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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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16화
은천검제
제16화
아름답게 물든 산을 배경으로 듣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소식이었다.
“장 노대. 마등은 분명 목을 갈랐습니다. 암연과 정도맹마저 확인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진 대협. 마등의 시체를 분명 확인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목을 가른 자가 살아날 수 있다면 이 강호에 무공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말을 전한 장 노대 역시 질문을 던지는 진무린과 표정이 다르지 않았다.
“살아남은 공동의 제자가 증언하기로 목에 흉측한 선이 그어져 있었고, 시종일관 진 대협을 찾았다고 합니다.”
“마등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진 대협.”
시선을 돌린 진무린은 우양을 향해 뻗은 길을 보았다.
오래 살지 않았다.
강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데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정도맹이 시체를 확인한 터라 진 대협이 그의 목을 잘랐다는 점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해서 마교의 강시술과 혈교의 술법이 동원된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마등은 어디에 있습니까?”
“암연의 모든 눈과 귀가 모 소저를 찾는 일에 집중돼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의 소재를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등이 저를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차라리 제가 어디에 있는지 밝히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마등이 다시 나타났다면 당장 모려원을 찾아 나서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등을 찾아내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진무린은 퍼뜩 떠오른 생각을 꺼내 들었다.
“마등이 찾아올 수 있도록 제 위치를 노출할까 합니다.”
“본가에 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떠오르는 방법은 있으십니까?”
진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장소를 잘못 정하면 누군가 마등에게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장소는 고민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저는 그리 알고 본가에 진 대협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사매를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암연이 모두 매달리다시피 하고, 본가에서는 은천령마저 고민할 정도이니 조만간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천산에 있는 종 소협도 급히 원남으로 움직인 참입니다.”
‘은천령’이라는 말에 진무린은 반쯤 마음을 놓았다.
문주가 내리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 은천령이요, 그런 만큼 은천문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명이었다.
사제 종무헌이 움직였다는 소식도 위안이 되었다.
그나저나 마등이 살아 있다니.
“장 노대. 마등이 살아 있다면 청강 진인도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이미 정도맹을 통해서 소식을 전한 것으로 압니다. 이전에 불행한 일이 있어서 화산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무린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마등이 찾아온다면 다시 죽여서 끝내면 된다.
두 번 살아나면 세 번 죽이고, 백 번 살아나면 백한 번 죽여서라도 다시는 흑사련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죽은 자까지 이용하는지 찾아낼 각오도 생겼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장 노대께서도 몸을 살피십시오.”
인사를 마친 장 노대가 사라진 뒤에도 진무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의 방법을 고민할 때였다.
**
백면호리의 실제 성명은 강호에 알려진 바가 없다.
백 가지로 변하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이름도 헤아리기 어렵더니 결국 별호인 백면호리가 이름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 그도 이름이 있으니 바로 요삼추였다.
요삼추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고, 고모와 조카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살았다.
결국, 그는 나이 일곱에 아이를 사고파는 ‘광시’에 올랐다.
“이 아이는 나이가 어찌 되오?”
“보시오. 이제 다섯치고는 뼈대도 단단하고 근골이 잡혔으니 농사며 사냥에 적합한 아이올시다.”
방서량은 마주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곱쯤으로 보이는데?”
방서량이 혼잣말을 뱉어냈을 때였다.
뜻밖에도 아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글프게 웃은 방서량은 결국 가지고 있던 동전 열다섯 개를 탈탈 털어주고는 아이를 넘겨받았다.
“이름이 어찌 되는고?”
“요삼추라 불렀습니다.”
고 녀석,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몰랐더니 땟국물 안쪽에 총기를 바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본문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로 이제부터 너의 이름을 지(志)라 하겠다.”
그렇게 길은 걷는 도중에 요삼추의 이름은 요지가 되었다.
싸구려 화주와 삶은 돼지고기 한 근 값, 동전 열다섯 개의 요지는 사부를 잘 따랐다.
그때부터 변검도 익혔다.
한 번의 숨결과 흔들리는 손짓 하나에 얼굴이 바뀌는 일수백면의 묘리는 실로 깨우치기 어려운 수련이었다.
