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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30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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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30화

은천검제

제30화

 

저녁을 마친 진무린은 홍화루를 향해 걸었다.

은은한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물든 길을 걸으며 진무린은 사매 ‘모려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 아닌 문주 임운령이 직접 달려갔으니 반드시 소식이 있을 일이었다.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문주가 의심하는 두 사람의 장로가 누군지 충분히 짐작한다. 그들이 섬전검법을 유출했다면 이미 은천문의 사람이라 하기 어렵고, 그 죄가 중한 경우에는 척살의 대상이 된다.

그런 이유로 임운령은 새로운 임무가 있다며 진무린을 묶어두었다. 사매 모려원이 사라진 것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는 수법에 진무린마저 당할까를 염려한 것이 분명했다.

마등이 살아난 일, 무공의 유출, 천서유기를 찾는 반노쌍복까지, 청강의 짐작대로 강호에 피 냄새가 짙어지는 느낌이어서 진무린의 가슴은 무거웠다.

저녁나절이었다.

흑사련 호북지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낮에 루주를 포함한 세 사람이 정도맹에 끌려왔던 일이 있어서인지 홍화루는 평소와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진무린은 홍화루 안으로 들어섰다.

지켜보는 무인이 있는 것을 알았는데 어차피 보고가 들어가는 곳이 황종관이라 상관없었고, 부맹주 소강명이 지켜본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겨 몸을 감추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목덜미에 얻어맞은 자국이 흉하게 남은 백섭광이 진무린을 맞았다.

“루주를 잠시 볼까 하는데.”

“모시겠습니다.”

진무린은 백섭광의 안내를 받아 3층에 있는 원예의 거처로 움직였다.

“루주. 진무린 공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백섭광이 말을 건네기 무섭게 문이 좌우로 열렸다.

여기까지는 처음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무린을 위한 의자가 원예의 거대한 의자 바로 앞에 준비된 것이 달랐다.

낮에 보았던 처참한 몰골을 지운 원예는 원래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신, 눈에 분노와 원망을 담고 있었다.

“앉으세요, 공자.”

진무린은 원예의 앞에 앉았다.

“정보를 다루는 홍화루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진무린이 앉기 무섭게 나온 원예의 첫마디였다.

“소수음공을 감추려 정보 취급을 중단했더니 오늘 같은 수모를 당했네요.”

“안다고 해도 막기는 어려웠겠지.”

“무공만이 강호를 지배한다고 여기시나요?”

“누구에게나 피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지. 문제는 그 경험을 통해서 발전하느냐, 아니면 좌절하고 원망하느냐의 차이 아닐까.”

진무린의 다독임이 마음에 들지 않은 느낌이었다.

“방문하신 이유를 알려주세요.”

원예의 대꾸는 차가웠다.

“루주가 소수음공을 익히는 이유가 천서유기에 적힌 옥환을 찾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제 무림공적이 될 차례인가요?”

“말을 가려가며 해.”

진무린은 툴툴거리는 원예에게 냉정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감정이 상한 것은 알겠는데 돕겠다며 나선 사람을 이리 대하는 것은 수장이 보일 모습은 아냐.”

진무린은 대꾸 없는 원예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갈 테니 정보를 다시 만지면서 강호를 지배해. 나중에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싶다. 한 가지 더. 옥환을 탐냈다면 포기해. 그 물건이 지난 세월 많은 피를 부른 건 부질없는 탐욕이 어떤 결과를 주는지 경고하기 위한 것일 테니까.”

진무린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왜 반노쌍복에게서 소녀를 지켜주신 거죠?”

당돌한 음성이 달려들어 진무린을 되돌려 세웠다.

“무슨 뜻이지?”

“혹시 소녀에게 있는 소수음공을 노리신 것은 아닌가 싶어서요.”

진무린은 먼저 가볍게 웃었고, 다음으로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낮에 소수음공을 녹였다. 그때 맹주와 청강 진인, 부맹주, 약연 장로가 알아챌 정도로 기운이 폭발했지. 루주의 공력을 얻은 듯싶어서 곤란한 일 하나는 처리해줄까 해서 온 길이고.”

서 있는 진무린의 시선을 앉아 있는 원예는 피하지 않았다.

“천서유기로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것을 막아줄까 했더니 지금은 적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고 강호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하나는 들어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진무린이 재차 몸을 돌린 뒤였다.

“부맹주가 상등에 소문을 퍼트리고 있어요.”

원예가 급히 말을 냈는데 진무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흘 뒤에 있을 대결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요.”

좌우에 있는 시비가 열어준 문을 통해 진무린은 곧장 원예의 거처를 나섰다.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좀 더 길어진 침묵의 끝에서 백섭광이 들어섰다.

“공자께서 홍화루를 떠나셨습니다.”

