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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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5화
은천검제
제55화
반 시진쯤 걸어 도착한 삼도방은 하남의 초입, 석관평의 한중간을 차지한 채 제법 성세가 있었다.
원래 돈이 있던 집안인가.
입구에 금박으로 써진 명판이 그렇거니와 넓은 연무장, 본채와 별채들, 그리고 본채의 뒤편으로 은근히 보이는 정원이 또한 그랬다.
“우선 별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자식 놈을 살펴주시는 일은 저녁을 든 이후에 부탁하겠네.”
진무린에게 말을 건넨 장삼도가 끝내 조응배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백향초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려운 눈치였다.
“별채로 가세. 이쪽일세.”
일행은 장삼도의 안내를 받으며 별채에 들었다.
좌우로 접어둔 문 안쪽 대청에 객들을 위한 탁자가 놓였고, 그 좌우로 두 개씩 방을 붙여놓은 형태였다.
“진 대협. 여기 잠시 앉게”
대청의 탁자를 권한 장삼도는 시비가 차를 내온 뒤에야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절맥을 살필 수 있겠나?”
그는 절맥을 살핀다는 말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내 솔직히 말함세. 나는 적수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네. 그래! 감출 게 무에 있겠나. 만약 모 소저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면 이미 피를 뿌리고 죽었을 것일세.”
말을 뱉어놓고 민망했는지 장삼도는 고개를 홱 돌려 잠시 별채 앞의 정원을 노려보았다.
“절맥이란 것이 워낙 치료가 어려운 질환 아닌가. 치료만 할 수 있다면 강호 전체에서 자네를 떠받들듯 모실 곳이 한두 곳이 아닐세.”
“치료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허어!”
모려원과 전중방의 이남일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장삼도는 감출 길 없는 답답한 심정을 탄식으로 뱉어냈다.
“차라리 자제분을 먼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말인가?”
장삼도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고, 전중방의 세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었는데 모려원만은 무언가 풀지 못한 숙제를 안아 든 사람처럼 덤덤했다.
“방법이 없다면 저녁을 먹기 전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모 소저. 괜찮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진맥 중에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지 몰라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모려원이 순순히 진무린의 청을 받았고,
“우리도 함께 가겠소.”
세 사람만 남는 것이 염려된 조응배가 뜻을 밝혔다.
“내 시비에게 준비하라 이르고 옴세.”
이왕 이렇게 됐는데 고민할 게 뭐 있으랴.
어쩌면 서둘러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것이 장삼도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리라.
장삼도는 곧바로 별채를 나섰다.
“진 대협. 만에 하나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중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증세라면 모 소저와 세 분은 먼저 길을 나서십시오.”
“저들이 우리를 그냥 두겠소?”
누구나 다급한 사정이야 있다.
삼도방은 자제의 안위, 전중방 삼 인은 백향초, 진무린에게는 눈앞의 사매를 지키는 일이 그렇다.
그 욕구들이 상충할 때 강호는 칼과 도로 해결한다.
“아까의 대결을 보시고도 그러십니까? 모 소저라면 세 분을 능히 삼도방에서 나서게 할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이래서 협이 필요한지 모른다.
강자가 모든 것을 움켜쥐지 않도록, 힘이 없는 이들도 자신의 몫을 빼앗기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되도록 말이다.
“염치없는 청을 계속 드려 죄송하오, 진 대협.”
조응배가 예의를 차린 직후였다.
별채로 장삼도와 몇몇 인물이 들어섰다.
“준비를 마쳤네, 진 대협.”
“그럼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지.”
근심과 기대가 뒤엉킨 장삼도는 몇 차례나 감사의 인사를 쏟아낸 뒤에 걸음을 옮겼다.
장삼도를 따라 움직인 일행이 본관을 지나 왼편으로 돌자 나란히 서 있는 듯한 두 개의 건물이 나왔다.
“이쪽일세.”
장삼도는 그중 오른쪽 건물로 들어서서 대청을 지나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어둑했다.
강한 향냄새가 훅 풍기는 방 안에는 벽에 머리를 둔 침상과 그 위에 누운 환자가 전부였다.
침통한 장삼도의 시선을 따라 진무린은 침상의 왼쪽으로 움직였다.
‘흠.’
자제의 상태는 예상보다 처참했다.
뼈와 거죽만 남았을 정도로 앙상한 데다 생기마저 거의 잃은 탓에 이미 죽었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진 대협.”
