔으면 싶지만, 세상일이 어디 사람의 마음처럼 흘러가겠나.
상등을 내려다보던 진무린은 사당으로 올라오는 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기다란 나무의 끝에 등을 걸어 길을 밝힌 다섯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은데?”
“루주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홍화루의 총관 백섭광이 돌아보자 두 명의 하인이 모두 네 개의 바구니를 진무린의 앞에 놓았다.
“술과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보내셨고, 아침은 간단하게 죽과 만두를 준비할 것이라 전하라십니다.”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힘에 굴하지 않는 부류, 죽음을 마주하고도 굽히지 않을 사람, 진무린이 보기에 백섭광은 그런 사람이었다.
원예의 지시가 있다면 백섭광은 진무린에게 달려든다.
부루주 설란 역시 주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고맙다고 전해줄 수 있나?”
“은자를 주시면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진무린은 참 오랜만에 소리 내며 웃었다.
“얼마를 지불하면 되지?”
“은자 한 냥이라 하셨습니다.”
지기 싫어하는 원예의 성격이 잘 드러난 가격이었다.
“내일 아침을 가져오면 적당하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백섭광은 그 길로 몸을 돌려 하인들과 함께 돌아갔다.
암연의 장 노대, 마등, 설중객을 기다리며 지루하던 참이었다.
진무린은 바구니에서 술병을 꺼내 홍화루를 향해 들어 보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
원예는 3층 그녀의 거처 창을 열어두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폭의 담묵화처럼 서 있는 소능산을 바라보는 그녀의 하얀 손에 곱디고운 잔이 들렸다.
서늘한 기운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원예는 바닥에 엎드린 설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돈을 지불할 거라 보느냐?”
“은자 한 냥을 말씀하셨으나 그 이상을 건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엎드린 설란의 답에 원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강호에 흔해 빠진 그저 그런 무인인 거지.”
“한 냥을 지불하면 어찌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멍청이?”
원예의 반문에 설란이 올라오는 웃음을 살포시 감추었다.
“그는 호북지부와 본루를 함께 지켜보는 거야. 나는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를 통해 그에게 상황을 전달하는 거고.”
설란의 고개가 갸웃할 때였다.
“내일 아침에 보내는 죽과 만두는 우리가 무탈하다는 의미이지. 그가 내 뜻을 알아차렸다면 우리를 지켜주는 대가와 내일 아침까지의 식사비용이 같다고 답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거칠었습니다.”
“그럴 머리가 없다?”
“루주를 대하는 모습으로 보았을 때, 그냥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한 냥 이상의 은자를 건넸으리라 짐작합니다.”
설란이 답을 했을 때였다.
“심부름을 마쳤습니다, 루주.”
문밖에서 백섭광의 음성이 들렸다.
“은자를 주던가?”
“내일 아침을 가져온다면 적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설란이 놀란 눈을 껌벅이는데 원예는 창밖에 있는 소능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설레는 것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미소 지은 원예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잔을 비운 뒤였다.
“백면호리는?”
“부루주 은향이 오늘 늦게나 내일 오전으로 보고를 올릴 것입니다.”
나직하게 건넨 질문에 설란이 바로 답을 내었다.
**
요란했던 밤과 달리 새로운 하루의 시작은 평범했다.
운기를 마친 진무린이 호북을 내려다보는 동안, 사위가 뿌옇게 밝아졌고, 곧바로 온갖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기다리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오고 있었다.
진무린이 고개를 돌린 곳에서 장 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젯밤 백섭광이 올라온 바로 그 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
장 노대는 먼저 진무린의 곁으로 움직여 앞에 펼쳐진 상등을 내려다보았다.
“화산의 매화검수 열둘이 마등에게 당했습니다.”
퍼뜩 시선을 돌린 앞에서 장 노대는 말을 계속 이었다.
“도로 목을 갈랐고, 가슴을 꿰어 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청강 진인은 현재 정도맹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그 외에 송구하게도 마등의 위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진인께서 정도맹으로 향한 이유는요?”
“정도맹에 마등, 혹은 암중세력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판단하신 듯싶습니다. 부맹주의 초대가 왜 있었는지, 매화검수가 출발한 것을 아는 이가 몇인지를 확인하시려는 의도라 보았습니다.”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장 암연만 해도 청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 정도고, 홍화루는 석 잔의 술을 마시기 전에 진무린이 지시한 일을 알아차리는 세상에서 너무 순진한 발상이요, 움직임이었다.
“설중객이 조만간 도착할 것입니다. 흑사련의 호북지부에서 벗어난 수하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마등이 아닌 것이 아쉬웠으나 설중객이 늦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궁금했던 점을 꺼내 들었다.
“노대. 마등이 암연의 눈에 걸리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제 탓이 큽니다.”
“노대를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암연을 피하려면 마등에게 무언가 비책이 있을 텐데 혹시 짐작 가는 바는 없는지 의견을 묻는 것입니다.”
어둑했던 사위가 확연하게 밝아졌다.
검은 기와가 촘촘히 늘어선 상등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진무린 앞에서 장 노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답을 하기 곤란하기도 하겠다.
“본문에도 혹시 의심해야 할 인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대협?”
“암연의 움직임을 마등에게 알려주거나, 혹은 들어온 정보를 왜곡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럴 리 없다는 투로 장 노대가 고개를 저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의 판단에 문제는 없었다.
강호에 은천문은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진무린처럼 크게 얽힌 적을 따지자면 고작 한 번을 꼽는다.
누가 있어 마등과 내통할까.
“노대. 진인을 살펴주십시오. 그분만은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진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 노대가 뒤로 물러났고, 그의 기척은 바로 사라졌다.
암연의 수장다운 수법이었다.
진무린은 아침을 맞은 상등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설중객이라.”
