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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31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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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31화

은천검제

제31화

 

진무린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인물도 그렇지만 복색 또한 독특해서 피처럼 붉은 두건과 강호에서 흔히 보기 힘든 검은색 승복을 걸쳤다.

“어서 오시오.”

“오래 기다리셨소?”

승복 차림의 남자는 마흔 중반으로 보였다.

홀쭉하게 들어간 볼에 눈매가 매섭게 찢어졌고, 매부리코를 지녀서 참으로 흉악한 인상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침묵했다.

‘전음이구나!’

진무린은 저 둘이 전음을 이용해 대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았다.

저 정도 전음이라면 가로채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했을 경우, 저 두 사람 역시 진무린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조용하게 있다가 승복 입은 남자를 따라가 볼까, 아니면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전음을 듣기 위해 기운을 풀어볼까.

진무린이 고민할 때였다.

“그리되었다니 참으로 아쉽소.”

승복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어 대꾸를 내놓았다.

답은 하나였다.

소강명은 전음을 할 수 있고, 승복을 입은 남자는 하지 못한다.

“사부께 그리 말씀 올리리다. 이후 부맹주께서는 천서유기를 찾는 일에 힘써 주시길 바라오.”

승복 입은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강명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나름으로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 눈치였다.

소강명이 무언가를 전하는 것처럼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홍화루라면 본승도 들은 바가 있소.”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본교의 술법을 통해 얼마든지 입을 열 수 있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달빛 아래에서 승복의 남자는 거만한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달빛에 드러난 그의 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혈교인이구나.’

진무린은 승복 입은 남자가 혈교의 승려라 확신했다.

그들이 즐겨 씹는 붉은 열매에 관해 읽은 바가 있는 덕분이었다.

혈승이라면 생김새로 저 인간의 정체도 짐작한다.

혈교의 3인자 ‘곽가’였다.

진무린은 잠시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은천문 따위! 그곳의 제자라는 계집이 우리 손에 들어왔음에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것들을 뭐 그리 걱정하시오?”

그러나 이어진 곽가의 입에서 사매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순간, 진무린은 바로 마음을 바꾸었다.

혈교의 3인자라면 술법이 고강할 테고, 추적하는 도중에 술법을 발휘하면 종적을 찾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향해 걸었다.

흠칫 놀란 소강명이 먼저 고개를 돌렸고, 간발의 차이로 곽가가 시선을 던졌다.

“진무린?”

밝은 달빛 아래였다.

진무린은 을씨년스럽게 주저앉은 사당 앞으로 나섰다.

“이 자가 누구요?”

곽가가 소강명에게 은근하게 건넨 질문이었고,

“네가 말한 은천문 따위의 제자 진무린이라 한다.”

소강명이 입을 열기 전에 진무린이 다부진 대꾸를 건넸다.

스응!

변명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소강명이 단박에 검을 꺼낼 줄은 몰랐다.

“부맹주는 잠시 뒤에 상대해 드리겠소. 지금은 혈교의 인물에 집중해야 할 때니까.”

“이놈!”

“목소리를 낮추려 애쓰지 말고 그 잘난 제자들을 부를 게 아니라면 그냥 입을 닫고 계시오”

진무린의 거친 말에 소강명의 눈 끝이 씰룩였다.

“네놈이 어떤 일인 줄 알고, 감히 정도맹 부맹주의 행사를 가로막는단 말이냐!”

그래도 지지 않겠다며 나온 소강명의 나직한 꾸중이었다.

표정은 준엄하기 이를 데 없으나 비겁하게도 그는 지금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란에 달려올 이들을 염려하는 게 분명했다.

소강명은 자꾸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혈승 곽가는 도주할 틈을 살피는 터라 진무린은 먼저 등에 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런 뒤에 왼손을 품에 넣어 맹주에게서 받은 맹주금패를 꺼내 소강명의 앞에 내밀었다.

“맹주의 명으로 마등이 살아난 일을 조사하고 있소. 이 패를 보면 구대문파 전체가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는데 설마 부맹주가 그를 어기지는 않으리라 믿소.”

금패를 본 소강명의 눈에 놀라움과 당황함이 서릴 때 진무린은 시선을 돌렸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사매를 데리고 있다는 말에 대해 들어야겠다.”

진무린은 이미 묵룡심법의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만큼 마음도 독하게 먹었다.

여기에서 조금만 수상하면 우선 곽가의 목을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도주할 생각이라면 마음대로 해도 좋아. 네놈의 목을 잘라 들고 혈교로 향할 테니까. 사매의 실종과 관련되었다면 혈교 따위, 모조리 죽여주마.”

