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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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3화
은천검제
제53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었다.
산 아래로 펼쳐진 넓은 초지에 피어난 잡목과 풀들은 누렇게 변해 바람이 매만지는 대로 흔들렸다.
이틀을 꼬박 달린 진무린은 석관평을 앞에 둔 작은 산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진무린을 본 종무헌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대사형!”
“사제가 고생이 많았다. 식사는?”
“건량이 있고, 때때로 암연이 가져다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초지 사이로 구불구불 난 길의 저 끝에서 네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상등에서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이틀.”
“대사형, 혹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산 아래를 바라보던 진무린은 시선을 들었다.
“대사형이 묵룡심법을 대성하실 때처럼 뭔가 달라졌는데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아니시면 죄송합니다.”
뒤통수를 매만지는 종무헌을 보며 진무린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은천문에서 가장 거칠다는 종무헌이 진무린과 모려원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당과를 몰래 가져오곤 하니 이 사실을 누가 믿겠나.
“경계를 보기는 했는데 아직 손에 넣지는 못한 모양이다.”
“대사형은 분명 이루실 것입니다. 소제가 대사형의 소성을 축하드립니다.”
“우리끼리 그럴 것 없어.”
대강의 인사를 마친 뒤에 진무린은 종무헌과 함께 산 위의 바위에 자리 잡았다.
“문주께서 지켜보기만 하셨다던데?”
“소제에게도 정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말라 하셨습니다.”
임운령이라면 저깟 전중방의 세 사람쯤 얌전하게 앉혀두고 모려원에게 사정 이야기를 할 실력쯤 갖추었다.
종무헌이라면 눈매 한 번 부릅뜬 것으로 제압할지 모른다.
그런데 왜 지켜보기만 하다 은천문으로 돌아갔고, 종무헌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을까.
‘너에게 맡긴다.’
임운령은 전중방의 세 사람에게서 무언가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으리라.
문주가 아닌 제자가 나서기를 바랐을 테고, 성질 급한 종무헌이 전중방 세 사람의 목을 자를 것을 염려했던 게 분명했다.
문주 임운령은 저 셋의 뒤에 무언가 있다고 보았을까.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객잔이 있다고 들었다.”
“이 산 앞을 돌아가면 나옵니다. 크지 않으나 근처에 다른 객잔이 없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입니다.”
“오래 끌 것 없다. 먼저 내가 객잔에 들러서 사매를 확인하고, 그에 맞춰 적당한 방법을 고민하기로 하자.”
“대사형. 소제가 가서 저 세 사람을 상대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쩌려고?”
“대사형이 사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다른 곳에 데려갈까 합니다.”
“기억이 없다는 사매가 그걸 지켜보고 있겠냐?”
뭔가를 말하려던 종무헌이 입을 다물었다.
여차하면 모려원이 말리기 전에 셋의 목을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의견이 분명했다.
“저 세 사람의 행동에 수상한 점이 있었어?”
“무공은 알 길이 없는데 사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 사이 모려원과 전중방의 이남일녀가 바로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객잔에 들면 그때 만나볼 참이다.”
“소제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 둘이 모두 나서면 전중방의 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잠시 몸을 숨기는 게 좋겠다.”
기운도 그렇지만, 당장에라도 검을 빼 들 것처럼 매서운 종무헌의 인상도 걸렸다.
마음을 굳힌 진무린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행방불명되었다던 사매였다.
‘오랜만이다, 사매.’
먼저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
진무린은 관도를 따라 걸었다.
녹색의 하늘은 부풀어 오른 구름을 안았고, 이따금 불어온 바람이 옷자락을 휘젓는 점심나절이었다.
좀 더 걸은 뒤였다.
멀리 두 갈래 길 사이에 버드나무가 보였고, 그 모든 것의 배경처럼 객잔이 눈에 들어왔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탓에 명판은 객잔 앞에 도착해서야 보였다.
사매가 저 객잔 안에 있었다.
은천문 암연이 혼신의 노력을 다했어도 찾지 못해 속을 까맣게 태웠던 사매가 말이다.
문 앞에 선 진무린은 객잔의 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사매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전중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의아한 다른 셋의 기운도 느꼈다.
잠시 서 있던 진무린은 익숙한 듯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쇼!”
자리에서 일어난 점소이가 진무린을 맞았고, 이어 안쪽의 자리로 안내했다.
