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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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4화
은천검제
제54화
뭐가 있기에?
모려원과 전중방의 세 사람이 장삼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 다가온 이는 진무린이었다.
“후배는 어쩐 일인가?”
“가는 길에 본의 아니게 행사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방주와 인사를 나누기 전에 전중방 일행들과도 인연을 맺었으니 잠시 지켜볼까 합니다.”
객잔에서 느낀 기운도 그렇고, 여기에서 진무린마저 적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장삼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전중방의 제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부를 생각하는 기특한 마음은 칭찬해주마. 그러나 백향초가 수십 년에 하나 나오는 약초인데 경각에 달린 목숨은 여럿이니 나 역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
“아무리 말에 꿀을 바른다 해도 우리에게서 약초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오.”
“너희가 그 약초를 지녔다는 소문이 이미 돌았다. 우리가 아니어도 너희는 귀물을 지키기 어려워.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다른 이들이 취하기 전에 내가 손을 쓸 수밖에 없다.”
덩치가 커다란 장삼도가 전중방의 세 사람을 설득하며 나섰다. 점잖을 떤다고 힘으로 약초를 빼앗는 모습이 달라질 것은 없으니 어쩌면 우스운 모습이었다.
“강한 자가 소지하면 된다는 뜻인가요?”
“소저는 누군가?”
“모려원이에요.”
“전중방의 제자인가?”
“사문은 모르겠어요.”
이런 엉뚱한 대꾸가 있을까.
장삼도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모려원을 노려보았다.
객잔에서 불쑥 고수의 기운을 풍기는 진무린을 보더니 지금은 전중방의 힘없는 닭들 사이에서 봉황이 튀어나온 형상이었다.
장삼도는 슬쩍 시선을 던져 하북삼괴를 살폈다.
거칠기 그지없는 세 사람이 함부로 나서지 못할 정도로 모려원이 풀어낸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이보게, 소저. 저들의 사부는 이미 살 만큼 산 자가 아니던가. 우리 아들은 이제 스물일세.”
“뭐라 하셔도 소지한 이들이 거절하는 것을 계속 요구할 수는 없어요.”
“그런가?”
“그래요.”
모려원의 단호한 대꾸를 들은 장삼도의 눈썹 끝이 마침내 위로 치켜 올랐다.
“굳이 피를 봐야겠다면 어쩔 수 없지. 후배는 어쩔 텐가?”
“피할 수만은 없지요.”
“흐허허허.”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투로 장삼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후배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으니 세 수를 양보함세. 혹여 오늘 이 장 모가 약초를 손에 넣거든, 반드시 전중방을 지원하겠네.”
장삼도는 먼저 장포의 앞자락을 잡아 허리띠에 꽂아 넣었다. 커다란 덩치와 그의 주먹에 울뚝불뚝 붙어있는 굳은살로 봐서 권법을 익힌 모양이었다.
‘사매에게 세 수를 양보하면 그 전에 목이 떨어질 텐데?’
검을 꺼내 드는 모려원을 보며 진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고어가 새겨진 은천문의 검이 아니라 흔히 보이는 철검이었다.
검을 잃어버린 데다, 이런 곳에서 모려원이 애꿎은 피를 보게 된다면 은천문의 장로 두 사람은 또다시 은천령을 주장할 명분을 얻는다.
팽팽한 긴장이 펼쳐지는 순간에 진무린은 마음을 굳혔다.
“시작함세.”
그 직후에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장삼도의 기운이 바뀌었다.
진무린이 느끼기에 장삼도는 강호에 흔한 무인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잘하면 마세호보다 윗길인데 그 실력에 이름을 딴 방파를 만들었으니 삼도방의 수준 역시 능히 짐작할 만했다.
분명 시작한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지켜보는 이들 사이로 바람이 일어 관도에 널린 흙먼지가 쓸려가도록 두 사람은 움직임이 없었다.
세 수를 양보한다고 했으니 모려원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사람은 강호에 나서면 안 된다.
삶과 죽음을 지척에 두고 섰다면 더더욱 더.
지금 모려원은 한 수 아래인 장삼도에게 기회를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결정하세요.
망신을 당하고 물러날지, 이쯤에서 정리할지.
모려원의 태도는 분명했는데,
“시작하게.”
장삼도는 삼도방 방주의 체면을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약초를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조심하세요!”
쉐에엑!
모려원은 먼저 손바닥을 트는 동작으로 장삼도의 왼쪽 상단을 향해 검을 그어 올렸다.
