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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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7화
은천검제
제7화
진무린은 비룡방이 준비해준 물에 몸을 씻었고, 이어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 마세호와 여섯 명의 무인들이 마음을 다해 진무린과 청강의 수발을 들었는데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간절한지 꾸짖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에서 태어났다면 마세호와 다른 여섯 명 중 분명 고수 한 명쯤은 있겠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운 환경에서 스치듯 얻은 무공에 기대 팔려 다니는 무인이 되었으니 이제와 세상을 원망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검 위에 목숨을 걸고 사는 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일까.
당연히 무공이 강한 자요, 그중에도 협을 당당히 행하는 사람인데 마세호와 다른 여섯은 진무린이 우중객을 꾸짖고 저오능을 벌하는 모습에 깊이 감복했고, 그래서 자연 몸이 낮아졌다.
청강이 엄한 표정을 지어도 탁자 앞에 선 일곱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 대협은 대체 왜 그러나?”
“진인께서 저희에게 주신 은혜를 새삼 알았습니다. 또한, 진 대협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는데 두 분과 겸상하며 거만 떤다면 훗날 모든 이가 저희 일곱을 비웃을 것입니다.”
“허어!”
“진인.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릅니다. 그저 이렇게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모시게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저희 같은 무인에게는 평생의 영광이 됩니다.”
“편히 지내면 더 좋지.”
“고양이가 어찌 호랑이의 곁을 탐하겠습니까?”
“이거야 원.”
목을 자르겠다며 달려드는 것 말고는 당최 말릴 방법이 없는 터라, 청강은 애꿎은 혀를 끌끌 찼다.
상황이 이런데 이번엔 바깥을 정리한 등평과 철비완, 등소옥이 공손한 태도로 객청에 들어왔다.
“정리를 모두 끝냈습니다. 흑사련의 여덟은 진 대협의 말씀에 따라 담장 밖에 따로 두었습니다.”
“이리 와 앉으시오.”
“진인. 저희 역시 이곳이 편하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등평을 바라본 청강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풍습이 원래 이렇다.
진무린을 몰랐을 때라면 몰라도 어떤 수준인지를 깨달은 지금은 함부로 앞에 앉기 어렵다.
어찌할까.
청강이 진무린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비룡방을 나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켜보던 이들의 목이 불쑥 나올 정도로 예상 밖의 말이 있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흑사련 쪽에서 말이 나올 테니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의 이야기는 곧 퍼질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청강이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사련은 어떤 수를 쓰든 진인과 저를 쓰러트려야 체면이 서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서둘러 떠나는 것이 도움 됩니다. 다행히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세가와 정도문파들이 몰려들 터라 이후 비룡방에 큰 위기는 없을 겁니다.”
“흐음.”
뭐라 반박할 말이 없을 정도로 딱 떨어지는 진무린의 의견이었다.
등평과 철비완, 등소옥은 소중한 것을 빼앗긴 얼굴이고, 마세호를 비롯한 여섯은 맥이 풀린 표정으로 눈만 껌벅였다.
“진 대협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오?”
“마등이 저를 찾기 쉬운 곳에 있을까 합니다.”
참으로 의아한 답이었다.
그런데도 청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더 묻지 않았다.
괜히 장소를 떠들었다가 따라나서겠다면 골치 아플 일이고, 괜히 말이라도 새나가면 그리 무인들이 몰릴 수 있다는 점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출발은 언제 할 생각이시오?”
“바로 나설 생각입니다.”
“지금 말이오?”
“그렇습니다.”
예상 밖의 의견이 있더니 삽시간에 떠난다는 말이 오간다.
“진 대협! 두 분 덕분에 죽을 길에서 살아난 본 방에 한 끼 식사라도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놀란 등평이 급히 의견을 내었다.
“자칫 마등이 이리 향한다면 흑사련이 궤멸할 때까지 비룡방이 싸움터가 됩니다. 그리되면 어떤 경우에도 온전하기 어려울 터라 일각이라도 서둘러 떠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답을 한 진무린은 실제로 몸을 일으켰고, 청강은 당연한 일을 한다는 태도로 함께 일어섰다.
“무례하게 방문했으나 방주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비룡방이 베풀어준 것에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진무린이 양손을 잡고 인사하자 비룡방의 세 사람이 급히 상체를 깊게 숙였다.
“마 대협과 여섯 분께도 인사를 전합니다. 인연이 있다면 언제고 뵐 날이 있을 겁니다.”
“아니 그게…….”
