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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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44화
은천검제
제44화
연륜은 늘 어려운 순간에 경험을 바탕으로 빛을 발한다.
“진 대협. 정도맹을 이끄는 맹주께서 함께하신 자리요. 진 대협의 위신을 깎는 일이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으나 노도의 얼굴을 봐서 지금의 다짐을 잠시 미뤄주시오.”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화가 단박에 풀릴 정도로 청강의 다독임은 잔잔했고 부드러웠다.
혼자 힘으로 아미를 멸문시키지야 못하겠지만, 적어도 십 년쯤 후퇴시킬 자신은 있었다. 은천문을 욕보이는데 아무런 행동도 못 하는 제자보다는 악귀가 되리라 독하게 마음먹은 참이었다.
“진 대협.”
그런데 두 번째로 은근하게 부르는 청강의 음성을 듣자 진무린은 그만 웃음이 올라오고 말았다.
억지로 참았다. 견뎠다.
그러면서 시선을 청강에게 돌렸다.
“진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어찌 고집을 피우겠습니까? 다만, 본문의 문주께 아미의 장문인이 직접 사과의 뜻을 전한다면 저 역시 그 선에서 물러서겠습니다.”
이 정도가 최선이다.
네가 뿌린 씨니 거두는 결정도 네가 해라.
황종관과 청강이 답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조연명을 보았다.
웃기지도 않는다.
막무가내인 마등이 무서워 몸을 움츠렸던 자들이 그를 죽인 진무린을 우습게 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문을 욕보이기까지 하다니.
침묵이 길어지면서 진무린이 잠시 옅어졌던 독한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었다.
“오늘 언행은 유감이에요. 빈니는 진 대협의 뜻을 받아들여 아미가 공명정대함을 세상에 알리겠어요.”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조연명의 대꾸가 있었다.
당장 두들길 것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황종관과 청강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른 제자를 내보내겠다면 그 점에 관한 생각은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그것은 진 대협이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으로 알아요.”
“맹주의 결정을 임의로 바꾸는 분이 있다면 지키겠다는 사람도 인정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본파와 소림…….”
“또다시 문파의 이름을 거론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징그럽기도 하다. 그놈의 문파 이름.
진무린이 막무가내로 나서지 않았다면 조연명을 황종관이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렇다면 맹주의 의견을 먼저 듣지요.”
맹주는 어떻게 하겠냐는 투로 조연명이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에서 후환이 없을 것까지 약조했던 대결입니다. 이를 어기는 것은 많은 이들 앞에서 공동의 체면과 정도맹의 위상이 꺾이는 일이니 대결은 원래대로 철 호법과 자경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종관의 답은 딱 부러졌다.
잠시 숨을 씩씩거린 조연명은 더는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겼는지 쌀쌀맞은 표정으로 입술을 뒤틀었다.
“맹주의 뜻을 알았으니 가서 의논하고 다시 말씀드리지요.”
“원안은 바뀌지 않음을 명심하십시오. 공연히 대결장에서 엉뚱한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닙니다.”
날카롭게 황종관을 노려본 조연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뾰족한 얼굴로 마당을 가로질러 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후-.”
황종관이 길게 숨을 내쉰 뒤에 혼란한 정신을 수습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그것이 뭔가?”
“진 대협. 등룡창천을 얻으신 게 아니오?”
그런 뒤에 황종관과 청강이 연달아 질문을 건넸다.
“마교삼절을 상대할 때 느낌은 있었는데 현실에서 확인한 것은 저 역시 처음입니다. 듣기로 묵빛 기운이 퍼지고, 그 기운 안에서 검을 피할 자가 없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등룡창천이 아닐까 합니다.”
“오오-!”
청강이 감탄을 길게 쏟아냈다.
“강호에 새로이 검왕이 탄생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인데, 그 장본인이 진 대협이니 노도는 이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소!”
“우연인지 몰라도 백 년 전에 검왕이라 불렸던 진유원 대협도 진 씨 성을 지녔는데 그분이 검왕으로 추앙받았을 때의 나이가 서른넷인 것을 감안하면 자네의 성취는 가히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닌가.”
“당시에 검왕께서 요동의 임가장과 친분이 깊었는데 임가장의 벽력검제 장주께서 도를 사용하셨소. 이 또한 맹주와 비슷하니 이런 우연이 어디에 있겠소!”
“그렇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진무린의 발전에 놀라 현실을 또다시 밀어둔 두 사람이 연신 기쁨을 나누느라 시간이 잠시 흘렀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마등은 어찌하셨습니까?”
“아! 너무 놀라운 일에 정신이 팔려 앞에 둔 일을 잠시 잊었네. 어제 다들 보는 앞에서 화장했으니 마등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을 걸세.”
