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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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1화
은천검제
제51화
백면호리는 도주에 이골이 난 인물이었다.
“거기! 이리와 보시오!”
어쭙잖은 무관의 무인쯤 얼마든지 떨쳐낼 경공도 지녔다. 그러나 분위기가 그를 붙들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본능이 그를 붙든 탓이었다.
“무슨 일이오?”
“도적을 한 명 잡아야 하니 협조해주시오.”
“어떻게 해드릴까?”
대뜸 팔을 내미는 무인을 피해 백면호리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오해 마시오. 도적이 면구를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얼굴을 바꾼다 하여 조사해보려 하는 게요.”
“그렇다면야.”
백면호리는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아!”
“미안하외다. 우리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니 이해해주시구려.”
볼을 어루만진 백면호리는 억울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도적이 뭘 훔쳤길래 이 난리요?”
“아미파의 시신을 탈취했다지 않소?”
“캑!”
놀라는 반응이 워낙 극적인 탓에 무인이 의아한 눈으로 백면호리를 들여다보았다.
“큼큼. 고귀한 분들의 시신을 훔쳤다는 말에 놀라서 그랬소.”
“왜 아니겠소. 혹시 백면호리라는 자를 보거든 바로 신고하시오. 은이 이십 관이요.”
“헉!”
하마터면 백면호리는 자수할 뻔했다.
은 이십 관은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수고들 하시오.”
“살펴 가시구려.”
몸을 돌린 백면호리는 골목을 빠져나와서 슬쩍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단박에 검버섯이 잔뜩 피어난 노인으로 변해 헛입맛을 다시며 길을 걸었다.
길마다, 골목마다 무인들이 삼엄하게 오가는 이들을 살폈는데 다들 백면호리의 얼굴에 피어난 시커먼 검버섯을 보고는 더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빠져나온 백면호리는 산 앞에서 주변을 둘러본 뒤에 훌쩍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줄로 당기는 것처럼 단숨에 정상으로 뛰어올랐다.
“뭐야, 이게! 내가 뭐하러 늙어빠진 비구니의 시신을 가져간다는 거야!”
백면호리는 황당하고 기막힌 심정을 토해냈다.
끈적하던 추적의 손길이 끊겼나 했더니 느닷없이 시신을 가져간 도적이 돼서 자칫하면 무림공적이 되게 생겼다.
“가만? 시신이라고 그랬잖아? 그럼 죽었다는 이야기?”
백면호리 신세 더럽게 꼬였다.
이제는 진실이 밝혀져도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미는 두고두고 백면호리를 원수로 대할 테고 별호만 들어도 이를 갈아댈 것이 분명했다.
‘자수?’
백면호리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시신을 건드렸다는 혐의였다.
자수한 이후를 상상한 백면호리는 치를 부르르 떨었다.
정도맹에 가는 순간, 표독한 눈매를 한 아미의 비구니들이 달려들어 뼈를 잡아 빼고, 혈도를 막아 산 채로 몸이 썩게 만들 테고, 결국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다면 편안하게 죽고 싶다는 욕심에 백면호리는 죄를 자백할 것이 분명했다.
거짓 자백이라도 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어쩌라고?”
바위에 걸터앉은 백면호리는 상체를 불쑥 세우고 상등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위험하다고 여기면 오라 했었다. 진무린이.
백면호리는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
아침이 밝았다.
황종관과 보우, 진섭자가 돌아왔고,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부맹주와 약연을 지키는 인원을 더 늘렸다.
원래는 이날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아미파의 일로 출발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최소한 아미의 장로가 도착해 현장을 확인하고, 그동안의 경과를 들을 때까지는 함부로 출발하기도 어려웠다.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진무린은 홍화루로 향했다.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깊게 알지 못한다.
사부 전도위에게 발목을 걸고 다시는 강호에서 다른 이의 물건을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내용만 들었다.
몇 번 봤다.
그러나 진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시신에 손댈 이유가 없을뿐더러, 그런 비인간적인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아침을 맞은 홍화루는 지난밤의 요란함을 바닥에 깐 것처럼 잠에 빠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 백섭광이 들어서는 진무린을 맞았다.
걸어오는 진무린을 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총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루주를 뵙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고. 백면호리가 아미의 시신을 손댄 것이 사실인가?”
