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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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3화
은천검제
제3화
청강은 마치 장성한 손주를 마주한 할아비처럼 흐뭇한 미소를 담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걸음 하셨습니까?”
“상등의 흑사련 호북지부를 무너트렸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 진 대협이 그리워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렇다고 먼 길을 오셨습니까?”
“허허. 진 대협을 보는 길이 천 리인들 멀겠소?”
천하가 알아주는 청강이 이리 대할 인물이었다는 말인가.
둘러선 이들이 눈을 껌벅일 때였다.
“진인. 비룡방의 방주이신 등평입니다.”
진무린이 등평을 소개했다.
“팔수부라는 별호를 지닌 분이 아니오?”
“진인께서 미천한 제 별호를 다 아십니까?”
“급작스럽게 방문하는 사람이 주인의 별호조차 몰라서야 도리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이분이 철비완 호법이겠구려.”
“비룡방의 호법 철비완이 화산검 청강 진인을 뵙습니다.”
“과한 예는 나를 욕보이는 일이외다.”
철비완의 인사에 청강은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답했다.
“이분이 등소옥 소가주입니다.”
“등소옥이 화산검을 뵙습니다.”
“흑사련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은 분이구려.”
청강에게 인사하는 영광에 등소옥이 흥분을 감추지 못할 때였다.
진무린은 마세호를 비롯한 일곱의 무사를 또 일일이 청강에게 소개했다.
강호의 삶이란 소속과 무공의 고하가 그 사람의 값어치와 서열을 정하는 법이라, 화산의 일인자를 대하는 마세호와 하급 무사들은 마치 천신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마세호가 화산검을 뵙습니다.”
급하게 숙이는 마세호의 팔을 청강이 넌지시 받쳤다.
청강의 내공은 무섭다.
고작 팔을 받친 것만으로 마세호는 몸을 세우고 말았다.
“과한 예는 나를 욕보이는 것이라 하였소. 더구나 진 대협 앞에서 이리하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들 멍할 때였다.
“저녁을 들던 참이었습니다. 방주께서 괜찮다 하시면 자리를 함께하셨으면 합니다.”
“진 대협. 무슨 말씀을. 진인께서 이 자리에 함께하신다면 더할 수 없는 영광이올시다.”
진무린의 제안을 등평이 급히 받아들였다.
그는 내내 소협이라 부르던 호칭을 단박에 대협으로 바꾼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총관이 달리고 철비완이 바삐 움직여 의자가 하나 더 놓였다.
“음식을 다시 내오라 하겠습니다.”
“산에서만 살아서 기름진 음식에 익숙하지 않으니 이 정도도 과분하오. 게다가 저녁을 해결한 터라 방주는 이 몸을 편케 해주시오.”
청강이 저리 나오는데 등평이 고집을 피울 수 있겠나.
그저 눈치만 살피는데 청강은 또 걸음을 옮겨 진무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바람에 줄줄이 한 칸씩 옆으로 움직였으나 불만스러운 기색을 띠는 자는 없었다.
“왜 그러고 계시오?”
“감히 제가 어찌 진인과 함께 앉을까 해서 그렇습니다.”
“허허. 주인이 앉지 않는 자리에 객이 앉는 법은 없다오. 정 그러면 나는 진 대협과 잠시 밖으로 나갔다 오리다.”
청강의 말에 놀란 등평이 얼른 뜻을 받았다.
그러나 덥석 앉기는 어려워서 청강이 먼저 앉았고, 이어 진무린과 비룡방의 세 사람, 이어 마세호와 여섯이 순서대로 자리했다.
다들 바라보는 앞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처럼 청강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진무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진 대협이 호북지부를 해결해 준 덕분에 구대문파가 숨을 돌리지 않았겠소? 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는 맹주의 당부가 있었소.”
“진인께서 번거로우셨습니다.”
“내가 진 대협을 번거롭게 한 것만 할까.”
호북지부를 홀로 해결했다는 것이 사실이었구나!
진무린과 청강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지켜보던 이들은 눈도 제대로 껌벅이지 못했다.
내내 웃음을 달았던 청강의 눈에 근심이 달렸다.
“흑사련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게 걱정이오.”
“그렇지 않아도 내일 하왕하칠살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있어 그 점을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흠.”
청강은 짐작한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할 생각이오?”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나서겠다는 것을 만류하던 참이었습니다.”
“과연 비룡방의 기개가 대단하구려. 또한, 일곱 분의 의기 역시 칭송 들을 만하니 나중에 본산에 돌아가면 제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전해야겠소.”