진무린의 질문에 두 사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서주었으니 대결이 끝나면 부맹주와 약연의 부당한 행위를 공표하고 두 사람을 벌할 생각이네. 더불어 자경도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겠지.”
“진인께서는 부맹주가 어느 정도 선에서 처벌받기를 원하십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청강은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으로 시간을 잠시 끌었다.
“오늘 일로 아미와는 더 이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게요. 죽은 제자들의 억울함을 풀겠다며 나선 길에 깨달은 것도 적지 않아서 노도 역시 더는 물러서지 않겠소.”
청강은 결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필요하다면 본파의 장문인을 설득해서라도 맹주께 정식으로 청을 넣을 테니 죄가 확실하다면 부맹주를 정도맹의 지하 뇌옥에 가둬주시오.”
“진인. 부맹주를 뇌옥에 넣으려면 다섯 문파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맹주께서 그의 죄를 확실하게 밝혀주시면 본파의 장문인이 공문을 보내도록 하겠소. 거부한다면 화산은 독자적으로 응징을 가할 것이라 주장할 생각이라오.”
청강의 다부진 답변에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점창과 일전을 불사한다면 남은 문파는 어느 쪽에 붙든, 구경하든, 둘 중 하나였다.
화산은 명분이 있고, 점창은 명분이 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가는 화산을 말려야 하는데 거부당하면 체면이 깎이는 것은 물론이요, 관계마저 돌이키기 어렵게 된다.
화산이 독하게 나온다면 소강명을 지하 뇌옥에 가두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었다.
“진 대협은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뇌옥에 가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서 그렇습니다.”
“자네가 정도맹의 규정을 몰라 그런 것일세. 지하 뇌옥에 가두는 것은 먼저 무공을 폐지하고 이후 살아서는 나오지 못하는 강력한 처벌일세.”
“그런 규정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바로 참하는 것보다 잔인한 형벌일 수 있겠습니다.”
“그뿐인가. 지하 뇌옥에는 무림공적으로 잡혀 온 노괴들이 득실거리니 참으로 견디기 어렵지.”
실제로 죽는 것보다 잔인한 형벌이라는 의미를 들은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풍령관은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들이 수하를 보낸 것은 분명한데 그것 하나를 이유로 관주를 붙잡아 들이기는 어렵지. 추후 조사를 통해 적당한 수준에서 징계를 고민할 참이네.”
“풍령관은 정도맹 소속도 아니질 않소?”
“사파에 가까운 인물인데 마등과 손을 잡지도 않았으니 홀로 선 인물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대강 의논이 끝났다.
“나는 대결 전에 철 호법을 마지막으로 살펴볼까 하네. 자네는 먼 길을 왔으니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게.”
“괜찮으시다면 운기를 할까 합니다.”
“그렇다면 노도가 호법을 서리다.”
“어찌 진인께서 그런 수고로움을 청하겠습니까?”
“조손을 지키는 할아비 역할을 해보겠는데 그것을 마다하시오?”
참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대꾸에 진무린은 웃음을 그려냈다.
**
보우는 오늘 오전만 두 번째로 조연명의 방문을 받았다.
점심이 지나면 대결이 있을 테니 어쩌면 분주한 것이 당연한 일 일지 모른다. 그러나 조연명의 방문은 의도가 다분한 것이어서 보우는 심사가 편치 않았다.
“진무린이란 자의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듯합니다. 그가 뱉은 말을 옮기기조차 송구하네요.”
보우는 조연명의 성격을 짐작한다.
하기야 한 번 물면 쉬 놓지 않으며 말을 만들어서라도 유리한 쪽으로 뒤틀어야 하는 그녀의 성격을 모르는 이도 별로 없다.
보우의 침묵을 본 조연명이 얼른 입을 열었다.
“대결에 제자를 내보내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대사와 무당의 진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목을 베겠다며 달려드는데 어찌나 참담하던지.”
“사태께서 그 말씀을 듣고 가만히 계셨단 말씀이오?”
“그자가 사술을 사용해 검은 연기를 피워내는데 홀로 감당할 방법이 없는 데다, 맹주와 청강 진인이 입을 다물고 동조하는 통에 수모만 당했습니다.”
“흠.”
“심지어 본파의 장문인이 공식적인 사과를 은천문에 하라며 압력을 넣었는데 어찌나 수치스럽던지, 소림과 무당, 그리고 본파의 이름에 누가 될까 참았지만 참으로 참담한 심정입니다.”
보우는 맞장구치지 않았다.
진무린을 만나 말을 나눠보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뭔가를 판단할 일도 아니었다.
