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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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39화
은천검제
제39화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약연과 자경은 나뉘어 구금되었고, 점창과 공동의 제자들은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을 나서지 못했다.
또 풍령관의 수하는 곽가의 옆으로 옮겨 비룡방의 등소옥 등이 지키도록 도움을 청했다. 이때, 곽가의 목을 베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일 처리를 마친 진무린은 길을 떠나기 전에 황종관과 청강을 찾았다.
“고생했네.”
“맹주께서 마지막에 결단을 내려주신 덕분입니다.”
“결단? 약연 장로를 구금한 것 말인가? 그리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보네.”
“진 대협이 매서운 눈을 했다는 말씀이오?”
대화를 듣고 있던 청강이 건넨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해보게. 내가 망설이거나 한 걸음 물러나면 무언가 행동에 옮기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나? 자네의 눈빛을 보며 나는 분명 그리 느꼈네. 내가 약연 장로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밤에 들어가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습니다.”
꽤 놀란 모양이었다.
황종관과 청강은 멍한 얼굴로 눈만 껌벅였다.
“제가 목격한 사실조차 부인하고, 함께 있던 상대방을 잡아와도 모함이라 우길 정도면 이는 구대문파를 떠나서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황종관의 놀란 질문에 진무린은 먼저 가볍게 웃었다.
“증거를 앞에 두었습니다. 부인한다고 풀어주고, 부맹주라 함부로 못 하고, 공동의 장로라 해서 벌하지 못한다면 저들에 의해 억울하게 당한 이들은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수 있습니까?”
“자네가 받아야 할 벌은 생각하지 않나?”
“저 역시 부인할 생각이었습니다.”
“뭐라? 지금 뭐라 했나?”
“그런 일 한 적 없다고 할 참이었습니다.”
황종관이 볼을 씰룩였다.
“증인 따위 문제 되지 않습니다. 모함이라고 우기면 되니까요. 이틀 뒤에 소림, 무당, 아미의 장로들이 달려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명백한 정황과 증거를 두고도 부인한다면 그들 역시 존경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흐음.”
깊은숨을 내쉰 황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두려워할 바에는 자리에서 물러나라더니 자네는 적당히라는 게 없군.”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이제 어찌하시려오, 진 대협?”
“귀혼곡에 다녀올까 합니다.”
“이틀 뒤까지 오시겠소?”
“시간은 충분합니다.”
청강의 질문에 진무린은 막힘없이 답했다.
“곽가는 살려두라 해주게.”
“이미 그렇게 당부해 두었습니다.”
“이거야 원. 곽가를 죽일까 봐 노심초사했더니 여태 자네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춘 꼴이 아닌가.”
아직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엉뚱한 닭울음이 커다랗게 들렸다.
“저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사연이 있는 걸음인데 어찌 말리겠나. 몸조심해서 돌아오게. 잘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마교삼절과 검을 마주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 대협. 부디 무탈하게 다녀오시구려.”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두 사람과 헤어진 진무린은 정도맹의 무인이 챙겨주는 건량을 받아든 뒤에 귀혼곡을 향해 움직였다.
**
날이 밝기 시작할 때였다.
새벽과 늦은 밤은 춥고, 한낮은 봄을 떠올리게 하는 늦가을이었다.
서리가 녹아 생긴 습기가 사방을 축축하게 적실 때, 은천문의 문주 임운령은 세상 구경을 나온 중년처럼 산의 높은 곳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에서 모려원이 걷고 있었다.
전중방의 세 사람이 함께 걷고 있는데 어제 감숙에 접어들었고, 섬서 방향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분명했다.
모려원과 전중방의 세 사람을 지켜보던 임운령이 고개를 들었다.
“알았다고 전해라.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게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손을 맞잡아 인사한 암연의 제자가 수풀을 향해 움직였다.
“부맹주와 약연의 목을 자르겠다니?”
혼잣말을 쏟아낸 임운령은 기가 막힌다는 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아는 진무린은 먼저 목을 자른 뒤에 소식을 전하면 전했지, 절대 원남에 있는 임운령의 허락을 기다릴 제자가 아니었다.