주변을 둘러본 청강이 다시 진무린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이 늙은이가 도움을 드려도 되리까?”
“닭 잡는데 굳이 진인의 검을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왕하칠살은 제가 상대할 테니 혹 그 외에 나타나는 자가 있다면 그때 도움을 주십시오.”
하왕하칠살이 들었다면 치를 떨며 달려들 말이나 당장은 자리에 없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지켜보던 이들은 멍하고 당황한 얼굴로 청강과 진무린을 살폈다.
특히 눈알을 부라렸던 마세호와 여섯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오, 진 대협. 고작 추굉이나 하왕하칠살을 상대하게 했으니 이 늙은이가 진 대협을 뵐 낯이 없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저 죄 없는 이들이 신음하고 죽어가는 것을 보자 나선 것이라 이해해 주시오.”
“제가 지닌 작은 재주를 잊지 않으셨으니 그 점이 감사합니다.”
신기한 일이었다.
꿈에서조차 한 번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던 청강 같은 고수가 한 탁자에 앉아 말하고 고개를 돌린다는 사실이 말이다.
“진인께 청이 있습니다.”
“진 대협이 이 늙은이에게? 뭐요? 화산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하리다.”
“여기 있는 마 대협을 비롯해 여섯 분이 아쉬운 점을 보아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진인께서 조언을 주신다면 앞으로 흑사련을 상대하는 데 크게 도움 될 것입니다.”
청강이 고개를 돌리는 순서에 따라 일곱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네놈들이 감히 그 어쭙잖은 실력으로 진 대협에게 청을 했더란 말이냐?’
당장 꾸중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일곱이었다.
청만 했나? 눈알도 부라렸다.
“허허허. 늙은이의 눈이 도움 될지는 모르겠으나 진 대협의 청이 있으니 어찌 그를 마다할까.”
떨군 마세호의 고개가 움찔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기연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기회를 얻지 못한 비룡방 세 사람의 얼굴에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 나올 때였다.
“괜찮다면 마 대협은 검을 보여주게.”
세상에나.
청강이 마세호의 무공을 보아주겠다는 언질을 내었다.
마른침을 급히 삼킨 마세호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인께는 참으로 조악한 솜씨이나 삼생의 영광으로 알고 부족한 검을 내겠습니다.”
양손을 마주 잡아 인사한 마세호는 몸을 살짝 돌려 진무린을 향해 섰다.
“진 대협. 경망한 언행을 용서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이 마세호는 죽어서도 은혜를 되새길 것입니다.”
“좋은 기회입니다. 부디 얻는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언가 일이 있었음을 청강은 짐작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따지느라 진무린의 배려를 망칠 정도로 속 좁은 이는 아니어서 청강은 묵묵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등불이 객청을 환하게 밝혔다.
그런데도 철비완은 눈짓, 손짓으로 수하들을 부려 횃불을 가져오게 하니 객청의 마당이 삽시간에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우연한 기회에 상수검법을 익혔는데 자질이 부족하여 늘 목마르던 참입니다. 부끄러운 솜씨나마 기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펼치겠습니다.”
사연을 늘어놓은 마세호가 호흡을 두 번이나 고른 뒤에 검을 꺼냈다.
검자루에 감은 가죽이 닳고 닳았으니 나름으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증거일 테고, 허술한 가운데 엄중한 기운을 보이니 이는 검을 대하는 그의 자세이리라.
청강이 고개를 끄덕인 직후에 마세호가 상수검법을 펼쳤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고, 검광이 이리저리 번쩍였다.
몸을 의탁한 일곱 중에는 그래도 가장 고수라는 마세호였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를수록 스치듯 보이던 엄중한 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검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의 검을 보며 짐작건대 저 실력으로 나서면 다섯 수 안에 하왕하칠살 앞에 피를 뿌린 채 죽을 것이 분명한 수준이었다.
쉐에엑!
검을 세차게 뿌린 마세호가 긴장한 표정으로 청강과 진무린을 교대로 보았다.
“좋았네. 마 대협.”
청강의 첫 마디는 칭찬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 한 가지를 꼽으라면 검의 움직임에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니 보법에 신경 쓰는 것이 좋을 듯하이.”
“감사합니다, 진인.”
마세호가 양손을 잡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청강의 조언에서 크게 얻은 것은 없어 보였다.
하긴, 비룡방 등평과 철비완조차 이해 못 한 조언을 어찌 마세호가 알아 들겠나.
서글프다. 실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할 기연을 얻었는데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비애가 마세호의 눈에 가득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이리 끝내면 이 몸이 진 대협의 청을 들어드린 것이 아니지.”
청강이 몸을 일으켰다.