반월검과 같은 독특한 무기를 기대어 둔 남자 둘이 문을 향해 앉았고, 모려원과 전중방의 여제자는 등을 보이고 앉았다.
저 모습을 어찌 잊을까.
진무린이 안으로 걸어가며 탁자를 지나는 순간, 마침내 두 명의 여인이 진무린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곱게 넘긴 머리칼을 정수리 뒤에서 묶은 모려원은 무탈해 보였다.
흑요석을 넣은 듯 반짝이는 눈과 그 안에 담긴 총기, 화폭에서 뛰어나온 것처럼 둥근 이마와 고운 눈썹, 단아한 입술도 그대로였다.
사매와 시선이 마주친 진무린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세상이 멈춘 것처럼 객잔은 침묵에 휩싸였다.
장 노대의 전언대로였다.
“혹시 뵌 적이 있나요?”
탁자에 앉은 모려원은 진무린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의아한 눈빛이었다.
“소저가 그리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저 역시 어디에선가 뵌 것 같아 걸음을 멈추었는데 그리 말씀해 주지 않았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결례를 범할 뻔했습니다.”
모려원의 질문에 답한 진무린은 사매와 함께 앉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무린이라 합니다. 사정이 있어 사문을 밝히지 못합니다.”
“진 대협이시군요. 섬서의 전중방 출신으로 조응배라 합니다. 이쪽은 내 사제 유요, 사매인 여랑화, 그리고 일행인 모려원 소저요.”
자리에서 일어선 조응배가 소개할 때마다 진무린은 일일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나눴다.
사매와 포권으로 인사를 나누다니.
확실히 모려원의 총기 어린 눈은 진무린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인사를 나눴으니 합석을 권하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우리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양해해주시오.”
“충분히 이해합니다. 편안하게 자리하십시오.”
넉넉하게 대꾸한 진무린은 점소이가 권하는 창가의 안쪽 탁자로 향했다.
“포자와 마라황과, 술을 주게.”
“바로 올리겠습니다!”
주문을 건넨 진무린이 탁자에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모 소저. 진정 아는 분입니까?”
“그게 어디라고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운데 분명 아는 분이란 확신이 들어요.”
조응배가 상체를 기울여 건넨 질문에 모려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을 건넸다.
들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에서 주고받은 대화였겠지.
사매와 함께 있는 이들의 수준이 그럴 테니까.
딱히 결례되는 대화도 아니고.
“이상하네요. 용과 봉황이라고 할 만한 두 분이 어떻게 서로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
“글쎄.”
모려원에게 속삭인 전중방의 여제자 여랑화가 진무린을 넘겨보았다.
진무린을 향한 관심이 불편했을까.
“배도 채웠으니 일어납시다.”
조응배가 권유했고, 그에 따라 나머지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진 대협. 중한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리다.”
“조심히 가십시오.”
진무린과 인사한 전중방 일행이 객잔을 나선 뒤였다.
가장 뒤에서 걷던 모려원이 문을 붙들었다가 확인하는 것처럼 진무린을 보았다.
‘우리 정말 만난 적 없나요?’
그녀의 눈이 묻고 있었다.
답을 할 수도, 어떤 눈짓을 줄 수도 없었다.
‘사매. 강호 전체가 덤비든, 은천령이 내려오던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니 지금처럼 무탈하게만 있어 다오.’
기다리는 이들을 의식한 모려원이 문을 나선 뒤였다.
점소이가 봉인을 뜯지 않은 작은 단지를 내려놓았다.
진무린은 곧바로 항아리의 봉인을 뜯어낸 뒤에 잔을 채웠다.
오래 달린 뒤에는 목이 타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갈증이 더 심하다.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운데 아는 사람이란 확신이 든다라.”
혼잣말을 흘린 진무린은 무거운 얼굴로 잔을 들었다.
이쪽을 힐끔거리던 점소이가 마라황과와 포자를 가져왔으나 진무린은 말없이 잔을 채웠다.
다 비슷하겠지?
세속의 더러움을 피했다는 은천문에서조차 음모와 모략, 세력이 생기는 것을 보면, 결국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
모려원과 함께한다는 몰락한 전중방의 제자 셋처럼.
상념과 함께 항아리를 기울이던 진무린은 슬쩍 문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시선을 주었던 점소이가 별 싱거운 일도 다 있다는 투로 주방을 향해 수다를 잇고, 진무린이 두 번째 잔을 넘겼을 때였다.
