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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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8화
은천검제
제8화
온통 붉은색과 금색이었다.
조금만 과했으면 촌스럽고, 부족했다면 흉하련만, 홍화루는 그 경계를 정확하게 붙잡은 모습으로 진무린을 유혹했다.
그 안에서 주루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선해 보이는 여인이 아련한 눈빛과 애틋한 복색으로 진무린의 시야에서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손만 내미세요. 더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게 될 거예요.’
붉은색의 주렴과 금색 문양들, 그리고 스치듯 지나치는 여인들이 진무린에게 그리 속삭였다.
3층 전각이었다.
2층을 삥 두른 난간으로 간혹 여인들이 상체를 기울였다가 사라졌는데 내공을 지닌 여인도 분명 있었다.
진무린은 이십여 개가 넘는 탁자의 한가운데 앉아 말없이 기다렸다.
시비가 가져다준 차의 향이 옅어질 때였다.
총관이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의 여인과 함께 다가왔다.
틀어 올린 머리를 은잠과 옥잠으로 장식했고, 붉은 단삼에 비슷한 느낌의 외피를 걸쳤는데 몸매의 윤곽을 상상하게 할 정도로 하늘거리는 차림이었다.
넓은 1층을 가로질러 오는 두 사람을 진무린은 묵묵하게 보았다.
“홍화루의 부루주 설란이 인사드려요.”
양손을 펴 겹쳐 든 설란이 춤사위처럼 자세를 낮췄다가 부드럽게 몸을 세웠다.
“루주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소녀가 대신 나왔어요. 공자께서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반드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겁을 먹은 듯 눈을 껌벅이면서도 설란의 눈빛은 진무린에게 호감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원하시면 소녀의 거처로 옮기셔도 된답니다.”
설란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백섭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함부로 남자를 들이지 않는 네가 어쩐 일이냐는 투였다.
웃기지도 않는다.
이렇게 엉성한 수작으로 진무린을 대하는 것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진무린은 탁자에 쌓여 있는 찻잔을 하나 들어서 중앙에 거꾸로 놓았다. 그리고는 등에 멘 검을 꺼내 들었다.
설란이 움찔했고, 백섭광은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마등이 이렇게 해서 루주를 만났다고 들었다. 창의성은 부족하지만, 어쩌겠나. 나 역시 같은 방법을 쓸 수밖에.”
진무린은 검면을 왼손 검지와 중지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스으으응.
검날은 얇았다.
손가락으로 튕기면 가볍게 떨릴 정도였다.
왼손을 내린 진무린은 검면을 엎어놓은 찻잔에 가져갔다.
아무리 힘 좋은 이가 눌러도 검이 휘면 휘었지,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일었다.
파삭.
그런데 진무린이 검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잔이 잘게 부서졌다.
설란과 백섭광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검광이 번쩍였고, 진무린의 오른손은 이미 목 뒤에 있었다.
당연하게 검은 검집에 담겼다.
마등이 소수홍화 원예를 만나고자 할 때, 그가 지닌 도로 보석을 눌러서 깨트린 일을 흉내 낸 것인데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래?
진무린은 백섭광을 똑바로 보았다.
“공자. 어찌 힘없는 주루의 총관과 가련한 여인을 핍박하시나요?”
설란이 시선을 당기기 위해 애썼으나 진무린은 여전히 백섭광을 눈에서 놓지 않았다.
“잠시만 소녀의 처소로 가셔서 기다리시면 어떻겠어요?”
“열을 세겠다.”
이어진 설란의 말을 무시하고 진무린은 입을 열었다.
“마등을 돕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을 무너트릴 명분은 충분하다. 만약 마등이 화산의 청강 진인을 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맹세컨대 이곳에 있는 이는 모두 죽는다.”
백섭광은 어쩐 일인지 진무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일곱 남았다.”
“소녀는 숫자를 헤아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다섯 남았다.”
“공자?”
설란이 놀라 부른 뒤였다.
“열을 헤아리고 나면 어찌 됩니까?”
백섭광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건넸다.
“루주 원예, 부루주 설란, 은향, 그리고 총관인 백섭광이 죽게 되지. 이제 셋 남았다.”
이미 홍화루의 모든 것을 알고 왔다는 의미로 진무린은 나타나지도 않은 부루주 은향의 이름마저 꺼내 들었다.
백섭광의 눈이 꿈틀한 뒤에 그의 오른쪽 입술이 뒤틀렸다.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하나 남았는데 셀 필요 없겠지?”
달려들겠다고 결심한 상대를 앞에 두고 무슨 다른 생각을 할까. 게다가 지금까지와 달리 설란과 백섭광 두 사람의 몸에서 강한 기운마저 일어난 마당에.