“흥.”

곽가가 코웃음을 친 직후였다.

쉐에엑!

“억?”

진무린의 검이 번득였고, 이어 곽가가 시선을 떨궜다.

“끄윽!”

뒤늦게 오른발목이 잘린 것을 알아챈 곽가가 왼발로 껑충거리며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오른발을 들고 뒤뚱대는 곽가의 왼발에.

쉐에엑!

다시 진무린의 검이 번쩍하고 지나갔다.

“끄아!”

기우뚱했던 곽가가 비참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어찌 그리 잔인하냐!”

그 직후에 소강명의 나직한 외침이 나왔는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으르르릉.

진무린은 묵룡심법의 내공을 있는 대로 실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소능산이 울었고, 이어 놀란 산짐승들과 나무 틈에 몸을 감췄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소강명은 진무린의 무위에 확실히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밤의 정적을 깨는 고함이 울렸고, 소능산이 떨었으니 맹주와 청강, 약연이 달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달려들기도 곤란했다.

단숨에 진무린을 죽이지 못하면 결국, 맹주금패에 반항한 꼴이 돼서 뒤를 수습하기 어렵다.

“끄으.”

진무린은 검을 내려 들고 잘려나간 양쪽 발목을 붙든 채 인상을 찌푸린 곽가를 향해 걸었다.

“입을 다물겠다면 이번에는 오른손목을 잘라주마.”

진무린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호오오-!”

청강의 것이 분명한 휘파람이 상등의 밤을 깨웠다.

그 직후에 지붕을 타고 사람의 모습 여러 개가 떠올랐는데 맹주 황종관과 청강, 호위,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그 순간, 발목에서 아직 피가 뿜어져 나오는 곽가가 번득 고개를 들었다.

쉐엑!

진무린의 검이 번득이며 그의 오른손목을 자른 직후였다.

온 얼굴을 찌푸린 상태에서도 그는 흉측하게 발목이 잘린 발 두 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화아아아악!

솔직히 진무린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발목에서 뿜어진 피가 안개처럼 진하게 피어나 삽시간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릴 줄을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나.

‘죽인다!’

쉐에에에엑!

진무린은 곽가가 있는 곳을 향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제대로 걸렸다면 몸이 사선으로 조각 날 수밖에 없는 매서운 한 수였다.

검을 휘두른 진무린이 붉은 안개 속에서 좌우를 돌아볼 때 주변에 익숙한 기척이 내려앉았다.

“진 대협!”

“진인! 혈교의 술법입니다! 근처에 부맹주가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뭐라 하셨소? 노도에게는 붉은 안개가 둥글게 서 있을 뿐이오. 게다가 말씀이 어그러져 제대로 들리지도 않소.”

청강의 대꾸가 돌아온 직후였다.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하며 주변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 대협!”

가장 먼저 청강이 다가와 진무린을 살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황종관이 매서운 눈으로 바닥에 뿌려진 핏자국과 소강명을 돌아보았다.

그때쯤 공동의 약연 또한 제자들과 도착했는데 소강명을 보며 당황하는 기색으로 보아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찌 된 일인가?”

“이곳에서 수련하던 중 우연히 부맹주가 곽가로 추정되는 혈교의 인물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흥! 증거도 없는데 말을 잘도 지어내는군!”

진무린과 황종관의 대화를 뚝 자르며 소강명이 끼어들었다.

“맹주께서는 어찌 저런 자에게 맹주금패를 함부로 건네셨으며, 어떻게 그에 관해 한 말씀도 안 하셨소?”

“맹주금패는 흑사련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을 조사하라 전해준 게요. 그리고 금패를 전하는데 부맹주에게 통보할 의무는 없소.”

“그것을 부맹주인 이 사람에게 들이미니 그런 것이 아니오?”

“부맹주가 억울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왜 이 시간에 이곳에서 혈교의 인물을 만났는지 먼저 설명해 주시겠소?”

황종관의 질문을 받은 소강명은 먼저 진무린을 고약하게 보았다.

“혈교라니 가당치도 않소. 그는 모산 출신으로 혈교의 음모를 내게 전하던 정보원이었소. 오늘 저자가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바람에 마등이 살아난 일에 관해 밝혀낼 좋은 기회를 날렸으니 이를 어떻게 책임지실 참이오?”