부응!
장삼도가 모려원의 중단을 노린 주먹을 날려 검을 뿌리치는 순간이었다.
모려원은 오른발을 뒤로 내차며 검을 찔러넣었다.
부-우웅!
그나마 경험과 연륜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둬들인 주먹으로 앞을 막은 장삼도는 다급하게 몸을 왼편으로 틀어 검을 피했다.
여기까지가 수법 하나!
쉑! 쉑쉑쉑!
오른발을 당긴 모려원은 학이 고개를 내미는 자세로 장삼도의 하체를 향해 네 번의 검을 뿌렸다.
붕! 붕붕붕!
그에 맞서 장삼도의 양 주먹이 바삐 허공을 갈랐고, 세 걸음이나 물러났는데 왼쪽 무릎의 옷자락이 갈라져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 수법!
“마지막 수예요!”
모려원이 외쳤고, 장삼도가 이를 악물었다.
앞의 두 수에서 오히려 모려원이 양보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휘리릭! 쉐엑!
모려원은 손목을 비틀어 검을 흔들었다가 그대로 찔러넣었다. 좌우로 움직이던 뱀이 급히 달려드는 형상으로 강호에 흔한 초식이었다.
“이크!”
부우-웅!
장삼도는 팔을 커다랗게 밖으로 휘젓고는 상체를 비틀었다.
그런 뒤에 말도 안 되는 동작으로 모려원에게 달려들었다.
죽일 테면 죽여라.
나는 포기 못 한다.
억지를 부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매는 물러나리라.
저리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이의 목을 자르는 것은 종무헌이나 가능한 일이지 모려원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목숨을 버리듯 달려드는 장삼도를 피해 모려원은 한 걸음을 물러났다.
부우-웅!
승기를 잡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장삼도의 양 주먹이 모려원이 빠져나갈 퇴로를 완벽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연비횡!’
퍼러러러러럭!
진무린의 마음을 읽었을까?
허공에 눕다시피 떠오른 모려원이 빠르게 몸을 뒤틀었고, 그와 동시에 깃발이 날리는 듯한 소리가 퍼졌다.
사람은 날개가 없으니 뛰어올랐으면 떨어진다.
부아-앙!
장삼도의 주먹은 정확하게 모려원이 내려설 곳을 향해 날았다.
‘건곤세!’
진무린이 초식명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파학!
검을 세차게 휘두른 모려원은 그 힘을 이용해 검 끝으로 바닥을 찍으며 다시 몸을 뒤틀었다.
날아오른 모려원이 제비처럼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휘릿! 휘리리리릿!
그녀의 검이 요란하게 울었다.
‘무공을 기억하는구나!’
모려원이 그토록 매달렸던 초식, 춘설난무였다.
봄눈이 사방에 흩날리듯 장삼도의 주변을 모려원의 검광이 온통 뒤덮었고, 곧바로 거부하기 어려운 침묵이 흘렀다.
동귀어진의 초식 따위 먹히지 않는다.
만약 장삼도가 또 달려든다면 온몸을 난자당해 쓰러지는 일 외에는 없었다.
의지를 분명하게 밝힌 모려원은 바닥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차분하게 검을 중단에 들었고, 패배를 익히 알게 된 장삼도는 멍한 얼굴이었다.
진무린은 장삼도의 눈을 먼저 보았다.
중단전에 내공이 박혀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진무린을 보았다면 아버지 진용선은 어떻게 했을까.
진무린은 이어 슬쩍 전중방의 세 사람을 눈에 담았다.
‘이것들이?’
진무린은 그들의 눈에 피어난 아쉬움과 그 반대로 만족함을 분명하게 읽었다.
무사히 돌아가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눈빛이야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피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눈빛이었다.
‘너희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마음을 굳힌 진무린은 기운을 일으켜 장삼도만이 느낄 수 있게 전했다.
선인의 경지에서 기운을 다독여주었으니 장삼도는 마치 시원한 폭포수 아래에 선 것처럼 청량한 느낌을 얻었으리라.
이 정도로 고수였나?
퍼뜩 살아나 진무린을 향한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제분의 병명이 어찌 됩니까?”
“절맥일세.”
“자제분을 보겠습니다.”
“방법이 있나? 후배에게 방법이 있는가?”
장삼도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진무린은 고개를 돌렸다.
“모 소저. 삼도방에 잠시 들렀다 가면 어떻겠습니까?”
“왜 그래야 하죠?”