사람 잘못 봤어.
픽 웃은 진무린이 내공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공자를 모시세요.”
부드러운 음성이 홍화루를 가득 메우며 진무린을 달랬고, 설란과 백섭광을 만류했다.
원예의 위상이 이 정도인가?
이번만큼은 솔직히 진무린도 약간은 놀랐다.
결전을 각오했던 두 사람이 곧바로 기운을 갈무리한 것은 물론이요, 표정마저 처음처럼 공손하게 바뀐 탓이었다.
“공자.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나긋나긋하게 바뀐 설란이 몸을 반쯤 틀었을 때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류계의 웃음을 절대 믿지 말라더니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인 모양이었다.
진무린은 설란을 따라 2층 난간을 올라갔다.
우습게도 난간을 지나는 방에서 이따금 불편한 살기가 풍겼다.
무공을 익혔다기보다는 살수처럼 전문적인 살인 기술을 익힌 자들이 뿜어내는 미약한 살기여서 어설픈 고수는 짐작조차 못 할 정도였다.
홍화루가 살인청부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러니 저들은 분명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키운 살수이리라.
앞서 걷던 설란이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걸음을 디딜 때면 그녀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마치 귀한 여인이 홍화루의 규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붉은색의 옷을 입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연약하고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조금 전에 달려들 것처럼 내공을 뿜어내던 바로 그 설란이 말이다.
한쪽으로 연결된 계단을 통해 3층에 올라선 설란은 곧장 맞은편의 문으로 움직였다.
“공자를 모셨습니다.”
설란이 알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공자는 안으로 드십시오.”
담 작은 사람은 기가 꺾일 정도로 숙연한 무언가가 방 앞을 맴돌았는데 진무린은 묵묵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시녀가 문을 닫았고, 이어 안쪽에 있던 문이 또다시 양쪽으로 열렸다.
“홍화루 원예가 공자를 뵙습니다.”
설란과 다른 느낌의 붉은색을 두른 원예가 눈처럼 하얀 손을 펼쳐 겹쳐 인사했다.
그녀의 뒤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창한 의자가 있어서 진무린이 픽 웃었을 때였다.
시녀 셋이 움직여 의자와 작은 탁자를 옮겼으며, 또 다른 시녀가 차를 놓아주었다.
어찌나 동작이 빠르고 정확한지 처음부터 이곳에 탁자와 의자, 찻잔이 있었던 듯한 착각마저 일어났다.
“앉으세요, 공자.”
진무린은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뒤에 원예가 고귀한 집안의 여인 같은 태도로 의자에 자리했다.
“혹시 흑사련의 호북지부를 홀로 방문하고,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을 상대했다는 그분이신가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금잠 하나로 누른 머리 아래로 숨이 막힐 정도로 곱고 선한 느낌의 눈과 코, 입술을 지닌 미인이었다.
고혹적인 눈빛을 한 원예가 답을 달라는 투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거친 분이시군요. 아니면 예의를 모르시거나.”
“주루를 운영하며 깨끗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흑사련을 돕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아.”
“교훈을 주기 위해 방문하셨나요?”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방문 목적을 묻는 거라면 마등의 현재 위치를 알기 위해서고.”
“본녀도 알지 못해요.”
숨도 쉬지 않고 나온 답이었다.
“말을 전해줄 수는 있나?”
“언제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전해드릴 수는 있지요.”
진무린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두려워 몸을 감췄다면 그건 이해하지.”
“풋.”
웃음을 터트린 원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도발하는 느낌인데 그에 말려들 진무린은 아니었다.
“자꾸 허술한 수하들 보내봐야 소용없다고 전해줘. 본문의 암연이 찾고 있으니 수일 내로 내가 갈 거라는 사실도 알려주고.”
“흑사련주를 상대로 그 정도로 자신하나요?”
“그건 나중에 직접 확인해.”
진무린의 답이 원예는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고운 눈이 찌푸려지는 것이 그렇게 보였다.
“이후로 홍화루가 또다시 흑사련에게 중요한 정보를 건넸다는 사실이 발견되면 아까 말했던 대로 루주와 부루주, 총관은 반드시 죽는다.”
“협박인가요?”
“경고라고 생각하면 서로 좋지.”
말을 마친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천문의 25년 소망을 이룰 기재라는 평가를 받는 분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이토록 거만한가요?”
몸을 돌리려는 진무린을 붙드는 듯한 원예의 질문이었다.
확실히 홍화루는 무섭다.
분명 흑사련 호북지부 추굉의 일 이후에 알아냈을 텐데 25년이란 숫자도 그렇고, 소망까지 언급할 정도라면 홍화루와 원예의 정보력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루주. 경고를 명심하는 게 좋아. 본문과 나에 대해 안다면 특히.”
