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35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35화
은천검제
제35화
진무린의 시선을 따라 몰려든 이들이 약연을 보았다.
“약연 장로. 누군가 이놈을 구하라며 외부에 연락을 했더군. 그곳이 어딘지 들었는데 그와 관련해서 할 말이 없나?”
“무, 무슨 뜻이냐?”
“맹주, 진인, 부맹주, 당신, 나, 이렇게 이놈의 종적을 아는 다섯 중 이놈이 귀식대법으로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구하라고 연락한 사람이 있었어. 그게 누구일 것 같아?”
“감히 나를 의심한다는 말이냐?”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풍령관은 알지?”
“뭐라?”
약연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능산에서 한 번 호되게 당한 경험 탓인지 감히 대들 생각은 못 하는 눈치였다.
“더한 것도 불었거든, 이놈이. 이제부터 남은 이야기를 들어볼 참인데 굉장히 기대돼.”
입을 씰룩이는 약연을 두고 진무린은 고개를 돌렸다.
“비룡방의 소가주.”
“예, 진 대협.”
등소옥이 얼른 앞으로 나서 양손을 잡았다.
“비룡방에 이 자의 경계를 맡길까 합니다. 도와주시겠소?”
“본방의 이름과 소녀의 목숨을 걸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겠다는 진무린의 의지가 지켜보는 모두에게 확연하게 전달되는 장면이었다.
진무린은 걸음을 옮겼다.
지이이이익.
앞에 구경하던 이들이 물결처럼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고, 진무린의 지시를 기억하는 황종관과 청강이 말없이 뒤를 따랐다.
**
동굴에 숨었다고 해도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침입자들이 물러갔는지 작은 추를 매단 실 역시 움직임이 없어서 여유도 되찾았다.
남은 것은 저들이 물러갔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동굴에 모인 촌민들은 오랜만에 보는 어린아이 요정에 푹 빠져서 마치 공연장에 몰린 관객처럼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고, 그걸 지켜보는 백면호리는 연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저리들 좋을까?”
“정이가 스스럼없이 대해주니 더 그런 모양이오. 어찌 저리 예쁜 딸이…….”
“뭐? 그 말뜻은 뭐야?”
“그렇다는 게요.”
까르르, 하는 요정의 웃음이 있으면 이어 요란한 촌민들의 웃음이 동굴을 메워서 지난밤의 긴장은 멀리 있었다.
“정아! 치료하자!”
이안공자의 부름에 요정이 달려왔고,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이 앞쪽으로 움직였다.
“오늘은 성이의 도움을 받으려 하거든. 따끔할 텐데 그리 힘들지는 않을 거야.”
“예.”
대답은 했으나 요정은 겁먹은 눈치였다.
입구에서 백면호리가 호되게 당했던 모습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인상을 찌푸린 요정의 손목을 섭성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
“정아!”
백면호리가 화들짝 놀랐는데 거기까지였다.
“아빠. 시원해.”
“뭐?”
“다리가 시원해졌어. 저리는 것도 훨씬 덜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요정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치료가 끝나면 동굴을 나서도 될 것 같소.”
“물러갔다고 확신하나?”
“다시 돌아온다면 모를까, 저들이 입구에 없는데 굳이 이렇게 동굴에서 지낼 필요는 없소.”
“그건 그렇지.”
“한 닷새면 치료가 끝날 텐데 정이가 가면 무슨 낙으로 지낼지 그것이 벌써 걱정이오.”
아쉬움 가득한 이안공자의 말에 백면호리는 입맛을 다셨다.
이곳을 떠나면 또 혼자 지내야 할 요정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
진무린은 곽가의 혈도를 풀어주었고, 급한 치료를 허락했다.
“소가주. 지켜보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수상하면 머리를 가르십시오.”
“예, 진 대협.”
등소옥은 아예 소매에 넣었던 도끼를 내려 들었는데 어찌나 눈빛이 독하게 빛나는지 곽가의 머리를 쪼갤 기회를 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요. 놓치느니 죽이는 것이 백 번 유리한 일이니 손을 쓰는 데 절대 주저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명심해서 시행하겠습니다, 진 대협!”