이제는 흑사련의 호북지부로 가서 그를 기다릴 참이었다.
아침에 보낸다는 죽과 만두가 생각났지만, 이미 계산이 끝난 음식이라 딱히 마음 쓸 이유는 없었다.
**
2층까지 깊게 잠든 홍화루의 3층에서 원예는 꼿꼿한 자세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면호리는 청부를 받지 않겠다 거절하였습니다.”
부루주 은향은 엎드린 상태에서 나직하게 보고를 올렸다.
미모는 빠지지 않으나 몸의 굴곡을 드러낸 은향은 원예나 설란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황궁에 들어가라면 누구라도 그러하겠지. 그래서 대책은?”
“늦게 얻은 그의 딸이 오른쪽 다리에 마비증상이 있어 백향초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백향초?”
원예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루주. 설란입니다.”
급한 음성이 밖에서 원예를 찾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열렸고, 설란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설란은 분명 입을 뻥긋거렸다.
그러나 방 안은 고요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에 무거운 표정의 원예가 몸을 일으켰다.
“루주!”
놀란 설란이 불렀는데 원예는 곧장 문을 향해 걸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두 번째 문이 열렸는데 원예는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총관 백섭광이 호위와 함께 서 있었다.
“루주께서 흑사련과 맞서겠다 하시면 이 목숨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백섭광은 평소와 다르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시려는 길은 막아서야겠습니다. 루주께 달린 수많은 생명을 외면하시렵니까?”
“일이 잘못되면 이곳의 절반은 죽을 수 있어요.”
“루주께서 나서시면 모두 죽을 수 있습니다.”
강렬한 원예의 눈빛을 백섭광은 피하지 않았다.
“고작 하루입니다. 두 번 보았습니다.”
“내가 남자에게 마음이 팔려 이러는 것처럼 보이세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입술을 삐죽이는 원예의 손이 투명하리만치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루주. 부디 내공을 거두십시오.”
“여기에는 반드시 내막이 있어요.”
“그것을 밝히는 것은 루주의 몫이 아닙니다. 홍화루는 정보를 거둘 뿐, 나서거나 개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러서지 않는 백섭광을 노려본 채 원예는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었다.
“오늘은 총관의 말을 듣지요. 그러나 분명 아쉬움은 남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루주.”
“사람을 보내 지켜보고 어떤 경우에도 보고를 늦추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지체 없이 시행하겠습니다.”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원예가 돌아섰다.
그녀가 의자를 향하는 동안 손은 본래 색을 되찾았는데 뿜어 나오는 냉기는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다.
**
진무린은 흑사련 호북지부에 도착했다.
조용했다.
그러나 진무린은 문 안쪽에서 설중객으로 짐작되는 기운을 느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피풍객?’
그와 비슷한 또 다른 기운도 감지했다.
강서에 있다던 자가 고작 이틀 만에 호북에 당도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내공을 뿜어냈다는 것일까.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진무린을 만류했으나 그렇다고 여기에서 발길을 돌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숨을 고른 진무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청석이 고르게 깔린 안쪽을 걸어간 진무린은 본청 건물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나오지?”
진무린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좌우 건물에서 갓을 쓴 두 명의 검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편은 회색이 바랜 가죽을 뒤집어썼으니 설중객 양도원일 테고, 검은 망토를 어깨에 감은 오른쪽의 검객은 피풍객 자고일이 분명했다.
좌우를 번갈아 본 진무린은 본청을 향해 눈가를 좁혔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야 기운을 느낄 정도로 고수라면?
“마등?”
진무린이 혼잣말처럼 불렀을 때, 본청의 문이 느긋하게 열렸다.
머리, 목, 어깨, 몸통, 허리, 다리, 심지어 손가락까지, 모든 것이 거대한 남자였다.
작두날만큼이나 거대한 도를 어깨에 걸머진 남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저렇게 무식하게 생긴 눈에는 야비함과 교활함을 담기 어렵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것을 이뤄낸 마등의 눈이 야비하게 번득였다.
사파를 통일한 인물이라더니 과연 그만한 재능을 타고났고, 거기에 노력을 더한 모양이었다.
“어차.”
어깨에 둘러멨던 도를 앞으로 내민 마등은 왼손으로 날을 받쳐 들었다.
“너의 목을 잘라 홍화루에 걸고, 다음으로 청강을 찾아 나무에 꿰어놓을 생각이다.”
픽 웃는 진무린을 향해 대꾸처럼 마등이 히죽 웃었다.
“비룡방을 빠트릴 수 없지. 관련된 자를 모두 죽여줄 테니 지옥에서 만나거든 함부로 나서서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려무나.”
저런 놈에게 어설픈 질문 해봐야 모양만 우습게 된다.
일단 죽어라.
어떻게 몸을 감췄는지는 천천히 알아봐 주마.
진무린은 망설임 없이 검을 꺼냈다.
그 직후였다.
스으응. 스응.
설중객과 피풍객이 검을 꺼내는 소리가 흑사련 호북지부 안을 맴돌았다.
“너의 행적을 몰라 기분이 별로였거든.”
진무린이 입을 열자 마등은 무슨 뜻인가 하는 의미로 눈가를 좁혔다.
“이렇게 나타나준 덕분에 조금이나마 풀렸으니 감사의 표시로 단숨에 목을 잘라주마.”
“크하하하하!”
마등의 통쾌한 웃음이었다.
입을 벌리고 커다랗게 터트린 그의 웃음 끝에서 엄청난 내공이 느닷없이 불쑥 뿜어져 나왔다.
마등은 왼손으로 도의 등을 툭 때렸다.
정말 가벼운 동작이었다.
쉐에에에에엑!
그러나 진무린을 향해 날아드는 도는 섬뜩할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