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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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화
은천검제
제5화
청강의 검을, 그리고 이름조차 생소한 은천문의 진무린의 무공을 구경할 기회였다.
그뿐이면 말을 않는다.
진무린과 청강이 승리하면 살고, 지면 어차피 비룡방에 있는 모두가 죽는다. 좋든 싫든 생사가 걸린 대결을 앞두고 어떻게 담장 안에서 기다릴 수 있겠나.
등평과 철비완, 등소옥, 일곱의 무인이 두 사람을 따라 정문으로 움직였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눈부신 햇살, 선선한 바람,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니라면 유람을 나서기에 더없이 좋을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비룡방 앞에서 선 이들은 걸어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습관이 돼버린 것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진무린은 당당했고, 청강은 꼿꼿했다.
저 자리에 대신 서라면 설 수 있을까.
사람이니 걸어서 저기까지야 가겠다만, 지켜보는 누구도 저리 당당하지는 못할 일이었다.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나 싶을 때였다.
저 앞에서 마침내 흙먼지가 길게 피어났다.
“마침 함께 오는가 보오.”
“번거롭지 않아서 좋습니다.”
“허허. 나는 진 대협의 그 여유가 더 좋소.”
진무린은 픽 웃으며 앞을 보았다.
이제는 윤곽마저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뒤에 있는 이들은 아직 못 보겠지만 말이다.
두두두두두두두.
마침내 바닥에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직후에 아지랑이의 건너편에 선 것처럼 햇살에 일그러진 말과 사람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햐! 햐!”
두두두두두두두.
말을 재촉하는 고함, 말발굽 소리가 확연하게 들렸고, 삽시간에 앞까지 다가왔다.
급하게 멈춘 말이 앞발을 치켜든 뒤에 투레질과 함께 제자리를 서성였다.
퍼러러럭! 퍼럭! 퍼러러럭!
가장 먼저 우중객 반서득이 몸을 날렸고, 하왕하칠살의 일곱이 말의 안장에 올라서는 동작으로 솟구쳐 비룡방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청강을 잠시 보았던 우중객 반서득이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호북의 지부를 습격해 추굉의 머리를 가져간 놈이냐?”
“우중객.”
“이 새카맣게 어린놈이……!”
“복건의 만안루를 손에 넣기 위해 이가장 일족을 살해했고.”
우중객의 입을 막는 것처럼 진무린은 나직하게 뜻밖의 내용을 꺼내 들었다.
“귀주의 사파를 통일한다는 명목으로 전장의 주인 다섯을 동시에 살해했으며.”
고개를 비튼 우중객 앞에서 진무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 외에 흑사련의 발전을 위한다며 네가 살해한 무고한 인원이 모두 백스물여섯 명, 이것이 지난 5년간 벌어진 일이다.”
우중객은 픽 웃었다.
“하왕하칠살. 너희의 죄는 추악해서 입에 올리기도 싫다. 특히 너 돼지!”
“저……!”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다섯째가 볼을 푸들대며 위로 밀려난 눈알을 번득였다.
“너는 아녀자에 관한 죄가 워낙 많아 음적에 준해 벌한다.”
“정신 나간 놈! 천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설치는구나! 그래 내가 받아야 할 벌이 무어냐!”
다섯째 저오능의 질문에 진무린은 등에 메고 있던 검을 천천히 꺼냈다.
“참수.”
“뭐?”
“오늘 네놈의 목을 자르겠다.”
“이런 미친놈이!”
하왕하칠살의 다섯째 저오능은 덩치가 커다랗고, 볼이 늘어질 정도로 살이 오른 데다, 아홉 개의 이를 가진 정파를 들었다.
자세를 숙이며 뛰어들려는 그를 우중객 반서득이 왼손을 들어 막았다.
“그래. 그 잘난 너의 사문이 어찌 되느냐?”
“은천문.”
“은천문?”
우중객이 재빨리 청강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혹시 가짜를 댄 것은 아닌가 확인하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들어도 별 소용없다.”