‘암연이 혹여 정보를 왜곡해서 전할까 그랬겠지. 부맹주와 약연의 목을 친다는 정보를 비틀었다가는 뒤에 감당할 일이 적지 않으니.’
임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은천문 내부의 배신자에게 말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의도도 분명 담았을 터였다.
끄나풀이 잡혔다.
그러니 함부로 날뛰지 말고 조심해라.
진무린이 그 둘에게 전하는 경고라 해도 무방했다.
한 차례 빙그레 웃은 임운령은 저 멀리에서 걷고 있는 모려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녀석이 또 의외로 단순해서 어쩌면 벌써 목을 잘랐을지도 모르겠다. 너도 알다시피 당최 종잡기 어려운 놈이니까. 그리되면 점창, 공동과는 철천지원수가 되게 생겼다.”
마치 모려원이 듣고 있다는 듯 그의 음성은 자상했다.
“녀석이 오면 너와 함께 걷는 셋이 어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말끝에서 전중방의 세 사람을 바라보던 임운령의 표정이 차갑게 바뀌었다.
**
새벽까지 달린 진무린은 동이 틀 무렵, 적당한 바위산을 골라 그 위쪽에 앉았다.
등과 옆의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움푹 들어간 곳이라 새가 둥지를 틀기 적당한 장소였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지붕 위를 달릴 때와는 달리 오랜 시간 경공을 펼치자 몸 안에서 일어난 묵룡심법의 내공이 달라졌다.
한 마디로 좀 더 압축된 내공을 뿜어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전에는 오의 힘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그저 일의 내공만 사용해도 훨씬 더 빠르게 달리고, 그 덕분에 지치는 기색 또한 적어서 그렇다.
마음 같으면 내쳐 달려도 될 것 같은데 시간도 단축되었고, 아직 확신할 수 없는 힘이라 진무린은 운기를 통해 몸을 점검하기로 했다.
눈을 감고 운기하는 진무린의 몸에서 안개처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높은 바위산의 위쪽이었다.
허공에 풀린 기운은 그것을 알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진무린을 감싸며 짙어질 뿐,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이는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천을 마친 진무린이 호흡을 가다듬자 검은 기운이 삽시간에 몸에 담겼다.
“확실히 다른데.”
이 정도면 진무린도 궁금할 지경이었다.
통상 몸의 기운이 바뀌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본인은 원인과 이유를 아는 법인데 지금 진무린은 마치 누군가 몸 안에 숨어서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는 느낌이었다.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진무린이 통제하지 못하는 기운은 결정적인 순간에, 마지막을 다투는 단 한 수의 검을 낼 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위험을 지닌다.
남은 것은 경험을 통해 얻는 일이 아닐까.
마음을 굳힌 진무린은 정도맹의 무인이 챙겨준 건량을 입에 넣으며 잠시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저 하늘 어딘가에 문주 임운령은 사매 모려원을 살피고 있을 테고, 어제 엄청난 공력을 얻은 철비완은 고마움에 또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볍게 웃은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귀혼곡에 서둘러 도착하는 것이 좋았다.
**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한 원예가 입가를 닦을 때였다.
“루주. 총관입니다.”
음성이 먼저 들린 뒤에 백섭광이 들어섰다.
“날이 밝기 전에 진 공자가 귀혼곡을 향해 출발했다 합니다.”
기다리던 소식에도 원예는 그리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어제 있었던 일은요?”
“공동의 자경이 풍령관의 수하를 만나다 진 공자께 발각되어 현재 구금 중입니다.”
이어 백섭광은 맹주의 거처에서 있었던 지난밤의 일을 원예에게 전해주었다.
“소림과 무당, 아미가 오늘 밤에 상등에 도착할 것이라 합니다.”
“풍령관에 관한 정보가 필요해요. 그들이 어떻게 공동과 손을 잡았는지, 곽가와는 어떤 이유로 연결되었는지를 특급으로 지정해 정보를 취합해 주세요.”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대결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자경이 구금되었다면 공동에서 대결을 미루자고 할 수 있는데?”
