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75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75화
은천검제
제75화
저녁을 맞은 홍화루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죄를 지었다거나 부끄러울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굳이 정문을 통해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진무린은 홍화루의 뒤편으로 돌아 가볍게 몸을 날렸다.
삽시간에 3층에 오른 진무린은 불빛이 은은하게 담긴 창을 가볍게 두들겼다.
문을 연 것은 원예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머리 모양, 냉정한 표정, 차가운 눈매까지 원예 역시 변함이 없었다.
“인사조차 없이 떠나셨던 공자께서 이리 찾으신 연유는요?”
진무린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백섭광을 통해 인사를 건넸다는 변명 따위 해서 뭐할까.
“아미의 장로들과 제자들을 상대하고 바로 온 길이다. 그들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짐작하거나 아는 바가 있다면 듣고 싶다.”
“이야기가 짧지 않겠네요.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원예가 비켜선 다음이었다.
훌쩍 안으로 들어선 진무린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아 내려섰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고, 전광석화처럼 빠른데 또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날렵한 동작이어서 원예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진무린이 들어서기 무섭게 시비 셋이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곧바로 차를 올려놓았다.
몇 번이나 보았지만, 늘 신기하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아미의 장로 두 사람과 제자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차를 마시러 온 것은 아니어서 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겪은 일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어차피 정도맹의 무인들이 지켜보았던 일이라 입을 다문다 해도 홍화루는 바로 알 일이기도 했다.
“모산의 문주는 술사를 혈교의 무랍 존자로 짐작하던데 아는 바가 있나?”
“혈교에 관한 정보가 최근에 꽤 올라왔어요. 무랍 존자는 흑사련을 일으킨 마등처럼 최근 혈교를 새롭게 일으킨 장본인이에요. 그는 또 무공도 수준에 이르렀다는데 임독양맥을 타통했다는 평가가 있어요.”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입을 열었다.
“하후도라고는 들어봤어?”
“소능산에서 공자와 마주쳤고, 그가 대단한 무공을 발휘했다는 사실은 들었어요.”
황종관과 청강에게 말했던 일이고, 이곳 홍화루에서 빤히 보이는 소능산에서 있었던 일이니 원예가 모른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출신에 관해 아는 게 있나?”
원예는 답을 하지 않은 채 진무린을 또렷하게 보았다.
잠시 눈싸움 아니 눈싸움을 벌인 뒤였다.
“벽계와 구주가 있어요.”
원예가 각오한 듯 입을 열었다.
“전설에 나오는 이름이 아니다?”
“아버지 이안공자와 소녀가 구주의 후예니까요.”
진무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 상태에서 원예는 말을 이었다.
“벽계와 구주는 백오십 년 전에 크게 싸웠고, 이십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이후 상대방이 무력을 사용하기 전에는 강호에 나서지 못한다고 약속했고요.”
믿기는 어렵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하후도가 걸린다. 그래서 진무린은 답답한 심정을 나직한 숨으로 털어냈다.
“강호의 세 가지 보물이 바로 벽계에서 구주가 받은 물건이에요.”
“흠.”
진무린의 반응을 본 원예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그 벽계와 구주의 근거지는?”
“공자가 몸담은 은천문과 비슷하지요. 진법으로 가려져 있어 외부인은 출입하기 어렵고, 그들은 활동하지 않으니 찾아갈 방법도 없어요.”
“귀혼곡이 구주의 후예라 하지 않았나?”
“우리는 구주의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에요.”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야기가 지치게 하는 느낌이어서 진무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벽계가 굳이 특정 세력을 정해 강호를 일통하려는 이유는?”
“그때마다 달라서 이번 역시 짐작하기 어려워요. 다만, 자신들을 천신의 후예라 여기는 벽계의 성품으로 보아 강호를 일통한 뒤에 구주를 상대하게 하지 않을까 짐작해요.”
진무린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앞에서 심부름이나 한다는 하후도가 진무린을 꼼짝 못하게 억압할 수준이니 그보다 강한 자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누구도 감당하기 어렵다.
바꿔 말하면, 강호의 지금 수준에서는 엄소동 같은 무인을 감당할 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힘을 지닌 이들이 굳이 다른 세력을 내세워 강호일통을 할 필요가 있을까?
진무린은 벽계와 구주의 움직임에 원예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했다.
직접 상대해 보았던 하후도와 엄소동은 그저 장난처럼 강호일통을 노리거나 그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려놓은 것처럼 일정하게 타오르는 촛불이 방 안을 밝혔는데 진무린과 원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오늘 고맙고 다음에 다시 오지.”