“그건 또 왜 그러냐?”
“오늘 죽을 테니까.”
“흐하하하하!”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던 우중객이 단숨에 검을 꺼내 들었다.
스으응.
그와 동시에 그의 웃음도 뚝 잘려서 뒤로 물러난 말들의 발굽 소리만 외롭게 떠돌았다.
“네놈의 목을 반드시 잘라주마!”
우중객이 외친 뒤였다.
스응.
지켜보던 청강이 조용하게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하왕하칠살은 노도가 상대하겠네.”
“흥! 화산이라고 겁먹을 줄 안다면 오산이오.”
하왕하칠살의 첫째 묘일이 대꾸하며 비룡방 앞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맴돌았다.
진무린과 우중객 반서득, 청강과 하왕하칠살의 대결이었다.
하왕의 일곱 제자라 하여 하왕하칠살이라 부른다.
첫째 묘일은 찌그러진 관을 머리에 썼으니 밀려난 관원의 형상이요, 이어 학사, 의원, 승려, 저오능, 창기, 그리고 사냥꾼의 차림을 한 일곱이 각기 다른 무기를 내세우는데 흉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숨 막히는 긴장의 끝에서였다.
푸드득.
누군가의 말이 투레질하는 순간, 우중객이 번쩍 진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캉! 카가강!
휘두르는 것은 보지도 못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것처럼 터졌고,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검광이 두 사람 주변에 어지럽게 피어났다.
“구경만 할 셈인가?”
“그러잖아도 그 늙은 목을 떼어줄 셈이었다!”
청강의 도발을 묘일이 독하게 받았다.
쉬이익!
묘일의 무기는 거대한 낚싯바늘 형상의 갈고리였다.
심지어 끝에 미늘을 달아서 한 번 박히면 살을 찢지 않고는 빼낼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구조였다.
청강은 몸을 뒤틀어 갈고리를 피하고는 득달같이 검을 찔러 넣었다.
“이크!”
묘일이 뒤로 한 바퀴를 돌아 빠져나갔는데 그와 동시에 의원과 사냥꾼이 달려들었고, 창기가 휘두른 채찍이 청강의 발목을 노렸다.
쉐엑! 카강! 쉑쉑! 캉캉캉캉캉!
서툰 악사가 요란하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처럼 진무린과 우중객의 검이 거칠게 부딪쳤고,
“하! 하!”
하왕하칠살은 연신 기합을 지르며 청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우중객, 우중객, 말로만 들었고, 하왕하칠살은 소문으로나 알았다.
그런데 빛살처럼 검을 휘두르는 우중객과 흉측한 무기들을 내지르는 일곱은 듣던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그 둘을 상대로 진무린과 청강은 참으로 대단했다.
청강은 연륜만큼 부드럽고 빨랐으며 날카로웠다.
머리를 잡아채려는 갈고리, 허리를 파고드는 반월검, 다리를 감으려는 채찍의 틈에서 한 자루 검을 휘두르는데 일곱 개의 무기들을 맞아 단 한 번도 빈틈을 내주지 않았다.
화산의 검은 빠르기로 유명한데 실제로도 청강의 검은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검광을 사방에 피워내고 있었다.
진무린은 아예 소름 끼칠 정도였다.
우중객을 상대로 속도에서 뒤지지 않았고, 힘으로 밀어붙일 때면 내공조차 밀리는 기색이 없으니 그야말로 신룡의 등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눈에 담으면 실력이 일취월장하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룡방 앞에 서 있는 이들 중 진무린의 동작을 기억할 수준의 인물은 없었다.
앗 하는 사이에 우중객의 허리를 노렸는데 눈을 깜박하면 이미 그의 검은 목을 찌르고, 동작을 기억할 틈도 없이 우중객의 검을 막아섰다.
무공을 익힐 때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 잠자리에 들며 강호를 종횡하는 영웅의 풍모를 그릴 때 떠올렸던 바로 그 모습이 지금의 진무린이라.