급히 고개를 숙인 마세호가 상체를 세운 뒤였다.
“비룡방의 배려와 일곱 분의 의기를 담고 가겠소.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리라 믿소.”
청강이 양손을 맞잡자 마주 서 있던 모두가 상체를 숙였다.
퍼러럭! 퍼러러럭!
그 직후에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는데 급히 몸을 세운 이들의 앞에는 탁자와 의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허어.”
한바탕 꿈 같았다.
진무린이 추굉의 목을 내놓고, 이어 청강이 방문했으며, 오늘 우중객과 하왕하칠살을 물리친 모든 일이 말이다.
소나기처럼 방문했던 진무린은 곧바로 맑아진 날씨처럼 흔적이 없는데 당장 그의 방문을 증명할 것은 탁자에 놓인 찻잔이 전부였다.
**
잠시 후, 진무린과 청강은 비룡방에서 십 리 떨어진 산에 있었다.
중턱에 도착한 진무린은 청강이 느끼기에 충분한 날카로운 내공을 뿜어냈다.
“무슨 일이요?”
“암연을 부르는 신호입니다.”
“내공을 알아차리고 찾아온다니. 은천문의 방식은 참으로 대단하구려.”
감탄하는 청강을 향해 진무린은 앉기 적당한 나무그루터기를 가리켰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다음이었다.
“진인. 마등은 영악한 자라 들었습니다. 사파를 통일할 정도로 잔인한 자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나이 든 청강이 젊은 진무린의 말에 집중했다.
“그는 반드시 진인과 저를 찾을 것이며, 화산과 본문에 복수할 방법을 고민할 것입니다.”
“흐음.”
청강의 신음이 깊었다.
평화로운 시절이 길었던 탓인지 최근 화산의 검은 날카롭지 못했다.
최고수라 평가받는 청강이 섬서 3대 고수에 드는 수준이니 장문인과 제자들의 아쉬움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짧은 상념에서 벗어난 청강이 시선을 들었다가 잔잔하게 웃었다.
진무린의 눈에 담긴 염려가 고마워서였다.
할아비의 안위를 걱정하는 장성한 손자처럼 듬직한 눈빛인데, 혹여 청강의 자존심이 상할까를 염려해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배려도 담았다.
이럴 때면 대견하고 기특하고, 고맙다.
“진 대협.”
청강은 나직한 음성으로 진무린을 불렀다.
“빈도는 살 만큼 산 늙은이요. 덕분에 닦아놓은 도가 제법 쌓여서 세상을 떠나면 신선이 될게요.”
농을 섞었다.
가볍게 웃는 진무린을 향해 청강이 말을 이었다.
“노도가 혹 신선이 된다 하더라도 힘겨울 수많은 정도문파를 생각해 잡은 손을 놓지 마시고, 혹 여유가 된다면 화산을 돌아봐 주시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진 대협이 젊은 데다, 은천문은 알려진 것이 없으니 진면목을 보이기 전에는 반드시 거만한 자, 이름값을 앞세우는 불손한 자들과 마주하게 될게요. 그때를 염려한 탓이라오.”
어쩐지 최후를 직감한 사람처럼 청강은 간곡한 얼굴이었다.
“노도가 매달리지 않았다면 진 대협은 결코 은천문을 나서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더 고맙소.”
“돌아갈 때는 제가 진인께 매달릴 참입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로 청강이 설명을 기다렸다.
“쌓아놓으신 도를 조금이라도 나눠달라 조를 생각입니다.”
“하하하.”
청강의 이런 웃음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그럽시다, 진 대협! 마등을 해결하고 함께 은천문으로 돌아갑시다. 노도가 지닌 도를 뚝 떼서 나누어줄 테니 언제고 때가 되면 구름 위에서 유유자적 함께 지냅시다.”
도를 닦았음에도 헤어짐은 아쉬운지 자리에서 일어선 청강은 끝내 팔을 뻗어 진무린의 손을 잡았다.
“부디 무탈하고, 강호의 힘겨운 이들을 외면하지 마시오.”
손자를 두고 떠나는 할아비처럼 인자한 청강을 향해 진무린은 양손을 마주 잡고 깊게 읍을 올렸다.
은천문에서만 지내느라 몇 사람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청강은 분명 존경할 만한 무인이었다.
화산파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 외에 개인적인 치부 따위 관심 없는 이였다.
“그럼 먼저 나서리다.”
넉넉하게 미소 지은 청강이 발을 굴러 훌쩍 나무 위로 솟았다.
