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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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48화
은천검제
제48화
청강은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 대협의 의견이 통쾌하기는 하나, 만에 하나 가는 도중에 일이 벌어진다면 맹주께서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고.”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황종관을 보았던 청강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암중 세력이 부맹주와 약연은 물론이고, 소림과 무당, 아미를 다치게 했을 때,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민해 주시오, 진 대협.”
진무린은 잠자코 청강의 말을 되새겼다.
그의 말대로 통쾌하고 간단한 해결법을 제시했으나 진무린과 달리 정도맹을 책임진 황종관이 선택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었다.
“노도의 의견에 마음 상하신 것은 아니오?”
조심스러운 청강의 질문에 진무린은 얼른 표정을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치기 어린 면이 남아서 생각이 짧을 때가 잦습니다. 그럴 때마다 외면하지 마시고 진인께서는 지금처럼 부족한 저를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허어! 진 대협이 그리 몸을 숙이면 노도는 할 말을 잃는다오. 그러지 마시고 얼른 앉읍시다.”
양손을 맞잡아 고개 숙이는 진무린을 청강이 안다시피 만류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청강은 마음을 빼앗긴 손자를 보듯 대견한 눈이었고, 황종관은 흐뭇한 얼굴이라 세 사람 사이에 훈훈한 감정이 맴돌았다.
“자, 그럼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자네가 우리와 함께 정도맹으로 가는 것인데.”
황종관이 막 의견을 냈을 때였다.
밖에서 정도맹의 무인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맹주. 아미의 조연명 사태께서 제자들과 먼저 돌아가시겠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반 시진 뒤에 맹주를 찾아뵐 예정인데 시간이 어떤지 답을 달라 하십니다.”
무인의 보고를 들은 세 사람은 동시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적의 습격을 염려하던 참에 가장 의심스러운 아미파가 먼저 길을 떠나겠다고 알렸으니 의도가 좋게 들리지 않았다.
“소림과 무당은 다른 말씀이 없으셨더냐?”
“조연명 사태께서만 나서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았다. 가서 반 시진 뒤에 방문하시면 된다 말씀드려라.”
“맹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를 보인 무인이 거처를 빠져나갔다.
“우연일지는 몰라도 이리되면 정황상 돌아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는 암시쯤은 되겠군.”
황종관의 혼잣말이 진무린과 청강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했다.
**
은천문으로 돌아온 임운령은 전도위를 찾은 뒤에 문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7층 전각을 날 듯이 올라선 그는 창가로 다가가 널따랗게 펼쳐진 은천문을 둘러보았다.
얼마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바뀐 것이 있소?”
전도위가 여유 있는 태도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은천령을 의논한다는 보고에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소? 모처럼 문주께서 주시는 차도 한잔 마시고 싶소이다.”
“이런,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임운령은 자리를 권했고, 연통줄을 당겨 시비에게 차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느긋하게 보이시는 게 좋소. 문주께서 다급해 하시면 은천령에 동조하지 않던 다른 장로들조차 괜한 염려를 한다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사부를 잊은 제자 놈은 잘 있더이까?”
“예. 무척 잘 있었습니다.”
“고얀 놈.”
전도위의 넉넉한 농담에 웃음이 오갔고, 마침 그때 시비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앞에 놓인 차를 권한 뒤에 입가로 가져갔다.
시비가 나선 다음이었다.
“문주의 짐작이 맞았소. 원고성과 백승 장로요. 두 사람이 본문의 무공이 밖으로 유출될 것이 염려된다며 려아의 척살을 주장하였소.”
“예상이야 했었는데 이토록 강경하게 나오는 이유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전도위가 내부 상황을 전하자, 임운령은 밖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들려주었다.
근심은 마등이 은천문의 무공을 아는 것이요, 기쁜 소식은 진무린의 발전이었다.
“당장은 려아가 궁지에 몰린 꼴이구려.”
“그렇습니다. 원고성, 백승 장로가 무공을 유출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오히려 마등이 본문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쉬쉬해야 할 형편입니다.”
“마등을 상대한 것이 녀석이라 다행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본문의 무공을 익혔다는 말이 벌써 돌았을 테고, 원고성과 백승의 주장에 힘이 실렸을게요.”
