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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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2화
은천검제
제52화
엄소동을 만났던 진무린은 곧장 맹주의 거처로 돌아갔다.
고작 한 시진 정도 걸린 외출이었다. 그런데 들어선 맹주의 거처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슨 일입니까?”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을 동원해 백면호리를 추적할 준비 중일세.”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급해 보이는 추적이었다.
“확신할 만한 증거가 나왔습니까?”
“현장을 확인한 보우 대사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어렵네. 흉수를 밝히기는커녕, 시신마저 잃었으니 정도맹의 입장에서도 그 정도의 노력은 해주어야겠지.”
“맹주. 그와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지금이어야 하나?”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황종관이 정원의 작은 가산을 향해 움직였다.
“무슨 말인가?”
“백면호리는 범인이 아닙니다.”
정원과 대청 쪽을 힐끔 보았던 황종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시선을 가져왔다.
“홍화루에 다녀온 길입니다. 백면호리는 어제 약시에서 약재를 구입하던 참이었고, 조만간 연락이 닿으면 확실하게 그의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흐음.”
황종관의 첫 번째 답은 속을 알 길 없는 깊은 한숨이었다.
“보우 대사에게서 언질이 있었네. 소림과 무당에게 수색을 맡기고 정도맹으로 돌아간다면 부맹주와 약연, 자경을 지하 뇌옥에 가두는 것에 동의하겠다는 내용이지.”
“보우 대사가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한 이유를 짐작하십니까?”
“이유가 필요한가? 부맹주와 약연, 자경을 지하 뇌옥에 가두는 것으로 청강 진인의 억울함을 푸는 일인데?”
“혈교와 풍령관은 어쩌실 참입니까?”
“그 두 곳의 연관성을 조사하고, 어젯밤 일의 흉수를 찾은 일은 반드시 진행할 생각이네.”
“마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황종관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 생각도 했었지. 그런데 마등처럼 되살리기 위해 시신을 가져갔다면 살아난 사태와 제자들이 흉수를 밝히게 될 텐데 그들이 굳이 불리할 일을 할 리가 있겠나?”
“다른 계획이 있을지 모릅니다.”
갑갑한 모양이었다.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던 황종관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만약 백면호리가 결백하다면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고 억울함을 주장하면 되는 일일세.”
“아미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진무린의 질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황종관의 눈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모든 것을 자네가 결정하려 하지 말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바라는 대로 비룡방의 호법을 지도했고, 오늘까지 의견을 존중했어. 이번 일은 절차대로, 정황대로, 그리고 정도맹의 방식대로 처리하겠다는 말일세.”
갑자기 꽉 막힌 벽을 대하는 것처럼 갑갑해서 진무린은 잠시 숨을 골랐다. 급하게 대꾸하다가는 자칫 감정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수색을 맡기고 돌아가는 조건이라 하셨습니다. 출발은 언제로 생각하십니까?”
“점심을 든 이후에 출발할 생각이네.”
진무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이 백면호리를 추적하고 나면, 나와 정도맹 소속 인원 전부, 소림과 무당의 장로들이 함께 출발할까 하네.”
“왜 이렇게 서두르십니까?”
“원래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던 일이 아닌가. 정도맹에 돌아가는 대로 청룡단을 파견할 생각이고. 자네는 몸이 성치 않으니 이곳에 남게.”
지금의 황종관은 무인이 아니라 정치인으로 보였다. 거기에 의논이 아니라 통보였다. 워낙 확고한 태도여서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서운하더라도 이해하게.”
“그러시면 저는 오후에 사매를 찾아갈까 합니다.”
“몸이 괜찮겠나?”
“그 정도는 견딥니다.”
진무린은 엄소동의 일에 관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정치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알았네. 그럼 나는 잠시 일을 봄세.”
길지도 짧지도 않은 대화가 끝났다.
이미 출발을 결정한 상황에서 다른 말을 덧붙일 이유도 없었다.
진무린은 먼저 청강을 찾았다.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할 요량이었다.
청강은 부맹주 소강명을 구금한 장소에 있었다.
출발 전에 제자들을 살피는 모양이었다.
“진 대협.”
“맹주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점심 이후에 출발하시면 저는 사매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청강의 첫 번째 반응은 깊은 한숨이었다.