“정보를 다시 모으세요. 홍화루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예요.”

“예, 루주.”

“전에 총관이 추천했던 호위를 고용할까 해요.”

백섭광이 놀란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루주. 곽도양을 고용하시는 것은 늘 바라던 일이나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부맹주와 약연의 뒤에 반노쌍복이 있다면 반드시 또 들이닥칠 거예요. 그들이 노리는 것이 천서유기라면 우리는 절대 평안하게 홍화루를 운영하지 못해요.”

“그래서 더욱 지금 곽도양을 부르셔서는 안 됩니다.”

백섭광의 간언을 들은 원예는 쓰다, 달다, 말을 하지 않았다.

“잘못된 운기로 상한 몸을 추스르고, 당분간은 정보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루주에게 기댄 수많은 이들을 위한 길입니다.”

백섭광은 마치 화난 아이를 달래는 투로 잔잔한 음성이었다.

“곽도양의 고용은 좀 더 고민하기로 하지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루주.”

“혼자 있고 싶어요.”

원예의 말을 들은 백섭광이 몸을 돌렸다.

그가 나서면서 방 안은 또다시 지독한 침묵에 휩싸였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 아래층까지 조용한 홍화루의 3층에서 원예는 단정하게 앉아 움직임이 없었다.

운기를 하는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

 

저녁을 먹은 황종관은 거처의 안쪽에서 운기를 마쳤다.

기와지붕을 타고 넘어온 은은한 달빛이 보이는 모든 것을 은색으로 물들인 시간이었다.

대청으로 나선 황종관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실 때 청강이 넉넉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달빛과 어울리는 늙은 도사의 모습은 어쩐지 보는 이를 푸근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와계셨소?”

“운기를 마치고 나니 진인이 그립지 뭡니까?”

“허허. 나는 맹주께서 진 대협을 기다리시는 줄 알았소.”

속을 들킨 황종관은 변명하지 않은 채 웃었다.

“앉으십시오. 달빛이 워낙 좋아 술 한 잔이 아쉽던 참입니다.”

대청의 자리를 권한 황종관은 바깥에 있던 무인을 불러 술을 청했다.

“맹주. 좋지 않은 소식이 있소.”

청강의 표정을 봐서는 누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황종관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기다렸다.

“공동의 자경과 비룡방의 호법이 대결한다는 소문이 퍼져 다들 그 이야기를 떠든다오.”

“그렇군요. 무슨 방법이든 사용하리라 짐작했더니 워낙 빤한 수를 내놓아서 오히려 실망스럽습니다.”

“짐작하셨소?”

“낮에 망신당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진인께서도 대강 짐작은 하셨으리라 봅니다.”

“그리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오. 어찌했는지 구대문파와 그에 속하지 못한 무인의 대결로 소문나서 바깥이 시끄럽다오.”

황종관이 말을 마쳤을 때 무인 셋이 술과 안주로 적당한 요리 세 가지를 가지고 왔다.

탁자에 술과 잔, 안주가 놓였고, 황종관이 잔을 채우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부맹주는 구대문파 출신이 아닌 이 사람을 가장 못마땅해하던 인물입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비룡방의 호법을 지도했으니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기고 싶었을 겁니다.”

걱정스러운 청강 앞에 황종관은 잔을 내밀었다.

“달이 술에 담겨 향이 더욱 짙습니다.”

황종관의 권유에 청강도 잔을 들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황종관은 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웠다.

“이미 벌어진 일에 염려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리되었으니 아예 공개적으로 지도할까 합니다.”

“맹주의 모습이 바뀐 것이 보기에는 좋으나 앞으로 고난을 겪으실까 그것이 염려되오.”

“이 모든 것이 그 젊은 대협 탓이 아닙니까. 나중에 힘든 일이 있으면 그 친구의 소매를 붙들고 늘어질 참입니다.”

황종관의 농에 청강이 넉넉하게 웃었다.

“이 친구는 홍화루에서 나섰다는 보고가 있은 뒤에 나타나지 않으니 혹시 진인께서는 어디 있는지 짐작하십니까?”

“진 대협이라면 어디일지 모르나 지붕에 있을게요.”

“지붕이라 하셨습니까?”

“은천문에 있는 진 대협의 사부께서 노도에게 들려준 말씀이 있다오. 진 대협이 기감을 펼치면 사방 오 리에 걸치는데 특히, 밤이면 그 능력이 더욱 뛰어나 그의 이목을 피할 이가 없다 하였소.”

청강의 말을 들은 황종관이 기가 막힌 얼굴로 웃었다.

“과장이 아니겠습니까?”

“기감이 오 리에 이르는 것을 노도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지난번 마등을 상대할 때 보았던 무위로 보아 거짓이라 하기도 어렵소.”