“그러세요.”
오지 말랄 줄 알았던 원예가 순순히 진무린의 말을 받았다.
**
은천문에 도착한 모려원과 종무헌은 가장 먼저 문주 임운령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제자 모려원이 문주를 뵈어요.”
“제자 종무헌이 문주를 뵙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임운령은 팔을 뻗어 탁자를 가리켰다.
임운령이 앉기를 기다린 모려원과 종무헌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기억을 찾았다고?”
“예, 문주. 대사형의 도움이 컸습니다.”
임운령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잃어버렸다고 들었다. 게다가 실종된 이후부터 귀혼곡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무언가 말하려던 모려원을 향해 임운령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듣기만 해라.’
임운령이 전하는 바는 분명해서 모려원은 멈칫한 뒤에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에 관한 본문의 판단은 이틀 뒤에 있을 장로회의에서 결정할 참이다. 너는 그동안 명성관에서 지내되, 전 사부와 무헌이를 비롯한 그 누구와도 만나서는 안 된다.”
모려원이 시선을 들었을 때, 임운령은 냉정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또 눈빛만은 염려와 근심이 담겨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그는 모려원이 진무린의 어깨를 뚫은 일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느냐?”
“장로회의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모려원의 대꾸를 들은 임운령이 한숨 같은 웃음을 보였다.
“과정이 어떻고, 결과가 어찌 되든 우선은 무탈하게 돌아와서 다행이다. 네가 힘겨운 동안의 과정을 살피지 못했으니 누구도 죄를 추궁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본문의 제자가 검을 잃어버렸으니 그에 대한 반성은 있어야 할 것이다.”
“예, 문주.”
숨을 돌리는 것처럼 임운령은 종무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천삼절을 쥐잡듯 몰아댔다고 들었다.”
“그들 중 무심창이 대사형을 함부로 언급하여 맞선 일이 있으나 밤에 재차 만나 화해했습니다.”
“이놈. 강호에서는 사소한 언행 하나가 인과 연을 만들고, 은과 원을 쌓는다. 그 점을 명심해라.”
“최대한 그리하겠습니다.”
“이후 또 누군가 너의 대사형을 욕보이면 어찌할 테냐?”
질문을 던졌던 임운령이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단박에 종무헌의 눈썹이 머리칼에 닿을 정도로 치솟은 탓이었다.
“대사형이란 녀석은 벌써 강호의 배분이 나보다 높은 지경이고, 사매는 기억과 검을 잃어버린 데다, 막내 사제라는 놈은 일만 생기면 눈썹을 치켜세우니. 쯧쯧. 본문에서 너희 셋이 가장 뛰어난 것이 복인지, 화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탄식처럼 혼잣말을 뱉어낸 임운령이 나가란 의미로 손을 밖으로 저었다.
“이미 밤이 깊었다. 가서들 쉬어.”
“물러가겠습니다.”
모려원과 종무헌이 포권을 보인 뒤에 몸을 돌렸고, 문에 닿았을 때였다.
“려아야.”
임운령이 모려원을 나직하게 불렀다.
“잘 돌아왔다.”
눈 끝으로 웃는 모려원을 보며 임운령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흑사련 호북 지부로 돌아온 진무린은 운진과 소림, 무당의 제자들이 둘러선 마당으로 향했다.
처음 느꼈던 음험하고 괴기한 기운은 사라졌으나 달빛이 무색할 정도로 요란한 횃불 아래 이마에 부적을 붙인 채 나란히 서 있는 조연명과 조성명, 아미 제자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다녀왔습니다.”
“가셨던 일은 잘 보셨소?”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대화를 나누며 진무린은 턱까지 늘어진 부적을 붙인 아미 일행을 돌아보았다.
강시라고 말만 들었지, 이렇듯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정도맹과의 연락은?”
“이미 오전에 비월이 움직였으니 지금쯤이면 아시리라 짐작합니다.”
명허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구름이 짙다더니 강호에 피가 범람하리라는 전조처럼 느닷없이 죽은 자가 되살아나고, 벽계와 구주라는 세력마저 등장했다.
마음 같으면 당장 정도맹으로 달려가 청강의 곁에 있으련만, 애꿎게 당할지 모를 운진과 명허, 수인자를 생각하면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도 어려웠다.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명허와 수인자는 사제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와라.”