장삼도가 불러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든 시비 둘이 진무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무린은 먼저 손을 씻었다.
수건에 물기를 닦은 그가 침상의 왼편에 앉자 불안과 기대, 걱정과 염려가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으로 바뀌어 방 안에 있는 이들을 짓눌렀다.
진료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진무린은 둘러선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를 펼쳐야 하는데 워낙 환자의 기운이 약해 극히 옅게 조절해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최대한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진료에 방해된다는데 어쩌랴.
장삼도를 시작으로 하나둘 벽과 문에 가깝게 물러섰다.
모두 뒤로 물러난 뒤에 진무린은 환자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오른손 손바닥 위에 얹었다.
절맥이라 들었다.
음기가 주요 절맥을 막는 증상이니 다섯 곳이 막히면 오음절맥이요, 일곱 곳이 그리되면 칠음절맥, 아홉 곳이 막힌 것을 구음절맥이라 부른다.
등룡창천을 얻지 못했다면 함부로 달려들 일이 아니었다.
중단전이 여전히 막혔어도 마찬가지였고.
소수음공으로 등룡창천을 깨닫고 엄소동이 나타나 중단전을 풀어준 인연이 삼도방의 아들을 살리게 될 줄은 진무린조차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진무린은 소가주의 손을 올려놓은 오른손에 가느다랗게 기를 풀어냈다.
‘전과 달라!’
이때는 진무린도 사실 놀랐다.
가늘게 풀어낸 기운 주변의 모든 것이 보는 것처럼 뇌리에 전해지는 까닭이었다.
장삼도와 삼도방의 몇몇, 전중방의 셋, 모려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 하나가 모두 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어찌 보면 영웅의 풍모요, 의심하자면 목검을 들고 귀신을 쫓는다는 삿된 도사로도 보인다.
자식의 명이 달린 일이다.
의심이 버럭 생긴 눈빛을 하고도 장삼도는 마른침조차 주의해서 삼켰다.
그리고 그때쯤 모려원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지금껏 환자에게 집중됐던 진무린의 기운이 방안을 맴돌기 때문이었다.
비단 실처럼 가느다란 기운은 방 안에 있는 이들을 차례로 살핀 뒤에 전중방의 제자들에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다른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모려원이 알아챌 것만은 진무린도 짐작하리라.
뭐죠? 이건 또 왜 그런 거죠?
향 반 개가 탔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마침내 진무린이 소가주의 손을 내려놓았고, 그와 동시에 방안에 여러 개의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냉기와 온기가 급히 들어오지 않는 선에서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켜주십시오.”
“어떤가? 방법이 있는가?”
긴장된 표정의 장삼도가 급히 질문을 던졌고,
“자리를 옮겨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무린이 무거운 음성으로 대꾸를 내놓았다.
장삼도는 가슴을 진정하려는 듯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진 대협. 내 집무실로 가면 어떻겠나?”
“그렇게 하십시오.”
흔쾌히 답을 한 진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려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모 소저. 방주을 뵙고 갈 테니 별채에서 기다려주겠소?”
“그렇게 할게요.”
모려원의 답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총관이 객들을 별채로 모시게.”
장삼도가 지시를 내리면서 삼도방의 인물들과 모려원, 전중방의 세 사람이 방을 나섰다.
“진 대협은 나와 함께 가세.”
그런 뒤에 장삼도는 아들이 누워 있는 방을 나섰다.
대청을 지난 그는 바로 옆 건물로 향했다.
외관이 똑같더니 내부마저 아들이 누워 있던 건물과 같았다.
여러 개의 탁자가 놓인 대청을 지난 장삼도는 오른쪽의 방으로 향했다.
“이곳이 내 집무실일세.”
가장 안쪽에 책상이 놓였고, 그 앞의 좌우로 방문객을 위한 작은 탁자와 의자들이 줄줄이 있었다.
“앉게.”
진무린에게 자리를 권한 장삼도는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힘들었을 테니 차를 먼저 드세.”
“방주께서만 괜찮으시다면 바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속 타는 아비의 심정을 이리 이해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 염치없으나 급한 마음에 의견을 먼저 듣겠네.”
“위급한 상태이니 돌리지 않겠습니다. 진맥을 한 느낌으로는 방주의 자제는 무리한 영약을 복용했습니다. 맞습니까?”