“제가 아는 바로는 그의 소행이 아닙니다.”
백섭광은 숨도 쉬지 않고 바로 답을 주었다.
“확신하나?”
“어젯밤에 소식을 전했으나 아직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약재를 구하는 길에서 잠적했다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가 만약 시신을 가져갔다면 약시에 들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백섭광의 추측은 충분히 납득할 수준이었다.
“답해줘서 고맙다. 백면호리와 연락이 닿아 사실을 확인하면 연락을 부탁해.”
“백면호리를 추적하면 본루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 그의 억울함을 밝히는 일은 본루가 당연하게 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루주께 여쭙고 그리하겠습니다.”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홍화루를 나섰다.
당장 황종관과 청강에게 가서 지금 들은 이야기를 전할 참이었다.
홍화루를 빠져나온 직후였다.
섬뜩한 느낌이 진무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하후도?
번득 시선을 돌린 곳에 하후도는 없었다.
대신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가온 마흔 후반의 남자가 진무린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저 앞에 보이는 산이 좋군. 저리로 가세.”
중후한 음성이 소능산을 가리켰다.
하후도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그만큼 강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진무린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고, 조심스럽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굳이 기운을 일으킬 필요 없네. 얼핏 봐도 정상이 아닌 데다 더 무리하면 중단전에서 기혈이 역류해 피를 토하게 될 걸세.”
진무린의 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낸 중년인은 묵묵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찌 보면 납치해가는 형상이고, 달리 보면 보호하기 위해 함께 걷는 모습이었다.
슬쩍 본 남자는 고집스럽게 생긴 인상이었다.
눈썹과 눈매, 코, 입가, 턱에 고집이 달라붙었고, 외통수라 할 정도로 고지식해 보이기도 했다.
하후도가 다시 나타나면 진무린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 말을 돌려 말하면 상등에 있는 그 어떤 무인도 그를 상대로 살아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지금 이 남자 역시 상등에 있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다.
‘갈 데까지 가보자.’
진무린은 호흡을 조절해 중단전에 담긴 내공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준으로 조절했다.
이거 봐?
중년의 남자가 흥미롭다는 투로 진무린을 힐끔 보았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묵묵하게 걸은 두 사람은 아침 햇살을 강렬하게 받는 소능산을 올랐고, 늘 자리하던 사당 앞에 멈췄다.
잔뜩 가져다 놓은 자재가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놓였는데 지난밤의 일 때문인지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반백의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낸 중년의 남자는 회색 장포를 입었는데 화려하지 않았으나 제법 고귀한 느낌을 풍겼다.
“엄소동이라 하네.”
자신을 소개한 엄소동은 상등이 내려다보이는 끝으로 옮겨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기다리는 느낌이어서 진무린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홉 개의 맹약을 지켰더니 푸른 강은 그 속에 다른 마음을 감췄던 모양이네.”
시구와 같은 말을 뱉어낸 엄소동이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햇살을 옆으로 받자 그의 얼굴이 더욱 고집스럽게 변했다.
“하후도가 담아 놓은 내공을 제거해 줄 셈일세.”
그걸 알고 있어?
의아한 진무린의 눈을 보며 엄소동이 고개를 저었다.
더 깊이 알려 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였다.
“하후도는 자네가 그 내공을 제거할 거라 예상하지 못할 테니 다시 마주치면 단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된 게지.”
“내공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를 감당할 방법이 있을까 싶습니다.”
입술을 내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실력으로야 그렇지. 강호의 세 가지 보물을 손에 넣게. 그런 뒤에 구관을 통과해. 그러면 하후도 같은 아이쯤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걸세.”
진무린은 기가 막힌 심정에 가볍게 웃었다.
한 가지만 취하려 해도 공적이 되는 세상에서 그 세 가지를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싶어서였다.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하후도를 다시 상대할 정도의 어려움이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선택은 자네의 몫이지. 그들의 손에 죽든가, 고개를 숙이든가, 아니면 숨어서 강호 전체가 그들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든가.”
“제가 선택하면 하후도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엄소동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앞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아이가 목표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심부름하는 아이?
하후도에게 엉망으로 얻어터진 진무린은 엄소동의 말에 자존심이 또 한 번 상했다.
진무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소동은 상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호삼보를 얻으면 그 안에 담긴 내공이 있다네. 그걸 바탕으로 아홉 개의 관에서 아홉 개의 검법을 얻게.”