그나마 다행이란 투로 말을 건넸던 전도위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었다.
“강호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도움 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빠른 성취가 있을 줄은 몰랐소. 하! 이제야 마음이 조금은 놓이오.”
“아직 확실히 손에 넣지는 못한 눈치였습니다. 다만, 경계를 보았고, 경험했으니 조만간 손에 붙들 것이라 믿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선이 분명했다.
모려원을 이야기할 때는 근심이 가득했고, 진무린에 관해서는 반가움과 기쁨이었다.
“문주께서 돌아오셨으니 아마도 백승 장로가 회의를 요청할게요.”
“당장 저들에게도 증거가 없을 테니 우선 지켜보겠습니다.”
잠시 찻잔을 노려보던 임운령이 각오처럼 고개를 들었다.
“은천령은 문주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 몸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답이 없으니 전 사부께서는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임운령의 말이 건너가기 무섭게 전도위는 옅게 웃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모려원의 결백을 확인했다면 그는 벌써 검을 들고 원고성과 백승을 찾아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임운령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부에게서 배운 진무린이니 적을 보면 당장 목을 베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
백면호리는 원예를 찾아가 서신을 전달했다.
잠시 기다린 그는 원예가 급히 적어준 서신과 전표를 받아들었다.
“약재를 사고 남는 것은 이안공자께 드리면 되겠지?”
“그래 주세요.”
답을 들은 백면호리가 고개까지 기울이며 원예를 살폈다.
“소녀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하시는 게 좋아요.”
“뭔가 바뀌었는데?”
“눈이 나빠지셨나 봅니다.”
“아닌데? 뭔가 있는데?”
원예의 눈매에 독기가 서리자 백면호리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누가 나를 따라붙은 것 같거든. 혹시 내게서 연락이 끊기면 돈을 가지고 튄 것이 아니라 사고를 당한 거야. 그러니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진 대협에게 알려주게.”
“황궁이 아닐까요?”
원예의 추측에 백면호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궁이라면 단번에 잡아들이면 들였지, 나를 미행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까 혹 연락이 끊기면 진 대협에게 바로 연락하고, 불쌍한 내 딸을 좀 살펴줘.”
“알았어요.”
“그런다고 이런 곳에 데려오지도 말고.”
원예의 눈이 차갑게 변하는 것을 본 백면호리가, “큼큼”거린 뒤에 몸을 일으켰다.
“가보겠네. 약재는 내가 알아서 표국을 고용할 테니 그리 알게.”
잘 가라는 말을 할 법도 하련만, 원예는 계속해서 차가운 눈빛이었다.
쓴 입맛을 다신 백면호리는 기껏 들어왔던 문을 놔두고 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원예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백면호리가 나선 창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시선이 달린 곳은 귀혼곡이 있는 방향이었다.
승조표국이 몰살당하고, 표물이 없어졌으며, 도주에서는 강호 최고라는 백면호리를 누군가 뒤쫓는다는 말을 들었다.
“강호의 세 가지 보물이 거론되면 반드시 피로 강을 만들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더니.”
혼잣말을 뱉은 원예는 소능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면호리를 대할 때보다 더 차갑고 냉정한 눈빛이었다.
**
반 시진 뒤에 아미의 장로 조연명은 홀로 황종관을 방문했다.
“미리 전갈을 드렸던 대로 길을 나설까 합니다.”
꼿꼿한 태도로 말을 건넨 조연명은 당장에라도 몸을 돌릴 것처럼 냉랭한 얼굴이었다.
“정도맹에 돌아가면 장로회의를 바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그때는 참석하실 수 있겠습니까?”
“장문인에게 그 말을 전하도록 하지요.”
“모처럼 뵈었는데 이리 헤어지니 아쉽습니다.”
“맹주께서 그리 생각하실 줄은 몰랐네요.”
좋은 말에 가시 돋친 대꾸를 던진 조연명이 몸을 돌렸다.
“진인께서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 대협, 기회가 있다면 또 뵙지요.”
“조심히 가시구려.”
“먼 길 살펴 가십시오.”
형식적인 인사를 마친 조연명은 쌩하니 찬바람이 부는 태도로 몸을 돌렸고, 그대로 거처를 나섰다.