검을 내리치듯 다부진 진무린의 질문이었다.
“흐음.”
옆구리를 찔린 것처럼 고통스러운 신음을 쏟아내는 장삼도의 반응으로 보아 진무린의 의견이 맞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맞네. 운이 닿았는지 백묘사의 내단이 생겨 그걸 먹였네. 그것까지 알아보았으니 더는 진 대협의 능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구먼. 그래, 아이를 살릴 방법이 있겠나?”
진무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백묘사의 내단만으로 저리 되지는 않습니다. 권을 사용하자니 자연 강맹한 내공이 필요했을 테고, 자제에게 분명 양기를 돋우는 다른 영약을 권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허어! 마치 지난 일을 다 본 듯하네! 그 또한 틀림없이 맞네. 오향구미초를 그 뒤에 바로 권했지.”
원인은 분명하게 나왔다.
“영약에 눌린 음기가 절맥을 파고들었습니다. 음기가 이미 맥을 막아버린 상태여서 치료를 하게 된다면 자제는 내공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얼굴을 일그러트렸던 장삼도가 잠시 숨을 고른 뒤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살릴 수는 있겠나?”
“모 소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삼도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모 소저에게 청을 하지.”
“모 소저에게는 제가 직접 부탁하겠습니다.”
“진 대협이 그렇게까지 나서준다면 내 더 바랄 것이 없네.”
장삼도는 아예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치료는 언제쯤으로 예정하나?”
“환자의 상태가 위급하여 여유를 두기 어렵습니다. 우선 모 소저와 의논하고, 동의한다면 금일 술시쯤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 장 모가 자식의 구명지은을 받았으니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작은 재주가 연이 닿아 도움을 드렸을 뿐, 아직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절맥의 원인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치료할 방도마저 있으니 그것이 어찌 작은 재주이겠나?”
두꺼운 손으로 포권을 취한 장삼도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모 소저를 만나볼까 합니다.”
“아차! 진 대협이 피곤할 텐데 시간을 너무 끌었네.”
함께 일어섰다.
그런 뒤에 장삼도는 별채 앞까지 움직여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시한 뒤에야 몸을 돌렸다.
별채의 마당에 들어선 진무린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정원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밤에 핀 꽃의 향을 즐기듯 꽃송이를 매만진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
빤한 별채의 마당이었다.
장삼도가 떠들며 요란스레 인사를 전했는데 그걸 안에서 모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진무린이 별채의 대청에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있던 네 사람이 궁금한 시선으로 몸을 일으켰다.
“절맥이 맞습니다.”
백향초를 염려하는 것처럼 전중방의 세 사람은 침울한 표정이었고, 모려원은 그렇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치료법이 있으니 세 분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 다행입니다. 불안한 심정마저 배려해 준 아량에 감사하오, 진 대협.”
“그렇게 하면 내가 불편합니다.”
포권을 취하는 조응배와 유요의 팔을 받친 진무린이 고개를 돌렸다.
“모 소저. 잠시 정원에서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전중방의 세 사람을 살핀 모려원이 “좋아요.” 하는 답을 내놓았다.
진무린은 모려원과 함께 대청을 나서 장삼도가 바라보던 정원의 꽃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기 직전의 정원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사실은…….”
진무린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모려원에게 들려주었다.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던 사매였다.
사매의 총기 넘치는 눈을 마주할 이 시간을 얼마나 바랐던가.
반갑고, 기쁜 심정을 감추기 위해 진무린은 최대한 덤덤한 투로 말을 전했다.
“그래서 소저의 도움이 필요하오.”
“뭘 도와드리면 되죠?”
“내가 진기를 넣으면 성문부터 기해까지 검으로 점혈을 부탁하오. 그런 뒤에 모 소저가 안중을 통해 진기를 넣어주면 내가 뒤쪽에서 점혈하고자 합니다. 도와주겠소?”
“점혈에 얼마의 힘을 가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기가 흐르도록 맥을 뚫는 일이니 세 푼 정도의 힘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려원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인데 하필 석양마저 짙었다.
“진 대협.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우리가 정말 이전에 본 적이 없나요?”
붉은 노을을 받아 빛나는 모려원의 눈을 본 진무린은 그만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다.
“뭔가를 알고 계신 듯해요. 어떤 말이라도 좋아요. 진 대협이 아는 바를 솔직하게 알려주세요.”
저리 빛나는 사매의 눈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