“진인께서 만족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소, 진 대협. 어쩐지 백면호리를 범인으로 확정한 눈치이고, 그 선에서 일을 덮으려는 느낌이라 좋지 않다오. 언제가 노도가 말씀드린 암중세력을 기억하시오?”
“당연히 기억합니다.”
“노도는 맹주가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라 이해해 따르는 것인데, 솔직히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소.”
진무린은 홍화루에서 들었던 백면호리의 억울함을 먼저 청강에게 전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인 청강이 슬쩍 맹주가 지내는 대청을 보았으나 그의 속을 알 길은 없었다.
“진인. 무탈하셔야 합니다. 혹 부족하나마 제가 할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부르십시오.”
“고맙소, 진 대협.”
“그리하겠습니다.”
강호는 넓다.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고, 칼 위에서 사는 이들은 다음번을 살아서 보리라 기약하기 어렵다.
“진 대협의 배려를 가슴에 담고 출발하리다. 일을 마치는 대로 진 대협을 찾겠소.”
아쉬운 작별을 마친 진무린은 그 길로 비룡방의 일행을 향해 들렀다.
급작스러운 결정에 비룡방 일행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진 대협.”
그러나 그들은 진무린의 요청으로 달려온 터여서 정도맹의 결정에 그리 마음 쓰지 않는 눈치이기도 했다.
“진 대협. 이리 헤어지면 언제나 다시 보겠습니까?”
다른 이의 아쉬움도 컸지만, 특히 철비완은 철없는 삼촌이 조카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진무린에게 떨어지지 못했다.
“멀지 않아 다시 볼 날이 있을 겁니다. 철 호법께서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시고, 부디 바른길을 가십시오.”
결정은 쉬웠을지 몰라도 이별은 어려웠다.
등평과 등소옥이 연신 아쉬움을 표했고, 마세호와 여섯은 아예 주군을 잃은 수하의 몰골처럼 비통해 보일 지경이었다.
“일곱 분은 당분간 비룡방에서 함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정이 돈독하게 든 모양이었다.
등평은 마세호와 여섯을 품었다는 내용을 전해주었다.
연신 매달리는 비룡방 일행과 작별한 진무린은 흑사련 호북 지부를 나서 홍화루를 향해 걸었다.
오늘만 두 번째이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방문이었다. 힐끔거리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걸어간 진무린은 곧장 홍화루에 들었다.
“오셨습니까?”
“내용을 짐작하지?”
“이번은 모르겠습니다.”
백섭광의 대꾸에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총관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다.”
“혹시 정도맹과 함께 출발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은데 오늘 중으로 길을 떠나기로는 했지.”
백섭광은 실제로 놀라는 기색이었다.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미운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뻔뻔한 대꾸에 진무린이 웃은 다음이었다.
“루주를 뵙고 가시겠습니까?”
“그러려고 왔는데 총관을 보니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어설프게 남기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고 봅니다.”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갔다.
대꾸로 보아서 백섭광은 진무린의 심정을 짐작하는 눈치였다.
“간다.”
“강건하십시오, 공자.”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몸을 돌려 그대로 홍화루를 나섰다.
황종관의 거처를 향해 걷는 길에서 원예의 차가운 눈빛, 냉정한 표정, 묘하게 비틀리는 입술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마지막 방문일지 모른다.
원예가 냉정하게 나오면 서운할 테고, 아쉬워하면 가슴에 남을 것 같아 그대로 나온 것인데 이리 돌아선 것이 나쁘지 않았다.
“어딜 다녀오는가?”
대청에 있던 황종관과 청강, 소림의 보우와 보광, 무당의 진섭자와 진호자가 진무린을 맞았다.
“길을 나설까 합니다.”
“벌써? 점심이라도 함께 들고 가게.”
“아시지만 본문에 급한 일이 있어 한시도 여유를 부리기 어렵습니다. 모처럼 뵈었는데 이리 헤어지게 돼서 죄송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진 대협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곽가와 풍령관의 수하를 잡아낸 것은 물론이요, 강호의 근심인 마등을 해결해 주셨으니 노납은 진 대협의 이름 석 자를 가슴에 깊이 담겠소.”
보우가 대표로 나서 진무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잠시 시간을 보냈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청강과 또 그만큼의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맹주. 출발하기 전에 잠시 뵙고 싶습니다.”