한 자루 검으로 베고, 찌르고, 후리고, 긁는데 마치 검을 처음 만든 이처럼 능숙해서 청강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위용을 뿜어냈다.
저래서 청강이 그리 존중하고, 흐뭇한 미소를 그려냈던가.
카아앙!
지금만 해도 그렇다.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우중객의 검을 막으니 순간 휜 진무린의 검 끝이 상대의 눈을 파고들지 않나.
카가가가가강.
이어 콩 볶듯 요란한 소리가 울려 나왔고, 진무린의 머리와 허리, 허벅지 주변에서 무수한 검광이 피어났다.
저리 바삐 검을 나누기도 벅찰 텐데 진무린은 아까와 같이 검면을 이용하는 여유를 보인다.
우중객을 밀고 들어가는 모습은 성난 파도와 같고, 잠시 밀려날 때면 썰물처럼 잔잔하다.
일행이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바삐 움직일 때였다.
“하! 하! 하!”
일곱을 상대하는 청강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팽이처럼 돌았다.
쉐에에에에엑!
그 순간이었다.
허공에 번득이는 검광이 꽃을 피웠다.
“오오!”
생사가 걸린 대결임을 잊은 채 등평과 철비완이 감탄을 터트렸다.
화산을 상징하는 매화 송이였다.
그것들이 하왕하칠살의 일곱을 향해 날아가는데 목숨을 노린 검광이련만 당장은 아름다워 보이니 이 또한 사람이 환장할 일이었다.
사냥꾼이 급히 몸을 뒤틀었으나 가슴이 잘게 갈라져 피가 번져 나왔고, 창기의 채찍이 한 자 이상 잘려나갔으며, 묘일의 갓은 싹둑 윗부분이 날아갔다.
“이익!”
분통을 터트린 묘일이 이를 악물었다.
쉬이익!
그가 갈고리를 뿌리듯이 휘두르자 승려가 중봉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하! 하!”
일곱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합을 맞춘다.
때론 빨라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늦어지기도 하는데 개개인의 무공에 맞추느라 그런 것처럼 보였다.
살벌한 대결은 이제 중반에 접어들었다.
매화 송이로 일곱을 잡지 못한 청강, 일곱이 달려들어 겨우 청강을 막아내는 하왕하칠살, 결론은 진무린과 우중객의 대결에서 누가 살아남아 도움을 주느냐가 오늘 싸움의 승패를 가를 기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비룡방 앞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진무린에게 쏠렸다.
어찌 되려나.
제발 이겼으면.
그래서 청강을 도와주었으면.
간절한 바람도 담았다.
그 직후였다.
“세상에…….”
쉐에에엑! 쉑! 쉐엑!
내내 지켜보던 진무린의 검이 바뀌었다.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진무린이 새로운 검법을 펼치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겠다. 앞서 보이던 것과 전혀 다르게 검이 움직이고 있으니 비룡방의 서기라도 알아보고 남을 변화였다.
카앙! 카가강! 카아앙!
내내 동수를 이루던 우중객이 급하게 밀리기 시작했고,
쉐엑! 쉐에엑!
마침내 진무린이 낸 두 번의 검에 왼편 어깨와 팔뚝이 갈라져 피를 뿜어냈다.
퍼러러럭!
기회를 되찾으려는 것처럼 우중객이 몸을 허공에 날려 검을 뿌리면서 두 사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돌아선 진무린의 얼굴은 매서웠다.
죽인다! 너 따위 내가 반드시 죽여준다!
상상이나 했었나.
사람이 얼굴과 눈에 저런 의지를 그대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지켜보던 등소옥은 아비 등평을 흉내 내듯 주먹을 꼭 쥐었다. 각오를 세운 무인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감동을 줄 줄은 몰랐다.
“우와아-악!”
다시 밀린 우중객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처럼 고함을 버럭 질렀다.
쉐에엑! 쉑! 쉐에에엑!
그리고 그 고함 따위 상관없다는 것처럼 독한 눈빛의 진무린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