“흐음.”
느끼는 심정은 다 같다. 그러나 아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것은 아니어서 황종관은 나직한 한숨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저녁에 소림과 무당을 초대하였습니다. 정도맹으로 돌아가는 날짜를 의논할 생각인데 이곳에서 남은 일이 없으니 결정만 되면 내일에라도 바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노도는 어느 때고 괜찮소. 진 대협은 어떠신가?”
진무린은 쉬 답을 내지 못했다.
당장 이곳의 일이 해결되면 모려원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닥친 위험을 생각하면 또 훌쩍 길을 나서기도 어려웠다.
“본문과 의논하여 방법을 정할까 합니다.”
“바로 되겠나?”
“본문의 특별한 방식이 있으니 가능합니다. 다만, 저녁에 자리를 비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는 길을 의논한다는데 저녁이 문제인가. 편하게 일 보게.”
황종관의 권유를 받은 진무린은 거처를 나섰다.
참으로 길었던 하루가 어둠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거처를 나선 진무린은 암연을 부르는 특유의 기운을 뿜어내며 소능산을 향해 걸었다.
맹주의 거처를 빠져나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길을 걸을 때였다.
‘부르는 것을 알았으니 적당한 장소로 가십시오.’
마치 대답과 같은 암연의 기운이 진무린에게 달려들었다.
누군지 굳이 확인할 필요 없었다.
그런 행동이 암연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어서 모른 척 걷는 것이 더 좋은 일이었다.
진무린은 소능산을 향해 곧장 걸었고, 잠시 뒤에 사당에 도착했다.
원예가 말한 것이 있더니 그사이 오래된 사당 앞에는 기둥으로 쓸 나무와 기와들이 놓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당이 이곳에 서서 능동을 바라보며 긴 세월을 견디리라.
서서히 떨어지는 오늘의 태양을 짊어진 채 진무린이 상념에 사로잡혔을 때였다.
“찾으셨습니까?”
처음 보는 중년인이 진무린의 뒤에서 나타났다.
“말씀을 주시면 전하겠습니다.”
신분을 의심하지 않도록 양손을 맞잡아 숙인 중년은 암연 특유의 기운을 가볍게 뿌렸다.
“사매의 근황을 알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모 소저는 섬서의 전중방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틀 안으로 백향초를 노린 자들과 마주할 수 있는데 무공으로 따져 모 소저의 적수가 되지는 못합니다.”
“사매가 무공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걸음걸이와 속도, 기색으로 봐서 내공을 발휘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암연의 보고에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요?”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 소저의 곁에 있을 예정입니다. 진 대협께서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킬 것으로 압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마음을 굳혔다.
“정도맹까지 부맹주와 약연 장로, 자경을 호송하는 일을 도울까 합니다. 거리로 봐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지금 상태를 유지했으면 한다고 본문과 사제에게 뜻을 전해주십시오.”
“진 대협의 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십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장로회의는 어찌 되었습니까?”
“아직 연락 온 것이 없습니다.”
진무린의 표정을 살핀 중년인이 손을 마주 잡아 예를 표하고는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호북의 상등에 와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대결은 철비완이 승리했고, 내일 정도맹으로 부맹주와 약연, 자경, 곽가, 풍령관의 수하를 압송하면 사건도 일단락된다.
일자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등은 화형을 통해 한 줌 재로 변했고, 그가 이끌던 흑사련은 종적을 감추었다.
남은 것은 죄를 지은 이들을 뇌옥에 가두는 것이고, 알아내야 할 일은 그들이 누구와 왜 손을 잡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상등의 기와지붕을 주황색으로 물들인 태양이 저 너머로 몸을 반쯤 감추는 시간이었다.
홍화루를 바라보던 진무린의 눈이 한순간 독하게 변했다.
우우우웅.
의도하지 않았던 내공이 급하게 일어났고, 그에 반응해 검이 울었다.
맹세코 세상에 이토록 강렬한 기운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한 자루 비수처럼 날카롭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해일처럼 거대했으며, 세상의 원천인 양 저항하기조차 어려웠다.
검을 꺼내기도 전에 기가 꺾인 것도 처음이었다.
강렬한 기운이 뒤에 내려앉은 것을 느낀 진무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