그녀 외에도 사명감에 불타는 비룡방의 수하들과 하급 무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곽가를 빙 둘러싼 채 지켰다.
참으로 잔인한 지시였는데 진무린은 주저하지 않았고 명을 받은 비룡방 일행은 사명에 불타는 터라, 조금만 서툰 짓을 해도 곽가는 바로 고깃덩이로 변하게 생긴 형국이었다.
진무린은 마지막으로 곽가의 혈도를 풀어준 뒤에 다시 세 곳을 누르고서야 대청으로 움직였다.
기다리던 참이다.
진무린은 운기 중에 우연히 곽가를 찾은 일, 그리고 반노쌍복이 나타난 이후 벌어졌던 일에 관해 모조리 두 사람에게 전해주었다.
“깨달음을 얻었나?”
“보기는 한 듯싶은데 아직 몸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아쉽다! 아쉬워! 그렇더라도 조만간 얻는 게 있겠지.”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먼저 진무린의 성취에 관한 대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화제는 곽가의 은신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약연 장로가 거의 확실하군.”
“다른 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떠들었으니 약연은 어떤 수를 쓰든 외부와 연락할 것입니다.”
“일부러 약연 장로를 그리 몰아쳤었나? 급하게 연락하게 하려고?”
“그렇습니다. 내일이 지나면 자경과 철 호법의 대결이 있을 테고, 언제 곽가가 실토할지 모르니 그는 반드시 오늘 밤 안으로 방법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허어.”
탄식을 내뱉은 황종관이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세웠다.
“자네는 내가 아는 영웅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데 행동과 결과가 이리 정확하니 다른 말을 하기 어렵군.”
진무린은 황종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악인이라도 최대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 도리라 배웠고, 그리 살았지. 그런데 자네를 보면 확실히 이 강호의 정의가 바뀌었음을 알겠네.”
“곽가를 대하는 모습을 말씀하십니까?”
“어디 그뿐이겠나? 부맹주를 단호하게 처리하는 모습도 그렇고, 약연 장로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지. 나라면 절대 그리 못 했을 걸세.”
“그러라고 금패를 맡겨 주신 줄 알았습니다.”
“통쾌하기는 하지. 후련한 면도 있고.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면 이해하겠나?”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황종관이 웃었고, 청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 대협. 노도에게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소.”
“말씀하십시오, 진인.”
“마등이 다시 살아나 공동의 제자 열여섯을 살해하지 않았소? 약연이 그와 한통속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청강의 의문은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을 생각했었습니다.”
“역시 진 대협이시오. 이제 와 말씀드리는 것이 미안한 일인데 공동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점창의 제자들까지 피해를 본 공동의 약연 장로에게 너무 무례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말이 있었다오.”
조심스럽게 꺼낸 청강의 말에 진무린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인. 부맹주가 저들과 내통했다는 사실은 믿으십니까?”
“그렇소, 진 대협. 그를 조사해달라고 맹주께 달려간 것이 노도이니 다른 말할 이유가 없소.”
진무린의 질문이 이상하다고 여기는 눈치이면서도 청강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부맹주가 화산의 제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일입니다.”
당시가 떠올랐는지 청강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약연은 무언가 감춰야 할 것이 있든가, 아니면 제자를 희생해서라도 얻을 것이 있었다고 봅니다.”
황종관과 청강이 나직하게 신음을 흘리고는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사부가 제자를 희생양으로 내놓은 것은 사마외도의 극악한 무리에게서나 있는 일이요, 아비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식을 죽인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두 사람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견이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말씀인데 앞뒤의 정황을 보면 부인하지도 못하겠으니 이 참담한 심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짧지 않은 침묵 뒤에 청강이 뱉은 말이었다.
“오늘 밤을 유심히 보시면 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진 대협을 경계할 텐데 쉽게 움직이겠소?”
“그리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곽가의 경계를 비룡방에 맡긴 것입니다.”
“허허허.”
대화를 듣고 있던 황종관이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비룡방의 소가주를 찾을 때 뭔가 있을 줄은 알았더니 그런 계산마저 했던 줄은 짐작 못 했네. 무위는 말할 것도 없고, 수를 읽는 것 또한 저 앞에 있으니 자네가 한 편인 것이 이리 기쁘고 반가울 수가 없네.”