“강호삼보를 쉽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만으로 무림공적이 됩니다.”
“주인이 허락하는데 누가 감히 공적을 운운한단 말인가.”
고집스러운 눈매를 돌린 엄소동이 진무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호삼보의 주인?
참으로 황당한 말이었다.
“천서유기는 유가장, 보양진서는 합락궁, 유광록은 섬서의 유광에 있네.”
“선배의 성함을 말하면 그들이 순순히 그것을 내놓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주인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인의 허락 없이 물건을 소유한 이들일세. 이름을 댄다고 내놓지는 않겠지.”
“선배는 어디에서 오셨고, 하후도란 자는 어디에 속한 인물입니까?”
“깊게 알 것 없네.”
진무린은 옅게 웃었다.
어제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이 나타나 몸뚱이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오늘은 고집스럽게 생긴 고수가 나타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선택은 자네의 몫일세.”
“구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삼보를 얻으면 자연 알게 될 걸세.”
“왜 저입니까?”
진무린의 질문을 받은 엄소동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투의 시선을 던졌다.
“선인의 경지를 얻어놓고 그런 질문을 하면 되겠나. 그 덕분에 선택지라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면 편하지. 그 경지를 얻지 못했다면 내 하수인이 되었거나, 죽었을 테니까.”
말을 마친 엄소동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하후도가 남긴 기운을 회수할 걸세. 통증이 좀 있을 텐데 견딜 만할 게야.”
불쑥 엄소동의 손이 바로 가슴 앞에 있었다.
어제 하후도가 그렇더니 엄소동 역시 어떻게 움직였는지 당최 눈에 담지 못했다.
검은 기운을 풀어내지 못해서 느끼지도 못했다.
턱! 터더덕! 턱!
엄소동은 글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진무린의 심장 부위를 눌렀다.
‘끄으!’
견딜 만하다고 했었다.
엄살 부리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데 심장을 생으로 잡아 뽑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덮치는 바람에 하마터면 진무린은 몸을 구부리고 바닥에 엎어질 뻔했다.
통증은 잔인할 정도로 강렬했고, 향처럼 긴 여운이 있었다.
“그런 줄 몰랐더니 엄살이 심한 편인가?”
하마터면 뱉어낼 뻔한 욕을 진무린은 이를 악무는 것으로 참아냈다.
많은 인생을 산 건 아니지만, 이토록 놀림감 취급을 당한 적도 없었다.
“푸훅!”
겨우 몸을 버티던 진무린이 시커멓게 죽은 피를 한 덩어리 토해냈다.
예상했었을까.
엄소동은 검은 피를 보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만 가보겠네. 삼보를 얻기 전까지 나와 만난 것은 말하지 말게. 자네가 몸담은 곳의 문주, 정도맹의 맹주라는 아이와 청강이라는 아이도 마찬가지일세.”
진무린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얼마나 전전대의 고수이기에 황종관과 청강을 아이라 부르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하후도란 자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그 녀석이라면 아마 팔십쯤 되었지 싶네. 심부름하는 아이라 철도 없고, 망나니 기질도 좀 있고.”
기가 막혀 실실 웃음이 나오는 답변이 있었다.
“선배의 실력이라면 하후도를 능히 상대하실 텐데 굳이 제게 어려운 선택지를 내미시는 이유가 뭡니까?”
대답 대신 엄소동은 먼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려 진무린을 보았다.
“은천문이 나서면 지금 강호의 혼란을 한순간에 정리하겠지. 그런데 너희는 왜 몸을 감추고 있느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날카로운 추궁이었다.
“구주는 구관을 설치한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다른 생각을 품었던 벽계가 너희를 노리는 것이고. 내가 나서지 않아도 우리는 무탈하다. 어떻게 할 테냐? 네 힘으로 네가 사는 강호를 지킬 테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소매를 붙들고 매달릴 테냐?”
고개를 앞으로 돌린 엄소동이 잠시 틈을 가진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은 너의 몫이다.”
말을 마친 그는 소능산의 아래로 떨어지려는 사람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구주는 약속을 지켰고, 벽계가 우리를 노린다고?’
멍하니 서 있는 진무린의 앞에서 엄소동은 이미 모습을 감췄고, 그의 빈자리를 아침 햇살이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