요지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산짐승을 능가하는 체력도 있었다.
세월은 흘러 요지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에 사부 방서량은 묵지현 유지의 생일연을 위해 주가장에 출타했다가, 그 길에서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초대받은 이가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권각을 휘둘렀는데 변검의 수법으로는 어쩌지 못한 탓이었다.
“너는 나의 복수에 나서지 말 것이니, 무인은 우리가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되는 부류이니라. 이후로 너는 마땅히 제자를 키우는 데 힘쓰되, 변검으로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 나를 위한 진정한 복수가 될 일이다.”
힘겨운 말을 끝으로 사부는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주가장에서 절명하지 않고 숨을 붙여 온 이유가 제자인 요지를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방서량이 명을 다했으니 확인할 길은 없었다.
홀로 남은 요지는 그 밤에 길을 나섰다.
그리고 사부를 살해한 일행의 노숙지를 찾아가 가면 제작에 사용하는 독극물로 모두 죽여 복수하였다.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 앞에서 죽은 무인을 발로 뒤집은 요지는 잔인한 세상을 항해 커다랗게 웃었다.
툭.
그리고 그때 죽은 자의 품에서 책자가 떨어져 요지의 눈에 띄었다. 그것이 바로 백면호리를 탄생시킨 두 번째 인연이었으니 죽은 무인이 지녔던 무공서였다.
지난날을 되새겼던 백면호리는 높다랗게 선 홍화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원래는 이런 곳에서 변검을 공연하며 살았어야 할 백면호리가 강호의 뛰어난 도둑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한 치 앞을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에이.”
상념을 털어낸 백면호리는 코 아래 두 줄기, 턱에 한 줄기의 염소수염을 붙인 얼굴로 홍화루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부루주의 청을 받아 온 길이니 그리 말을 전해주게.”
답을 한 백면호리는 신기한 듯 홍화루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누구시라 전할까요?”
“거참. 내가 그냥 돌아가면 자네 곤란해져. 알아? 어떻게? 그냥 가?”
뻔뻔하고 당당한 백면호리의 반응에 점소이가 물러갔고 잠시 후에 총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혹 백면호리라는 분이오?”
“이제야 눈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나오는군.”
총관 백섭광은 백면호리를 먼저 살폈다.
“죄송하나 백면호리라는 증거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이봐.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물건을 구하다가 죽을 뻔했다고. 자꾸 이러면 그냥 돌아가는 수가 있어.”
뻣뻣한 백면호리의 대꾸에 백섭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 불편하면 그리하시오.”
“뭐라?”
“가시겠다면 붙잡지 않겠다는 뜻이오. 그럼 살펴 가시구려.”
붙들기는커녕 백섭광은 아예 몸을 틀고 있었다.
“어허! 사람이 왜 그래. 세 번은 권하는 미덕 몰라?”
헛기침을 토해낸 백면호리는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친 뒤에 얼굴 앞을 슥 지나쳤다.
감탄을 토해내지는 않았지만 백섭광의 입술은 분명 “오!” 하는 모양새였다.
“한 번 더 보실까? 이게 또 보면 볼수록 빠져들거든.”
백면호리가 두 번째로 손을 움직이자 이번엔 몹시 중후한 중년이 백섭광을 향해 서 있었다.
“어떤가? 이 정도면 되겠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캬캬캬. 그럼 얼굴을 처음으로 돌림세.”
다시 오른손을 움직인 백면호리는 염소수염을 달았던 처음 얼굴로 돌아갔다.
“이왕이면 중후한 얼굴이 더 낫지 않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거든. 이렇게 평범하고 무난한 얼굴이어야 어디선가 본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기억하기 어렵지.”
백섭광을 따라 계단을 올라간 백면호리는 3층에 당도했다.
“루주. 백면호리를 모셨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스르륵 열렸는데 백면호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거대한 의자에 앉은 원예가 앉으라는 투로 손을 내밀었다.
“굳이 앉아 시간을 죽일 필요가 뭐가 있겠소? 나는 부탁받은 물건을 가져왔으니 대가로 약속한 백향초를 보여주시오.”
“백향초는 내일 도착해요.”