“지난밤에 철비완이 맹주의 공력을 받은 터라 실력만으로는 막상막하로 보입니다. 공동의 검법이 허술하지 않은 대신, 비룡방은 경험에서 앞서는 터라 당장 누가 앞설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원예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시비들이 다가와 능숙하게 탁자를 치웠고, 차를 올려놓았다.
아직 돌아가란 말을 하지 않아서 백섭광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참이었다.
“총관. 진 공자가 마교삼절과 대결하게 된다면 승산은 어떻게 되지요?”
이 질문을 위해 기다리게 했다는 것처럼 원예가 입을 열었다.
“소수음공을 녹인 이후로 맹주와 청강 진인이 놀랐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진 공자는 아직 그 힘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데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원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백섭광의 말에 집중했다.
“생사현관을 타통한 수준에서 최상위라 여겨지는 진 공자께서 맹주와 청강 진인의 말대로 한 단계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는 선인의 경지가 아닐까 짐작만 합니다.”
“그래서 마교삼절과 비교하면요?”
“마교삼절, 그들의 제자, 수하들이 항천압지의 진을 펼친다면 어려운 승부가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진 공자라면 그들이 항천압지를 펼치지 못하게 하겠군요.”
“분명 알고 있을 테고, 그에 대해 대비할 것입니다.”
“알았어요. 아까 말한 정보를 가능한 한 서둘러 모아주세요.”
“예, 루주.”
고개를 숙인 백섭광이 몸을 돌려 나섰다.
“선인의 경지?”
그 뒤에 원예는 혼잣말과 함께 살포시 미소 지었다.
**
간밤에 엄청난 공력을 받은 철비완은 날이 밝도록 운기에 집중했고, 아침을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눈을 떴다.
운기를 마친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손을 들어 들여다본 일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단박에 이십 년은 젊어진 듯 몸 안에 활력이 가득한데 실제로 들여다본 손 역시 젊은 사람의 그것인 양 윤기마저 흘렀다.
기운은 또 어떤가.
전에는 힘을 쓴다면 근력을 이용하는 것이라 여겼더니 지금은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팔과 다리에 내공이 가득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 차이였구나!
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수가 보기에 과거 철비완은 얼마나 한심했을까.
모를 때야 검법의 고하에 따라 실력이 나뉜다고 여겼더니 내공의 운용과 배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철비완은 새삼 깨달았다.
몸을 점검한 철비완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이제 나오나?”
“그래, 얻은 것이 있었소?”
대청에 있던 황종관과 청강의 질문에 철비완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왜 이러나?”
“맹주께서 베푸신 일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돼지 목에 진주를 건 꼴이나 절대 맹주와 진인, 그리고 진 대협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나직한 철비완의 음성이 얼마나 진중하던지 듣는 황종관과 청강은 넉넉한 미소를 얼굴에 담았다.
“일어나게.”
황종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철비완의 팔을 받쳐 들었다.
“무공이란 사람이 익히는 것, 그것을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협을 수호하는 영웅도 되고, 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인도 될 터이니 이제부터의 마음가짐이 중요해.”
도를 사용하는 황종관의 성품과 도끼를 부리는 철비완의 성향이 비슷해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통하는 면도 있었다.
“실력이 부족하다 해서 바른 일을 피한다면 그는 아예 무공을 익히지 못한 것만 못해.”
“맹주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답을 들은 황종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얼른 가서 요기하고, 한 시진 뒤에 이리 오게. 내일이 대결이니 준비할 것이 많아.”
철비완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뒤에 거처를 빠져나간 뒤였다.
“아까 말씀 도중에 묘하게 웃으셨는데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셨소?”
“호법에게 한 말이 어쩐지 제게 주는 조언처럼 들려서 웃었습니다. 소림과 무당, 아미를 상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새삼 깨달았는데, 젊은 친구가 참으로 무서운 가르침을 주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황종관의 말을 들은 청강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마교삼절이 쉽지 않을 텐데 선인의 경지를 들여다본 실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를 말씀이요. 저 나이에 선인의 경지를 보았으니 진 대협이 맹주와 내 나이가 된다면 도대체 어디에 가 있을지 그것이 자못 궁금하다오.”
청강이 먼저 시선을 돌렸고, 황종관이 이어 고개를 들었다.
귀혼곡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