“혹여 돌려줄 물건 때문이라면 그냥 지니고 있게.”
황종관은 진무린의 뜻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끝내 패를 돌려주겠다고 나서면 황종관과 다시는 안 보겠다는 의도로 비출 수도 있었다.
편한 대로 하자.
진무린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럼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먼 길 살펴가십시오.”
일행과 포권을 나눈 진무린은 몸을 돌려 황종관의 거처를 나섰다.
실로 터무니없는 헤어짐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주인공은 진무린이 아니라 정도맹이었고, 은천문은 정면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사매를 찾아 돌아간다.’
강호에 나와 등룡창천을 얻었으니 꼭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맹주의 거처를 나선 진무린은 암연을 부르는 기운을 뿜어내며 소능산으로 걸었다.
먼저 사매의 정확한 위치를 물을 셈이었다.
‘간단해서 좋네.’
사매를 찾아 은천문으로 돌아간다.
그 뒤에 문주 임운령과 사부 전도위의 도움을 받아 무공을 유출한 배신자를 찾아내 벌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암중 세력이 설치든, 강호에 아미의 장로와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든 그것은 정도맹의 일이다.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는 곧장 소능산을 향해 걸었다.
**
백섭광의 보고를 들은 원예의 첫 번째 반응은 차가운 미소였다.
“나쁘지 않네요.”
“루주께서 서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여기까지 오셔서 그냥 돌아가셨어요. 공연히 만나 감정이 흔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을 테지요. 그 정도면 만족해요.”
대꾸를 마친 원예가 시선을 들었다.
“백면호리는 아직인가요?”
“어디에 숨었는지 연락조차 닿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지요. 알았어요.”
원예의 답을 들은 백섭광이 고개를 숙인 뒤에 물러났다.
홀로 남은 원예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움직였다.
“적을 상대로 검을 꺼낼 용기는 있는데 고작 홍화루의 3층 계단을 밟을 자신이 없다니, 소녀가 마등보다 무서웠나 보네요?”
마치 진무린이 듣고 있다는 투로 소능산을 향해 말을 건넨 원예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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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능산에 나타난 이는 장 노대였다.
“노대께서 이 근처에 계셨습니까?”
“장로 회의를 확인하고 나서는 참이었습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에 장노대는 먼저 장로회의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은천령은 문주께서 거부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강호에 무공이 유출된 증거가 뚜렷하게 나오거나, 모 소저가 본문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한다면 다시 논의하기로 하였습니다.”
임운령이 급히 간 덕분에 회의 결과도 예상대로 무난하게 흘렀다.
진무린은 조금 전에 있었던 정도맹의 결과를 알려주었고, 그 내용을 문주에게 전해달라 당부하였다.
“장 노대. 사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전중방으로 향하는 것이 분명하니 이틀 후면 섬서의 초입, 석관평에 당도할 것입니다. 세 갈래 길이 있고, 그 가운데 서 있는 유운객잔이 있으니 그곳에 들를 것이 확실합니다.”
“그 뒤에 본문의 표식을 전한 적은 있습니까?”
“다섯 번이나 더 연락을 취했고, 마지막에는 암연이 숲에 숨어 기운을 펼쳤는데 날카롭게 노려볼 뿐, 다른 반응은 없었습니다.”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말씀드린 대로 제가 사매에게 간다고 본문에 전해주시고, 혹 가능하다면 사제에게도 제가 찾아갈 것이라 연락해주십시오.”
“진 대협이 직접 움직이신다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문주께서 들으셨으면 서운해하실 겁니다.”
적당한 농담으로 대화를 마친 진무린은 장 노대와 헤어져 길을 나섰다.
소능산을 넘어가 인적이 끊긴 곳에서 경공을 펼칠 생각이었다.
산을 오른 뒤였다.
정상에 선 진무린은 오래된 사당을 내려다보았고, 시선을 들어 홍화루를 눈에 담았다.
“간다.”
마지막 인사를 전한 진무린은 훌쩍 몸을 날렸다.
잘 있어라, 상등.
이제 사매를 만나 무슨 일인지를 살펴볼 참이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사제, 원예와 다른 느낌의 사매, 두 사람을 떠올린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