진심으로 탄식을 늘어놓은 황종관이 주변을 둘러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래. 뒤는 어찌 되는가.”
진무린의 답을 청강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기다렸다.
**
며칠 한산했던 홍화루는 다시금 분주한 밤을 보냈다.
마등이 살아온 뒤로 줄어들었던 매상은 공동의 자경과 철비완이 대결한다는 말 이후로 불붙듯 일어났고, 구경하러 몰려든 이들이 들이닥치면서 연일 최고치를 경신했다.
원예는 다행히 본모습을 찾았다.
들쭉날쭉했던 감정의 기복도 사라져서 올라오는 정보를 냉철하게 처리하며 중심을 잡았다.
강호에 빛을 이용한 정보의 전달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것을 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발전시키느냐가 관건이었는데 원예는 사람 사는 곳이면 반드시 있는 기루와 반점을 묶었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정보망을 사방에 펼쳐놓았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호북의 상등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원예는 막 올라온 손바닥 크기의 내용을 확인한 뒤에 앞에 놓인 촛불에 태웠다.
“반노쌍복이 다시는 호북의 상등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 약조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공자께서 왜 그랬을까요? 살려둔 것도 의아한데 그런 약조를 받은 건 더 의아하네요.”
“워낙에 그런 분이라 이해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적이라 판단되면 일말의 여지도 없이 가차하게 상대하지만, 그러기 전에는 반드시 기회를 주는 성품이라고 보았습니다.”
원예는 마치 백섭광의 의견을 되새기는 것처럼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루주. 은향입니다.”
밖에서 부루주 은향의 음성이 들렸고, 곧바로 문이 열렸다.
은향은 바로 걸어와 원예의 앞에 엎드렸다.
“귀혼곡에 마교의 장로 셋과 그들의 제자, 수하들로 보이는 인원이 침입했습니다.”
퍼뜩 백섭광을 보았던 원예가 시선을 내렸다.
“저들은 마치 물러간 것처럼 꾸미고 입구에 몸을 숨기고 있다 합니다.”
“귀혼곡이 밖으로 나올 일이 없으니…….”
말을 하던 원예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표물이 없으니 약재를 구해야 할 테고, 치료를 마친 백면호리가 나올 수도 있구나!”
“뭔가 방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마교의 장로 셋은 누구인지 확인했어?”
“마검 금소적, 마도 소인걸, 마궁 염환이라 들었습니다.”
원예만큼이나 백섭광 역시 적지 않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마교삼절이 모두 나왔다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잖아.”
“아직 목적을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알아볼 것이 뭐가 있어? 정도 문파의 무인들이 오합지졸로 모였다면 공명심에 들뜬 것일 테고, 마교삼절이 제자들과 수하들까지 데리고 왔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원예는 갑갑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부탁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는데.”
“공자에게 청을 넣을 생각이십니까?”
“한 가지는 들어준다 하였으니 달리 방법이 없지요. 이런 일을 대비해 그토록 소수음공을 대성하려 애썼건만, 하늘이 원망스러워요.”
창을 통해 소능산을 보았던 원예가 냉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공자께 연락을 넣으세요. 가능한 한 조용히, 그리고 빨리 만나고 싶다고 전해주시고요.”
“예, 루주.”
총관이 급한 걸음으로 나선 뒤였다.
“그분을 중심으로 혈풍이 부는 건지, 강호의 세 가지 보물이 혈풍을 불러오는 것인지 모르겠어.”
혼잣말처럼 말을 꺼낸 원예가 엎드린 은향에게 시선을 주었다.
“앞으로는 두 시진에 한 번씩 귀혼곡의 상황을 전달하라 일러.”
“예, 루주.”
은향이 몸을 일으켜 바쁜 걸음으로 나갔다.
“강호의 주인이 될지 모를 사람이 내민 한 가지 청을 이리 쓰다니. 소수음공을 대성한 내가 그들을 막아내고 귀혼곡의 앞에서 죽은 것만큼이나 허무한 일이야.”
길게 숨을 내쉰 원예가 소능산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소수음공을 잃었는데 요동치는 이유는 뭐지?”
이리저리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원예는 자꾸만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