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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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9화
은천검제
제19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짐작한다.
검에서 피어난 검은 기운 말이다.
‘등룡창천’은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된다는 은천문 최후의 초식이었다.
묵룡심법의 내공이 신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 있었고, 사부인 ‘전도위’는 내공이 충분한 상태에서 검법이 자유로워지면 자연 찾아온다고 했었다.
운기를 시작한 진무린은 먼저 몸을 살폈다.
등룡창천은 은천문이 25년을 기다린 초식이었다.
묵빛 기운이 펼쳐지면 그 반경에 든 적은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고 들었다.
믿기 어려운 경지요, 위력인데 어젯밤에 검에서 피어난 기운을 설명할 것은 등룡창천밖에 없었다.
숨을 길게 들이마신 진무린은 단전에서 시작해 몸의 혈도를 하나씩 짚었다.
혹시 마등이 뿜어냈던 기운이 몸에 남았을까.
오른쪽을 파고든 놈의 기운이 등룡창천을 불렀나?
진무린의 짐작은 실망으로 끝을 맺었다.
아무리 꼼꼼하게 살펴봐도 단전, 혈도, 맥에 이질적인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무수한 사람을 살해한 악인답게 그는 진무린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삶을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은천심법은 단전의 크기를 넓히는 방식이요, 묵룡심법은 내공을 압축해 힘을 축적하는 형태였다.
그렇다면 혹시 두 가지 심법 중 하나에 변화가 생겨 내공이 변했을까?
혹시나 모를 기대를 품은 진무린은 내공을 천천히 일으켰다.
‘뭔 복에.’
그러나 내공 역시 이전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마음을 다스린 진무린은 뒤틀린 기혈을 차분하게 다독였다.
표현하기 좋아 묵빛 기운이지 실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이었다.
그런 기운을 분명 어젯밤에 보았고, 그 기운에 마등이 무너졌으니 등룡창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우연이거나, 죽을 고비에서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기연이거나.
마음을 비운 진무린은 일으킨 내공을 몸 전체에 천천히 돌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공을 갈무리한 진무린이 눈을 떴을 때였다.
맞은편에 청강과 예사롭지 않은 기운의 중년 무인이 있었다.
“진 대협. 몸은 좀 어떠시오?”
오후에 눈을 감았는데 원예의 방에는 촛불이 여러 개 놓여서 창을 통해 들어오는 어둠을 밀쳐내고 있었다.
“진인께서 살펴주신 덕분에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진 대협이 염려돼서 기다렸던 참인데 참으로 다행이구려.”
진무린의 상태를 짐작한 청강은 반가운 기색이었다.
“진 대협. 사월분광이라는 별호를 지닌 정도맹의 황종관 맹주이시오.”
쉰과 예순의 중간쯤 보이는 남자는 어깨가 다부졌고, 가슴이 벌어졌으며 체형에 비해 팔뚝이 굵었다.
진무린은 커다란 원예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불편하니 무리할 것 없네.”
“은천문의 진무린이 맹주께 인사드립니다.”
“그 사람. 무리할 것 없다는 데도. 황종관일세.”
진무린을 만류했던 황종관이 양손을 잡아 흔들어 인사했다.
무림맹주가 와 있어서 그럴까.
원예와 총관 백섭광은 공손한 태도로 중간에 서 있었다.
“앉게. 아직 식사도 못 했지?”
“괜찮습니다.”
강한 느낌 아래로 자상함을 달아서 황종관은 마치 사부인 전도위를 보는 느낌이었다.
“꼭 만나보고 싶었지. 강호에 많은 기인과 고수들이 있으나 최근 이토록 보고 싶었던 이는 자네가 처음일세.”
실제로도 황종관은 진무린을 만난 것이 무척이나 기쁘고 반가운 얼굴이었다.
“앉으라니까 그래. 그래야 나도 앉을 게 아닌가.”
“먼저 앉으십시오.”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먼저 앉음세.”
혼자 있다면 몰라도 무림맹주와 청강 진인을 상대로 태사의처럼 거대한 의자에 앉기는 곤란한 일이었다.
진무린이 시선을 주자 의미를 알아챈 총관이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마등을 기다린다는 깃발은 자네의 생각이었던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종관이 원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루주. 객이 이런 청을 해서 염치없으나 상황이 그러니 잠시 부탁하세. 자리를 비워주겠나?”
“맹주께서 들러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물러가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거든 연통줄을 당겨주세요.”