“대사. 정말 이대로 자경만 내보내실 요량이세요?”
“진무린이란 자가 거친 말을 했다 하나 맹주와 약조한 바가 있으니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렵소. 차라리 대결은 그대로 진행하고 뒤에 부맹주와 약연 장로의 처리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보오.”
“바닥에 떨어지는 정도맹과 구대문파의 위신은요?”
보우는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부맹주와 약연 장로의 일을 처리하기에도 벅찬 이 순간에 조연명이 자경의 대결을 이리 내미는 것에 뭔가 감춰진 것은 아닐까.
“이 대결이 구대문파의 제자와 일반 무관의 호법이 대결하는 것이라 소문난 것은 대사도 아시잖아요?”
“사태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빈승이 맹주와 청강 진인을 만나보리다.”
“대결까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조연명의 독촉에 보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가시겠소?”
“아까 당한 수모가 있어 빈니는 이곳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보우는 맹주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귀혼곡의 촌민들은 백면호리와 섭성의 이야기를 들었고,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이송암관의 진법을 열었다.
“뭐야?”
백면호리가 앞을 확인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그는 또한 섭성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움푹 들어간 거 보이지? 저기! 저건 핏자국이고!”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자를 수습한 모양이오. 혹시 모르니 우선 진을 닫겠소.”
밖을 살펴본 이안공자는 무릎까지 오는 돌을 굴려 진을 닫았다.
“에이. 죽이려면 싹 죽여야 후환이 없지. 언제 저놈들이 다시 올지 모르잖아.”
“마교삼절이라 하지 않았소?”
“그렇게 들었지.”
확인처럼 백면호리가 시선을 주자 섭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핵심이 셋이 그리 죽었다면 당분간 안심해도 될 게요. 그나저나 홀로 마교삼절과 제자, 수하들을 상대하는 무인이 있다니. 나는 그 점이 더 놀랍고 두렵소.”
백면호리는 이안공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교가 복수를 하려들 텐데 당분간 안심인 이유는 뭐고, 진 대협이 우리편인데 놀랍고 두려운 건 또 뭐야?”
“마교를 대표하는 고수가 죽었소. 그들이 귀혼곡을 초토화하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겠으나 진법을 깨지 못한다면 세월만 보내게 될 터, 그걸 계산한다면 이리 오겠소, 아니면 진 대협을 바로 찾아가겠소?”
“진 대협을 찾아가기는 뭐하지 않겠어? 대표하는 고수 셋을 모조리 죽일 정도인데?”
“그렇소. 만에 하나 교주가 직접 나선다 하더라도 진 대협에게 가지 이곳에 와서 시간을 소비하지는 않을게요.”
“오호라. 그렇다면 이곳은 당분간 안심이구먼.”
감탄한 백면호리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안공자의 좌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나저나 그리 예쁜 딸은 언제 얻었누?”
질문이 건너간 직후였다.
좌안과 우안이 표정을 냉랭하게 바뀐 뒤에 몸을 돌렸다.
**
진무린은 예상보다 일찍 운기를 마쳤다.
화도곤에서 이미 한번 점검했던 선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는 까닭이었다.
매달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란 판단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등룡창천을 얻은 것인데 이것이 소수음공의 힘 덕분인지, 아니면 계기가 되어 깨달음을 준 것인지도 모호한 상황이라 다급하게 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벌써 마쳤소?”
“쉬 잡히질 않으니 기다릴 참입니다.”
흐뭇하고 대견한 눈을 한 청강이 진무린과 함께 대청으로 나선 직후였다.
“진인. 보우 대사께서 진인과 진 대협을 뵙고자 하십니다.”
정도맹의 무인이 다가와 나직하게 보우의 방문을 알렸다.
“모셔주겠나.”
“예, 진인.”
정도맹의 무인이 바삐 나간 뒤에 보우가 홀로 들어섰다.
청강은 먼저 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에 이어 진무린을 소개했다.
“은천문의 진무린이라 합니다.”
“상등에 도착해 가장 많이 들은 이름이 바로 진 대협인데 오늘에야 뵈었으니 노납이 아예 복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오.”
확실히 보우는 조연명과 달랐다.
그는 또 자리를 권하는 청강을 먼저 앉게 한 뒤에 진무린에게도 한번 양보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대사께서는 먼저 자리하셔서 후배를 마음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시다니 노납이 먼저 자리하겠소.”
자리에 앉은 보우는 소매를 감듯이 말아 다리에 올리고 자세를 정갈하게 잡았다.
“두 분께 한 가지씩만 질문하고 돌아가리다. 부디 바르게 답을 주시길 바라오.”
보우는 방문한 이유를 더할 수 없이 곧게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