등평과 철비완, 남은 이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눈으로 바라본 직후였다.
조용하게 움직인 청강이 마세호의 앞으로 나섰다.
“마 대협은 검을 내게.”
의아한 기색이 가득한 마세호의 눈 끝이 경련처럼 떨렸다.
이렇게 비무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밤이 길지 않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네.”
“감사합니다, 진인!”
급히 손을 마주잡은 마세호가 검을 내었다.
“다른 분들도 보아두면 좋은 공부가 될 것이오.”
말을 전한 청강은 검을 달라는 사람처럼 오른손의 손바닥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쉐에엑.
필사의 의지를 담은 마세호의 검이 청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선으로 날아드는 검을 청강은 상체를 비트는 간단한 동작으로 피했다.
“발을 보라!”
그런 뒤에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엄한 청강의 한 마디가 객청의 마당에 울렸다.
턱. 터덕.
어느새 뻗은 청강의 왼발이 마세호의 오른발 정강이를 밀치고, 왼손으로 검을 잡은 손목을 누르고 있었다.
쉐엑! 쉑!
급하게 올려친 검을 피해 상체를 젖혔는데도 청강의 발은 계속 마세호의 정강이에 붙어 있었다.
지켜보는 비룡방 일행은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는데 그때부터 무려 이십 수의 검이 나오도록 청강의 왼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비무가 끝났다.
“검법을 그려내기 바빠 손이 먼저 움직이니 몸이 늘 반걸음 더디지. 내가 발을 내기 전에 자네의 보법이 자리를 차지했어야 하네. 그랬다면 검이 이리 쉽게 잡히지도 않았을 걸세.”
마세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버릇이 들어 쉬 고쳐지지는 않겠으나 그것을 이기면 자네는 분명 얻는 것이 있을 걸세.”
“진인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떨리는 음성을 통해 이번만큼은 마세호가 얻은 것이 있음을 지켜보던 모두가 알았다.
“감사는 진 대협에게 하게.”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청강이 자리로 돌아오며 서 있던 이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진인.”
“다행히 아는 바가 있어 조언했을 뿐이거늘 진 대협은 또 이 늙은이를 놀리려는 게요?”
웃는 진무린을 향해 청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 조언 하나를 건넸을 뿐인데 소문은 크게 나겠지요. 진 대협은 그 공을 이 늙은이의 이름에 얹어줄 생각이었을 테고, 나아가 화산에 덕이 있음을 알리는 배려이니 어찌 노도를 놀리는 것이 아니겠소.”
가볍게 웃은 청강이 고개를 돌려 마세호를 보았다.
“마 대협은 오늘 일을 가벼이 입에 올리지 말고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용맹정진하게.”
“제가 숨을 쉬는 한, 화산과 진인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청강은 목타게 기다리는 남은 여섯을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내일 천천히 봐줄 테니 그리 알게.”
“감사합니다, 진인.”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반 시진을 함께 더 보낸 뒤에 자리를 파하여서 마침내 진무린과 청강이 오붓하게 둘이 차를 놓고 마주 앉았다.
“흑사련을 이리 부를 생각이신 게요?”
“마등은 모르겠지만, 다른 흑사련의 고수들은 달려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공을 보아달라 하셨소?”
“이곳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흑사련의 추적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때 위기를 넘길 한 수만큼은 지니게 하고 싶었습니다.”
흐뭇한 얼굴로 청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가짐이 그리 깊으니 진 대협은 노도를 따라 도사가 될 걸 그랬소.”
농이 섞였다.
진무린이 웃음을 터트렸고, 청강이 비슷한 느낌으로 만면에 미소를 그렸다.
웃음이 지나간 뒤였다.
“흑사련의 배후가 있는 것이 분명하오. 마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렇게 한순간에 사파를 성장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보고 있소.”
청강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 대협이 흑사련을 상대해주는 동안 정도맹과 구대문파는 그 배후를 찾아볼 생각이오.”
“진인께서 무리하실까 그것이 걱정됩니다.”
“허허. 내 걱정을 해주니 듣기 나쁘지 않구려.”
청강의 넉넉한 음성이 나왔을 때 진무린이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청강의 질문을 받은 진무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우중객이 이리 오고 있다는 언질입니다.”
“암연의 보고요?”
“그렇습니다.”
“흠.”
우중객의 별호를 들은 청강의 낯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만큼 그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은천문의 정보조직 암연의 보고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더 그랬다.
청강은 답을 구하는 사람처럼 진무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파를 통일한 흑사련에 마등이 있다면, 정도문파에는 참으로 다행스럽게 진무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