콰앙!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흉측한 갈고리를 품은 서른 후반의 남자가 중앙, 왼편에 도를 어깨에 걸친 서른 중반, 그리고 도를 아래로 내린 서른 초반의 남자가 오른쪽에 들어섰다.
갈고리 남자의 턱에서 목까지 이어진 흉터, 모두 합쳐 세 명, 더러운 인상, 더 볼 것 없이 ‘하북삼괴’라는 증명이었다.
하북삼괴는 먼저 점소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여기 이남이녀가 들어오지 않았나?”
“그분들이라면 조금 전에 나서셨습니다.”
“크흠!”
주눅 든 점소이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하북삼괴가 다시 진무린에게 눈을 돌렸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종무헌이 있었다면 저 거친 말을 한 벌로 벌써 바닥에 쓰러져 있을 게다.
“네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여유를 부리느냐!”
그놈의 급한 성격들 하고는.
공연히 피를 보기도 싫고, 하수에게 망신당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어서 진무린은 기운을 슬쩍 흘려보냈다.
게다가 다섯 남았다.
여유 있는 태도가 걸렸을까? 아니면 기운을 느꼈을까?
하북삼괴의 우두머리 고일전이 진무린과 등에 멘 검을 살폈다. 그래도 고수를 알아봐 명줄을 잇는 재주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셋 남았다.
“귀하는 뉘시오?”
여기까지.
진무린은 하북삼괴를 건너 그 뒤를 넘겨보았다.
뭐가 있어? 뭔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진무린에게 둔 채 하북삼괴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반쯤 뒤로 돌렸을 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밤송이 수염에 덩치가 대단한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중년인을 본 하북삼괴가 분분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우리가 찾는 아이들 소식은 어찌 되었느냐?”
“조금 전에 이곳에서 나섰다 하니 빠르게 움직이면 바로 볼 수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다행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중년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무린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등에 멘 검을 보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만만치 않지?
펼쳐놓은 기운을 회수하지 않은 진무린을 향해 남자가 눈가를 좁혔다.
“후배는 누군가?”
질문이 건너와서 진무린은 몸을 일으켜 가볍게 손을 마주 잡았다.
“진무린이라 합니다.”
“혹시 별호가 있던가?”
“강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흐음.”
중년의 남자가 신음처럼 숨을 내쉬었다.
호북 상등의 흑사련 지부에서 일어난 일이 온 강호에 물결처럼 떠돌았을 텐데도 진무린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것 같아서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삼도방의 방주 장삼도일세. 혹여 지나는 길이 있거든 본 방에 한 번 들리게.”
말을 마친 장삼도가 몸을 돌렸고, 불편한 눈빛을 잊지 않은 하북삼괴가 그 뒤를 따랐다.
‘백향초가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이걸 노렸던 거냐?’
느낀 바 실력으로 봐서 저들은 사매를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니 백향초를 노리고 달려간 삼도방의 방주와 바깥에 있던 수하들, 하북삼괴는 모려원의 검에 피를 뿌릴 것이 분명했다.
진무린은 열 냥이 꿰인 동전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에 탁자에서 일어났다.
당장은 엉뚱한 피가 흐르는 일을 막는 것이 급했다.
**
강호의 삶이 원래 이렇다.
“멈춰라!”
외마디 고함과 함께 모려원과 전중방의 세 사람 뒤에서 장삼도와 하북삼괴, 그리고 사십여 명의 삼도방 방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려원은 몰라도 전중방의 세 사람은 뿌리치기 어려운 경공이었다.
거리는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장삼도와 하북삼괴가 달려와 길을 막은 직후에 우르르 삼도방의 방도들이 몰려와 모려원 일행을 둘러쌌다.
“나는 삼도방의 방주인 장삼도라 한다.”
흙먼지를 털어내듯 소매를 떨친 장삼도가 꼬장꼬장한 눈으로 전중방의 세 사람과 모려원을 살폈다.
“전중방의 아이들이냐?”
대꾸가 없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답과 같았다.
“너희가 지닌 백향초를 다오. 그리하면 내 이름을 걸고 너희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후에 전중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마.”
“불가하오!”
“닥쳐라! 감히 어느 분 앞이라고……!”
하북삼괴의 고함을 장삼도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런 뒤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