“방주의 자제를 살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보기에 모 소저는 전중방의 사람이 아닌데 굳이 얽매일 필요 있습니까?”
느닷없는 제안인 만큼 모려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 분과 전중방으로 향할 것을 약속했어요.”
“이보게. 이미 백향초에 관한 소문이 돌아서 고수들이 몰려오고 있어. 진 대협의 뜻에 따라 본 방에 먼저 들르세. 혹여 차도가 있다면, 내가 자네들과 함께 전중방까지 함께 하겠네.”
그사이 다가온 장삼도는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후배에서 진 대협으로 호칭까지 바꾼 장삼도가 모려원과 전중방의 세 사람을 설득하며 나섰다.
“동행 분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럼 의논한 뒤에 답을 주시오, 모 소저.”
모려원에게 대꾸한 진무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전중방의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생각을 감춘 진무린은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분위기에 눌린 것처럼 조응배가 나섰다.
그러나 그는 모려원이 아니라 일을 비튼 진무린에게 입을 열었다.
“진 대협. 절맥을 치료할 방도가 있습니까? 지금껏 만년설삼이나 백향초 등을 이용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맨손으로 완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어서 그렇습니다.”
“수십 년에 한 번씩 백향초가 나온다 들었습니다. 치료가 어렵다면 약초를 구할 시간이라도 벌어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진무린의 답이 서운했던 눈치였다. 그러나 장삼도는 이거라도 어디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 대협이 살피시는 일에 굳이 우리 네 사람까지 함께 삼도방에 들러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붙들리고 싶지 않은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난 조응배의 대꾸였다.
“치료 중에 모 소저의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방주의 말씀대로 백향초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삼도방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조 대협이 백향초를 필요로 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적당한 사유를 말한 진무린은 말끝에 질문을 달았다.
“방주가 주화입마의 초입이라 들었는데 맞는가?”
역시 마음 급한 장삼도가 적절하게 끼어들었고,
“그렇습니다.”
조응배가 마지못해 답을 내놓았다.
“주화입마는 약초로만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공의 고수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답이 곤궁한 조응배가 볼을 씰룩였다.
사매인 모려원에게 이미 도움을 청해놨겠지.
혹여 다른 핑계가 나올까 진무린은 먼저 입을 열었다.
“조 대협. 괜찮다면 삼도방의 자제를 본 뒤에 나도 전중방으로 가는 길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진 대협께서 본방의 방주를 도와주시리라 믿고 함께 가겠습니다.”
마침내 조응배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한 걸음 물러났다.
“흐허허허! 그렇다면 이제 출발하는 일만 남지 않았나!”
장삼도는 급히 소매를 떨쳐 길을 열었다.
“너희 둘은 먼저 가서 진 대협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라 전해라.”
방도 둘이 씩씩하게 답을 하고는 앞서 달린 다음이었다.
“그런데 진 대협의 사문이 어찌 되는가?”
걸음을 옮기며 건넨 그의 질문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사부께서 은거하신 터라 감히 제자가 입에 담지 못합니다.”
“흐음!”
무슨 상상을 했는지 장삼도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흡족함을 표시했다. 슬쩍 살피기로는 전대나 전전대 고인의 후예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일행은 그렇게 삼도방을 향해 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보잘것없는 실력이었다.
그런데도 근방에서는 위세를 떨치는지 가는 길에서 마주친 이들이 장삼도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토록 찾던 사매와 함께 걷는 길이었다.
저 멀리 산 위에서 사제 종무헌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테고.
사제가 이 장소에 있었다면?
슬쩍 시선을 든 진무린은 산을 향해 옅게 웃었다.
“좋은 일이 있는가?”
진무린의 웃음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혹여 좋은 소식이라도 들을까 하는 얼굴로 장삼도가 질문을 건넸다.
“자칫 악연이 될 뻔한 일이 선연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웃었습니다.”
“진 대협은 참으로 협을 아는 무인이로구먼!”
듣기 좋은 대화였다.
그런데 두 걸음쯤 뒤에 걷는 모려원의 호흡이 거칠게 변하는 것을 진무린은 분명하게 느꼈다.
진무린을 지켜보다가 감정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진무린은 팔을 들어 등에 멘 검자루를 잡았다.
누가 봐도 불편한 검의 위치를 바꾸는 모습이었는데,
철컥. 철컥.
검이 소리를 낸 이후 모려원의 호흡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은천문에서 긴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나누었던 일인데 기억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진무린은 또 가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