고개를 비튼 백면호리는 뒤에 선 백섭광을 살핀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그러시면 내일 다시 찾아뵙겠소.”
“편한 대로 하세요. 인사는 오늘로 됐으니 내일은 총관과 물건을 교환하면 될 거예요.”
“그럽시다.”
몸을 일으킨 백면호리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는데 앞을 막거나 물건을 강탈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거면 그냥 내일 오라고 하지.”
“어차피 루주를 한번은 봬야 하지 않소?”
“그야 루주의 이름으로 요청한 일이니 확인이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뒤탈이 있으니까.”
계단을 내려온 백면호리는 그 길로 입구를 향해 걸었다.
“내일 몇 시에 오면 되겠나?”
“점심나절에 물건을 가져온 표국이 출발하거든 오시오.”
“흠.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백면호리는 곧장 문밖으로 나섰다.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봐서는 얼굴을 바꾼 것이 분명했다.
**
다음 날 오전부터 감숙에서 시작된 마등의 출현 소식은 물결처럼 섬서, 하남, 호북, 호남을 때렸다.
마등의 부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흑사련의 재건을 의미하는 터였다.
부상이 심했다가 다시 일어나도 놀라운데 정도맹이 목이 잘려 죽었노라 발표까지 했던 마등이 살아서 나타났다.
등장과 동시에 공동의 제자 스물과 마주쳐 열여섯을 죽이니 그에 대한 소문은 걷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다음 날이었다.
이번에는 호북에서 시작된 소문이 마등의 출현에 대항하듯 거꾸로 하남, 섬서, 감숙으로 몰아쳤다.
마등의 목을 베었던 장본인이 흑사련의 호북지부 지붕에 올라섰는데 그는 심지어 ‘흑사련 호북지부’라는 명판을 쪼개 좌우로 늘어놓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등에 기다란 깃발을 세웠는데 거기에는 ‘待時面馬藤(대시면마등, 마등을 볼 날을 기다린다)’라는 글귀까지 써놓았다.
정도문파는 죽지 않았다!
마등의 목을 가른 영웅이 홀로 그를 기다린다!
소문을 들은 강호의 무인들은 열광했다.
피가 끓은 무인들이 호북지부로 꾸역꾸역 모여들었고, 영웅의 모습을 보겠다는 일반인마저 밀려들어 난데없이 호북의 상등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저기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는 분명 마등을 기다린다는 문구가 적혀 있고, 검을 앞에 세운 영웅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감숙이 있는 방향을 향해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좋으련만 어찌 된 일인지 흑사련의 호북지부를 비룡방의 방주와 소가주, 호법, 수하들, 그리고 마세호와 여섯 무인이 빙 둘러싼 채 출입을 막았다.
당연하게 전날 진무린이 방문해 도움을 요청한 까닭이었는데, 등평과 철비완은 오히려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잊지 않고 찾아준 점에 감사했다.
사명감 넘치는 태도로 호북지부를 지키던 비룡방의 일행에게 소름 돋을 정도로 뿌듯한 일이 벌어졌다.
“호오오오-!”
몰려든 무인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청량하게 하는 맑은 휘파람 소리가 호북의 상등을 요란하게 울린 뒤에 한 마리 새처럼 청강이 날아왔고, 이어 화산의 제자들 열 명이 주르륵 달려온 탓이었다.
“화산이다!”
“저분이 청강 진인이란 말인가!”
멀리서 지붕을 본 이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지르니 상등이 떠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울었다.
“진 대협.”
“진인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무슨 말씀이오? 이렇게라도 마등을 불러들이려는 진 대협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노도는 낯을 들기 어렵소.”
청강은 고맙고 미안한 얼굴이었다.
“화산이 마등에게 빚이 있으니 그가 나타난다면 노도에게 맡겨주시오, 진 대협.”
처참하게 당한 열두 명의 매화검수를 떠올린 청강의 눈은 오후의 햇빛만큼이나 강렬했다.
“마등이 오리라 보시오?”
“옵니다.”
“그렇다면 화산은 빚을 갚을 수 있겠구려.”
청강은 진무린을 따라 감숙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