술잔을 앞에 두고 청강은 당시의 모습을 황종관에게 자세하게 전해주었다.

보고를 받기는 했으나 이토록 자세한 내용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마등을 상대하는 젊은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때도 밤이고, 듣는 지금도 달이 밝은 시각이라 황종관은 청강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마등이 마교의 폭렬공을 사용한 듯싶다는 말씀을 드린 것은 기억하시오?”

“그 점에 관해서도 비월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점점 달려가서 마등이 폭렬공을 사용한 장면까지 이어졌다.

황종관은 당시의 힘겨운 싸움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해서 연신 주먹을 쥐었고, 때로는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말하리다. 노도는 진 대협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대결에 관한 이야기는 청강의 자조 섞인 고백으로 마무리되었다.

“제자 열둘을 잃은 노도가 무언들 못하겠소. 그러나 그날 객기를 부렸다면 노도는 물론이고, 이곳에 함께 온 애꿎은 제자들의 목숨만 또 잃었을 게요.”

“흠.”

황종관은 흑사련 지부가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청강 같은 인물이 적수라 아니란 표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를 익히 짐작한 까닭이었다. 

이는 반대로 그만큼 진무린의 무위가 대단하다는 증거쯤 된다.

“비룡방의 호법을 지도하면서 잠시 보기는 했으나 저는 진인에 버금가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마등을 진 대협에게 맡기지 않았을 게요.”

다시 살아난 마등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황종관은 아무래도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은천문에는 세 가지 검법이 있고, 두 가지 심법이 있소. 진 대협은 이미 그를 모두 대성하였고, 마지막 깨달음의 초식을 두었으니 만약 그를 얻는다면 다음 대 검왕은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소.”

황종관은 입맛을 다셨다.

무공의 고하야 분명히 있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이고, 무공이 높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난 자가 강한 것이 강호의 생리 아니던가.

“혹여 진 대협과 비무를 바라시는 게요?”

“한 자루 도를 품고 살아온 길이 있는데 그런 무용담을 듣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겠습니까?”

답을 낸 황종관이 잔을 들었고, 권유를 받은 청강이 마주 들었다. 

말을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진무린을 위해 잔을 넘겼다.

 

**

 

진무린은 실제로 홍화루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중앙에 등을 기댄 채 움직임이 없어 멀리서 보면 망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때 진무린은 기감을 펼쳐 홍화루에서 황종관의 거처까지의 반경을 살폈는데 이는 또한 은천문의 제자들이 해야 하는 독특한 수련의 일종이었다.

먼저 은천문은 진법으로 입구를 감췄는데 그 앞의 경계를 서는 제자는 반드시 이런 방식으로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다음으로 기를 얇고 길게 펼치는 수련은 춘설난무를 펼칠 때 특히 효과를 발휘해서 섬전검법을 익힌 제자들은 시간이 날 적이면 늘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이 수련이 강호에서 얼마나 큰 득을 주는지 진무린은 잘 알았다.

수련도 되고, 경계도 서고.

진무린이 이를 외면할 이유는 없었다.

시간이 얼추 축시를 넘어갈 때였다.

운기하는 사람처럼 편안하던 진무린이 퍼뜩 시선을 돌렸다.

‘소강명?’

넓게 펼친 기감에 걸린 이는 분명 소강명이었다.

평범한 걸음이라면 잠이 안 오나 했을 텐데 그는 기척을 숨긴 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하게 그는 진무린이 펼친 기감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진무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소강명의 움직임을 살피며 그가 움직이는 방향을 주시했다.

우습게도 그는 무너진 사당이 있는 소능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기는 상등에서 조용하게 누군가를 만나기에 그만한 장소도 없었다.

그가 이 리를 벗어나기 직전에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경공을 발휘해 지붕을 타고 달렸다.

소강명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움직였는데 황종관, 청강, 약연이 있는 곳을 피했고, 그나마 근처를 지날 때는 기척을 최대한 숨겼다.

세 차례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핀 소강명이 소능산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가 향하는 곳이 무너진 사당임을 확신한 진무린은 입구의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소리와 모습을 감추느라 평소보다 힘겹게 움직인 진무린은 무너진 사당의 뒤편 언덕에 몸을 감췄다.

얼마나 조심하는지 소강명은 제법 시간이 흐르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면 그때 기감을 펼쳐볼 일이었다.

소수음공을 누를 때처럼 내공을 완전히 누른 진무린이 호흡마저 조심할 때였다.

마침내 소강명이 사당 앞으로 올라왔다.

그는 먼저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폈는데 진무린을 발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각쯤 시간이 흘렀다.

능동을 바라보며 서 있는 소강명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경공으로 달려왔고, 몸을 숨긴 진무린 위를 뛰어넘어 사당 앞에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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