정오를 갓 넘긴 하루가 가을을 치장하느라 분주할 때 진무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강호의 정도맹과 정도문파는 나약했다.
암연이 가져다주는 정보를 듣노라면 훅 은천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추악한 면도 많았다.
그런 정도맹을 지탱하는 것은 욕심에 찬 정도맹의 원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정도문파가 아니라 어려운 이를 안타까이 여기는 청강 같은 이들 덕분이리라.
진무린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한쪽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 대협.”
“고작 칠주야 뿐인데 오랜만이라 하십니까?”
“늘 뵙던 분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장 노대의 대꾸를 웃음으로 받은 진무린은 청강이 앉았던 자리를 권했다.
“제가 비룡방을 나선 사실을 마등이 알 수 있도록 은밀하게 정보를 흘려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진 대협.”
“또한, 흑사련이나 마등이 화산을 노리는 일이 있다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그 점도 명심하겠습니다.”
진무린의 요구를 장 노대는 바로 받아들였다.
“우중객의 절친 두 사람, 피풍객과 설중객이 복수를 위해 나설 것입니다. 그들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비룡방으로 찾아가지 못하도록 조절해 주십시오. 그들의 소재는 알고 계십니까?”
“피풍객은 강서에 있고, 설중객은 귀주에 있는데 오늘 늦게나 내일 오전에 우중객의 일을 전해들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흑사련의 정보가 그리 빨리 전달됩니까?”
“그 부분이 의아한데 실제로 우리 암연과 같이 동경이나 불빛을 이용해 내용을 전하는 것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복수를 위해 온다면 상대해주면 그만이다.
진무린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였다.
“진 대협. 감숙에 있던 마등의 행방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장 노대의 말을 듣는 순간, 진무린의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마등이 온다고 해도 두려운 마음 따위 없다.
그런데도 지금의 보고는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다.
“흑사련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보조직이 더 있을까요?”
“그보다는 암중세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장 노대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청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인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마등을 상대하는 동안, 정도맹을 통해 배후세력이 있는지를 조사하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혹여라도 암중세력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강 중요한 이야기가 끝났다.
진무린을 살핀 장 노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로 향할 계획이십니까?”
“마등이 사라졌다고 하니 그의 시선을 당겨오기 위해 약간의 소란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갸웃했던 장 노대가 곧바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그려냈다.
“마침 호북이니 홍화루에 들르기에도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확신한 듯한 대꾸가 나왔다.
그의 표정을 보건대 진무린의 계획에 만족한 눈치여서 고민할 것은 없었다.
“그럼 저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뵙겠습니다, 진 대협.”
장 노대와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곧바로 나무 위로 솟구쳤다.
**
홍화루의 주인은 손이 눈처럼 하얗다 해서 ‘소수’를 붙였고, 붉은 옷을 즐겨 입는다 해서 ‘홍화’, 소수홍화라 불렀다.
거칠 것 없는 성격의 마등도 소수홍화 원예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첫째로 은천문에 암연이 있다면, 사파에는 홍화루가 있다 할 정도로 원예가 다루는 정보가 방대했고, 정확해서 그만큼 마등에게 중요했다.
다음으로 소수홍화 원예를 핍박해서는 기루를 운영하기 어려웠다.
강호에서 웃음을 파는 여인들이 원예에게 보이는 충성심이 어찌나 대단한지 마등조차 힘으로 굴복시키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특히 이름을 떨치는 여인 100명에 99명은 원예의 지시를 따르는 터라 주루를 소지하려면 오히려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정오를 지나 깨어나기 시작한 홍화루는 오후의 중간에서 단장을 마쳤고, 이어 늦은 하루를 시작했다.
주루였다.
관인, 상인, 전장의 주인, 무인, 학사, 그 외에도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 본성을 드러내는 곳이어서 들어서는 이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총관의 당연한 임무였다.
홍화루의 총관 백섭광은 홍화루를 찾은 오늘의 첫 손님을 보며 이상하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등에 검을 멘 이십 대 남자였다.
‘흉!’
그는 평소의 습관대로 오늘 하루를 짐작했는데 결과는 흉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주를 만나고 싶은데.”
불길한 짐작대로 이십 대 중반의 손님은 대뜸 원예를 찾았다.
“약속이 있으십니까?”
“만나기 쉽지 않다고 듣기는 했지. 원한다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루주는 총관인 저 역시 거처를 짐작하지 못합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연통을 넣어 답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건넨 백섭광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대흉!’
시선을 떨군 그의 가슴에 마등 이후 처음으로 ‘대흉’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