“좋아요. 공자의 말씀에 따른다고 하죠. 그렇지만 오늘 밤이라도 흑사련주가 와서 도를 들이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켜주지 못하면서 하지 말라는 건 또 다른 독선이에요.”
“그런 말은 마등이 어디 있는지 알려준 뒤에 해야지. 그의 행방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면서 위협을 두려워하나?”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무언가 항변하려던 원예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내 목표가 흑사련과 마등이니 이쯤에서 간다. 그러나 마등이 나를 정말 화나게 하면 그때는 함께 손잡았던 모두가 죽게 될 거라는 것은 분명히 약속하지.”
“천신이라도 뵙는 것 같군요.”
진무린은 먼저 픽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내가 본문의 25년 소망을 이루어도 천신에 버금가기는 어렵지.”
알고 있네!
원예의 입가에 의미가 명백한 미소가 달렸다.
“대신 악귀가 되는 건 어떨지 몰라.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악귀가 된 내가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지 마.”
“그건 왜 그렇죠?”
“반드시 목을 자를 거니까.”
진심을 담은 진무린의 눈빛이 번득이자 이번만큼은 원예도 함부로 대꾸를 내지 못했다.
불편한 침묵을 배경으로 원예를 노려보던 진무린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시비가 문을 닫은 뒤에도 원예는 움직임이 없었다.
잠시 또 다른 침묵이 흐르고 나서였다.
문이 열렸고, 부루주 설란이 들어와 원예의 앞에 엎드렸다.
“지금 막 홍화루를 나섰습니다. 사람을 붙일까요?”
“그렇게 하면 나는 몰라도 부루주의 목은 반드시 떨어져.”
“저자가 그리 강한 자입니까?”
설란의 질문에도 원예는 답이 없었다.
답을 안 한 것만이 아니다.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느닷없는 루주의 혼잣말에 느닷없이 피어난 긴장이 방을 가득 메웠다.
“백면호리를 찾아.”
“예, 루주.”
“황궁에 은천문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들었거든. 그걸 가져오라고 요청하고 대가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명을 받았습니다.”
나가란 듯 원예가 새하얀 손을 밖으로 흔들었다.
**
홍화루를 나선 진무린은 곧바로 번화가를 빠져나왔다.
영특하다고 하나 마등은 사파의 인물이었다.
냉정하리만치 영악하게 행동하다가도 불끈 화가 치솟으면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인물이라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데 이 정도면 충분했다.
오늘 홍화루를 방문한 사실과 떠든 이야기는 반드시 마등의 귀에 들어간다. 그러면 그는 불을 뿜는 얼굴로 진무린을 찾아오느라 청강에게 관심을 두기 어려울 거다.
기루를 벗어난 진무린은 난전을 거쳤고, 이어 한적한 길에 들어섰다.
호북의 상등이었다.
비단과 술을 거래하는 지역답게 한적하다고 해도 객잔과 반점, 다점들이 즐비하게 자리했다.
흑사련의 무서움은 곳곳에 지부와 분타를 두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데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객잔과 다점 중 어느 곳이 흑사련의 지부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그 바람에 마시는 술, 물 한 모금마저 독이 들었을지 모른다는 위험을 경계해야 했다.
등에 멘 검 때문인지 마주 오는 이들이 몸을 움츠리며 길 한쪽으로 움직였다.
이래서 무인은 관도를 걷기 어렵다.
여기에 경공이라도 펼치면 수개월은 진무린의 이야기가 떠돌고 눈덩이 불어나듯 과장이 더해진다.
알면서도 진무린은 보란 듯이 거리를 걸었다.
청강 진인을 향할 틈이 있어?
기다리고 있잖으냐. 그러니 내게 와라, 마등.
진무린은 그렇게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암연이 그를 찾아낼 때까지만이다.
마등을 잡으면 돌아간다.
몇 해만 지나도 마등을 잡은 것은 사실 정도맹의 영웅이었다는 엉뚱한 이야기가 세상에 떠돌 거다.
진무린이 생각에 잠겨 걸을 때였다.
“어디서 왔는데 그리 당당해?”
기가 막힌 음성이 진무린을 불렀다.
객잔이 밖으로 내놓은 탁자에 앉은 세 사람이었다.
“우리가 누군 줄 알고도 그런단 말이냐!”
시선을 돌린 진무린을 향해 가장 중앙에 앉은 무인이 자신 넘치는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흑사련 호북지부는 모두 정리했는데?
세 놈은 왼쪽 가슴에 보란 듯이 ‘흑’ 자를 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