능숙하게 황종관을 상대한 원예가 백섭광과 시비들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숨을 두어 번 쉬고 났을 때였다.
황종관이 옅게 기운을 풀어냈다.
숨어 있는 사람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라 진무린은 잠자코 있었다.
“마등의 시체는 목을 잘랐네. 혹 그의 시체를 가져가는 일이 생길 것에 대비해 추종향을 발라놓았고, 그 외에도 정도맹 정보조직 비월의 일곱이 주변에 숨어 있다네.”
잔인한 방법이었지만, 한 번 일어났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려서 진무린은 오히려 든든했다.
“마등에게서 특별한 점은 없었나?”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진무린은 청강을 슬쩍 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겠지. 지금 강호의 현실이 누구를 믿기 어렵기도 하고. 그렇더라도 목을 잘라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일세.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강호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지겠지.”
진무린의 침묵을 이해한다는 투로 황종관은 말을 이었다.
“마등이 되살아난 것에는 마교와 혈교, 모산이 개입했을 것이라 짐작하네. 구대문파 중 하나이자, 명문에 손꼽히는 점창도 수상하고.”
불쑥 나온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암중 세력이나 개인이 마교와 혈교, 모산, 점창을 아울러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일세.”
황종관의 말에 섬전검법이 유출된 사실을 연결하면 은천문의 누군가도 암중세력과 결탁했다는 뜻이 된다.
진무린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 이유를 알고자 합니다.”
질문을 받은 황종관이 갑갑한 얼굴로 청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 대협. 맹주께서 구대문파 출신이 아니라 움직임에 어려운 점이 많다오. 이런 와중에 다른 것도 아닌 마등의 일로 구대문파의 하나인 점창을 핍박하기는 곤란하지요.”
분명 말뜻은 알아들었다.
그런데 어려운 사정을 왜 늘어놓는지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웠다.
“진인. 제가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진 대협께서 어리석다니? 그런 것이 아니라 미안한 마음에 말을 돌린 탓이외다.”
손을 저은 청강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다 해도 무력을 사용해 점창과 다투기는 곤란하지요. 그렇다고 강호에 드리운 그림자를 모른 척 지켜볼 수도 없고. 그래서 누군가는 그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리되었으니 길게 끌 게 뭐 있겠나. 마등만 해도 구대문파가 전전긍긍하던 인물일세. 진 대협이 나를 대신해 마교와 혈교, 모산, 그리고 나아가 점창과 같이 뒤가 수상한 곳을 조사해주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청강을 대신해 황종관이 시원하게 속을 드러냈다.
성격이 그런 모양이었다.
말을 마친 황종관은 품에서 두 개의 패를 꺼냈다.
“이것이 맹주를 상징하는 맹주금패이고, 이것은 황가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구패일세. 이 두 가지밖에 줄 게 없어 참으로 염치없으나 강호를 위해 나서주게.”
진무린은 황종관의 손에 올려진 패를 보았다.
이런 일을 바란 적 없다.
당장 사매를 찾는 것이 급하다.
무엇보다 진무린은 은천문의 사람이었다.
“저는 은천문에 속한 사람입니다. 문주의 결정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답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그 이유뿐인가?”
뭔가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황종관은 반가운 기색이었다.
“내 진인께 이미 부탁드려 놓았지. 자네의 뜻이 그렇다 하니 진인께서 은천문을 방문해 문주의 허락을 얻도록 하겠네.”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청강이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 대협. 염치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 대협 말고는 매달릴 곳이 없어 이리 나섰소. 노도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뻔뻔함을 용서해주시구려.”
“진인!”
진무린은 급히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청강의 팔을 붙들었다.
“어젯밤에 보았소. 진 대협이 아니었다면 노도는 물론이고, 함께 왔던 열 명의 제자들 역시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게요. 이 늙은 목숨이 아쉬울 게 무엇이 있겠소?”
진무린이 만류하는 데도 청강은 맞잡은 두 손을 풀지 않았다.
“다만, 처참하게 죽은 제자들의 억울함을 풀게 도와주고, 나아가 아직 피지 못한 이들이 맞을 강호를 생각해주시오.”
“진인. 이러지 마십시오.”
“진 대협. 노도가 문주를 찾아뵈리다. 혹여 문주께서 노도의 청을 받아준다면 부디 이 일을 거절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손을 내려놓으십시오.”