“사숙이 여기 계신데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그럴 것 없어. 아직 저녁도 제대로 못 했을 테니 두 시진 정도 식사와 휴식을 취한 뒤에 와. 나는 문주와 그 뒤에 넉넉하게 쉬겠다.”
두어 번 권한 뒤에야 명허와 수인자가 자리를 떠서 아미의 일행 옆에는 진무린과 운진, 그리고 정도맹의 무인만 남았다.
내일은 필시 힘겨운 하루가 되리라.
대신 청강의 반가운 얼굴도 볼 수 있으니 사람 일에는 반드시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
문서량 입구의 객잔은 화산의 소유였다.
객잔 주인은 비둘기를 날려 소식을 전했고, 비보를 전해들은 화산은 급히 일대 제자 스물넷과 이대 제자 마흔여덟 명을 파견하여 청강과 진충무관을 수습하였다.
세상을 피해 은거했다고 하나 은천문과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견식한 무공이 있고, 화산과 맺은 인연 또한 깊었다.
화산의 장문인 은혼은 청강의 직계제자로 날이 밝을 무렵 창에 꿰인 그의 시신을 확인했고, 그 순간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세 번이나 크게 피를 토해냈다.
한 시진을 진정한 은혼은 아침 일찍 흉수들의 시신을 재차 확인한 뒤에 표충량을 불렀다.
“사부께서 네게 우화등선하신다 하였더냐?”
기혈이 뒤집혀 낯빛이 하얀 은혼이 눈이 퉁퉁 붓고 겁에 질린 표충량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미욱한 제자는 그리 들었습니다.”
“사부께서 내리신 말씀을 제대로 전했는데 어찌 미욱한 제자라 하느냐.”
은혼은 말을 마친 뒤에 물끄러미 표충량을 보았다.
겁에 질린 눈을 보면 총명하다고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런데도 표충량은 제 탓에 청강이 죽었다는 자책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자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거나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겠다.
은혼은 나직하게 숨을 들이켠 후에 몸을 일으켰다.
“가볼 곳이 있으니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는 표충량과 함께 양인각을 나섰다.
“내 잠시 이 아이와 함께 정상에 오를 것이니 너희는 이곳에 있어라.”
지시를 마친 그는 손을 내밀어 표충량을 안아 들었다.
훌쩍!
발을 한 번 내는 것으로 몸을 띄운 은혼은 놀라운 경공을 보이며 단숨에 연화봉의 정상에 올랐다.
바람이 매섭게 불었으나 은혼이 기운을 쏟아 감싸주어서 곁에 있는 표충량은 벌판에 선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사부께서 절대 다른 이에게는 전하지 말라 하셨다고 들었다. 맞느냐?”
“예. 제자는 그리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은혼은 시선을 들어 먼 하늘을 보았다.
청강은 이 작은 아이에게 말을 전했고, 반드시 은천문의 진무린에게 직접 전하라 하였다.
그가 그리했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일이다.
“은천문의 진무린 대협에게 전하라는 말씀을 모두 기억하느냐?”
“혹시 잊을까 계속 외우고 있었습니다.”
“사부께서 네게 맡긴 일이다. 잘할 수 있느냐?”
“제자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영특함과 올곧은 저 심성이 예뻐 사부인 청강이 그리도 표충량을 아꼈으리라.
“진무린 대협은 사부를 모시고 은천문에 들렀을 때 한 번 뵌 적이 있다.”
표충량이 이제야 떨구었던 시선을 돌려 은혼을 보았다.
“참으로 강한 무인이더니 사부께서 네게 인연을 주시려 했던 모양이다. 너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잠시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진 대협을 뵙게 주선할 것이다.”
“제자는 말씀에 따를 뿐입니다.”
아직 어린 제자의 기특한 답을 들은 은혼은 먼 하늘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반드시 이 아이를 진 대협에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 뒤에 저 하늘 어딘가에 신선이 되어 지켜볼 사부에게 굳은 다짐을 건넸다.
“저기 구름이 보이느냐?”
“예.”
“그 뒤에 사부께서 계신 모양이다.”
“제자는 복이 없고, 공부가 일천하여 진인을 뵙지 못하겠습니다.”
내놓는 답을 들을라치면 꿋꿋한데 저 먼 곳의 구름을 향한 표충량의 눈에는 신선이 된 청강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그를 떠나보낸 슬픔의 눈물이 그득 담겨 있었다.
표충량을 돌아본 은혼이 아프게 웃으며 먼 하늘의 구름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