모여있던 이들의 시선이 단박에 진무린에게 쏠렸다.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서 지켜보았다니 알겠군. 내가 그에게 뭐라 하던가?”

“부맹주. 전음을 보냈다고 자신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나를 가두었던 붉은 안개를 어떻게 설명할 참이냐? 정보원이 어떤 인물이길래 혈교의 술법을 사용하지?”

진무린이 소강명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감히! 부맹주께 그 무슨 건방진 언행이냐!”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약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진무린의 기를 꺾을 의도였던 모양이었다.

“닥쳐라!”

끄르릉.

“크흑!”

그러나 진무린이 내공을 담아 외친 한 마디에 그는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거기까지여도 망신스러울 판에 약연은 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숙였다.

“본문의 사매가 납치된 일이다. 그에 관여한 자가 있다면 반드시 목을 벨 것이고, 그 일을 덮으려는 자 역시 목을 벨 것이다.”

가슴을 움켜쥔 채 인상을 펴지 못하는 약연을 보아서인지 소강명도 이때는 대꾸하지 않은 채 눈알만 부라렸다.

침묵이 내려앉는 소능산에서 청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생사현관을 타통한 수준의 최고에 있던 진무린은 분명 단계를 넘어섰다. 이는 또한 엊그제 마등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지이니 지금 정도맹과 구대문파에서 진무린을 상대할 이는 실로 몇 사람 되지 않을 일이었다.

“부맹주. 소수음공에 관한 정보원도 말하지 못하고, 오늘 혈교의 인물이 누구인지도 말하지 못하니 내가 대신 말해주지. 곽가는 분명 홍화루에 술법을 걸어 사실을 실토하게 할 수 있다 하였고, 혈교가 사매를 데리고 있다고 했다. 또한, 부맹주에게 천서유기를 찾으라 하였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금시초문이다.”

“그렇게 감출 게 없는 사람이 왜 검을 꺼내 들고 있지?”

“이거야 네놈이 검을 꺼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진무린은 다시 한 번 품에 손을 넣어 맹주금패를 꺼내 내밀었다.

“부맹주. 맹주께서 내게 주신 권한으로 너를 구금하겠다. 강호삼보 중 하나인 옥환을 찾았고, 혈교와 내통하여 마등이 되살아나는 데 일조한 것, 그것이 너의 죄명이다.”

모두의 시선이 달려갔는데 황종관은 진무린과 소강명을 지켜보며 묵묵했다.

“맹주! 이는 월권이요, 하극상 올시다!”

“닥치라고 했다!”

끄르르릉!

“커흑!”

재차 끼어들었던 약연은 아예 상체를 숙인 채 몸을 세우지 못했다.

진무린은 아예 작정하고 약연을 내공으로 짓눌렀다.

살기라고 부른다.

내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공의 고하가 여실히 드러나는 상대에게 특별히 효과가 있다.

내공을 집중해서 목표한 이의 기운을 움켜쥐는데 이것이 오래가면 돌이키지 못할 경우도 생기니 혹자는 이것을 심검이라 부르기도 했다.

진무린이 집중해서 쏟아부은 내공을 감당하지 못한 약연은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했고,

“푸훅!”

마침내 피를 토해냈다.

그래도 공동의 장로인 사람이 진무린의 내공에 눌려 피를 토하는 장면이라 어딘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현실이 그러니 소강명은 완벽하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진 대협은 이제 그만 기운을 거두게.”

황종관이 만류하고서야 진무린이 기운을 거두었고, 그 직후에 약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장로님!”

자경과 제자들이 그를 부축했는데 이미 기세가 꺾일 대로 꺾여서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부맹주는 검을 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반항하는 것으로 알고 목을 베겠다.”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 황종관 앞에서 진무린은 양보하지 않았다.

“끝내 반항하겠다면 받아주마.”

벤다.

소강명이 버티면 진무린은 정말 목을 벨 테고, 지금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다.

지켜보던 이들조차 다 알아챈 것을 당사자인 소강명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자존심이 상해서, 그리고 아무리 차이가 있더라도 진무린의 일검에 목이 잘리지 않으리라는 자신쯤 있어 버틸 뿐이었다.

옅게 웃은 진무린은 소강명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진 대협!”

청강이 놀라 만류하는 순간이었다.

소강명이 검을 검집에 넣었다.

“네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당하게 조사받은 후에 억울함을 밝히고자 함이다.”

소강명의 변명은 시기적절했고, 상황과 부맹주의 직위에 맞았다.

피식하는 진무린의 웃음만 없었다면 분명 그리 보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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