손을 내린 청강을 진무린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늙은 도사가 담은 미안함, 계면쩍음, 반가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진무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꿈에서 보았던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 대협. 미안하오.”
청강은 진무린의 손을 잡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천성이 뻔뻔하지 못한 그의 가슴에 미안한 감정이 계속 남아 있다는 증거쯤 되겠다.
“앉으십시오, 진인.”
진무린은 그를 앉게 한 뒤에 의자에 자리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오히려 간단했다.
“진인께서 문주의 허락을 얻는다면 말씀하신 바를 위해 움직이겠습니다.”
진무린은 어쩌면 당연하기 그지없는 답을 내놓았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
문주에게 달려가 허락받으면 진무린은 임무를 맡아야 해서 그렇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먼저 진무린을 찾아와 고개 숙이는 청강과 황종관이 고마웠다.
청강과 황종관이 보여주는 배려와 마음에 대한 감사였다.
“그럼 우리는 이만 일어날 테니 몸을 살피시오, 진 대협.”
“어디에 계십니까?”
“아무렴 맹주와 지붕에 있겠소?”
넌지시 농을 건네는 청강을 향해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맹에서 나온 분들이 계시고, 본파에서도 제자들이 더 왔으니 오늘은 맹주와 조용한 곳에서 술잔을 기울일 생각이라오.”
진무린을 안심시킨 청강이 황종관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자네를 따로 만나기는 어려울 테니 패는 지금 받아두게. 마등을 해결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도 전하고 남을 물건이니 부담 가질 것 없네.”
황종관은 떠맡기다시피 패를 건네주었다.
“단 한 번이긴 하지만 구대문파는 그 패로 내민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네. 오대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정도맹에 속한 삼백사십팔 개의 무관 또한 마찬가지지.”
“문주의 허락이 남았습니다.”
“말하지 않았나? 마등을 해결해준 것으로도 전하고 남을 물건이라고. 맹주라는 자리가 별것 없는데 이런 힘은 또 있지.”
넉넉하게 대꾸한 황종관이 표정을 바꾸고는 진무린을 들여다보았다.
“내일 점심이든, 저녁이든 함께 하세. 그러나 이 패를 내밀기 전까지 오늘 의논에 관해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말게. 결정적인 순간에 내밀어.”
지금 황종관은 그가 어떻게 무림맹주가 됐는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단단하고 강인한 눈빛이었다.
“암중 세력이 은밀하게 세를 불린다면 정도맹을 대표하는 나와 진인은 은천문과 자네에게 기댄 걸세.”
황종관의 말을 들으며 진무린은 간과했던 사실을 떠올렸고, 곧바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등골이 서늘했다.
“맹주께 청이 있습니다.”
“청? 뭔가?”
의외라는 투로 황종관이 물었고, 청강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문주께 허락을 받는 일까지 제게 맡겨주십시오.”
눈가를 좁혔던 황종관은 먼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진무린의 속을 짐작했는지, 아니면 문주의 허락을 받는 일까지 맡기는 것이 미안해서 그러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알았네. 그렇다면 그 어려움마저 자네에게 부탁함세.”
황종관의 답이었다.
그는 짐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그러냐, 괜찮다, 청강 진인이 더 나을지 모른다, 따위의 말 없이 진무린의 뜻을 받아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쉬게. 내일 보세.”
“진 대협. 몸을 충분히 살피시오. 그리고 고맙소.”
마지막까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청강에게 진무린은 보기 좋은 미소로 답했다.
“살펴 가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였다.
진무린은 창을 향해 움직여 횃불로 환히 밝힌 흑사련 호북지부를 바라보았다.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은천문의 배신자는 분명 진무린보다 서열이나 위치가 높을 게 분명했다.
이럴 때 정도맹의 임명을 받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명분을 손에 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매를 찾는 일에도 도움 되면 도움 됐지, 손해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문주의 허락인데.”
혼잣말을 뱉은 진무린은 픽 웃은 뒤에 흑사련의 호북지부를 노려보았다.
사매의 실종과 무공의 유출, 이 두 가지로도 허락을 받는 것은 차고 넘친다.
“정말 많겠네.”
“예?”
진무린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선 원예가 던진 질문이었다.
“뭐가 많다는 말씀이세요?”
굳이 죽을 놈들이 많다는 말을 해서 뭐하겠나.
원예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진무린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내공은?”
“아직 변화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살펴보는 게 어때? 내일부터 바쁠 것 같으니까.”
진무린은 원예에게 커다란 의자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