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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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71화
은천검제
제71화
귀혼곡을 나선 진무린은 모려원과 종무헌에게 몸을 돌렸다.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어떤 강요나 억압이 있더라도 함부로 죄를 인정하거나 무릎 꿇지 마라.”
진무린이 단단하게 당부를 전한 뒤였다.
“대사형. 나중에 뵙겠습니다. 문주, 강건하십시오.”
모려원과 종무헌이 진중하게 인사를 올렸고, 그렇게 몸을 돌려 은천문으로 향했다.
“종횡주를 맬까 하오.”
“그렇게 하십시오.”
기회를 엿보던 운진이 품에서 종횡주를 꺼내 양쪽 발에 묶었다. 그는 분명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곳에 올 때처럼 급하게 달리지는 않을 테니 너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말씀이오, 진 대협. 그렇지 않아도 짐이 되면 어쩔까 내심 걱정하던 참이라오.”
“오는 동안 익히셨던 대로 도력을 조절하시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진무린의 조언이 끝났을 때 종횡주를 묶은 운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진 대협. 내공은 조절이 가능한 모양이나 도력은 조절이라는 방식이 생소하다오. 익힌 술법을 발휘하는데 경중을 조절하는 방식이 없어 그렇소.”
운진의 말에 진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으로 달려올 때는 분명 도력을 조절하신 것으로 압니다. 당장 경공을 펼치시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것이 말이오. 종횡주는 일정한 속도로 달리게 하는 부적인데 진 대협의 말씀을 따르니 조절되는 것이 아니겠소? 이는 처음 경험한 일이오.”
“그렇다면 술법은 강도를 조절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까?”
“그렇소, 진 대협. 불을 일으키는 술법을 부릴 수는 있으나 불길이 크고 작게 조절하지는 못하오. 종횡주도 마찬가지라오. 달려라, 서라, 두 가지 술법밖에 없었지요.”
술법을 부리는데 강약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모산의 문주가 한 이야기이니 의심할 여지는 없으리라.
“문주. 잠시만 걸어도 되겠습니까?”
“그야 빈도가 더 바라는 일이오.”
반가운 투의 운진과 함께 진무린은 산책하듯 걸어서 산을 내려갔다.
운진은 연륜에 따른 눈치가 있었다.
그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진무린을 살피고는 그때부터 입을 다물었고, 경치를 구경하는 사람처럼 덤덤하니 걸음을 옮겼다.
내공은 조절할 수 있으나 도력은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은 들여다보면 그다지 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뭐지? 뭐가 이리 잡힐 듯 말 듯 아른거리지?’
그런데도 무언가가 진무린의 뒤통수에 매달려 간질이는데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맹세컨대 이런 적은 없었다.
묵룡심법까지는 수련을 통해 익혔고, 등룡창천은 부지불식간에 쥐었으며 중단전은 소수음공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었다.
깨달음이라 하더니.
침묵하며 산을 내려오던 진무린은 가볍게 웃었다.
최근의 일들을 생각할 때 단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공연히 시간만 끌었나 봅니다.”
“얻으신 것이 없는 게요?”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해서 잠시 매달려보았으나 자질이 부족해 당장은 어려운 모양입니다.”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는 운진을 향해 진무린은 솔직하게 느낀 바를 전했다.
“진 대협이 자질이 부족하다 하시면 빈도는 얼굴을 들기 어렵소.”
“문주께서는 술법으로 양묘를 상대하실 정도인데 어찌 자질이 없다 하십니까?”
“술법이란 도력을 쌓고, 그에 합당한 주문을 외울 뿐이오. 내공처럼 힘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기운을 얻어쓸 뿐이니 어찌 진 대협의 경지와 빈도를 비교하겠소?”
함께 걷는 길이었다.
“도력을 쌓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운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표현한 것이라 보시면 된다오. 그렇게 얻은 기운을 통해 몸을 수련하면 장수불사에 이르고, 다른 면으로는 술법을 부리게 되지요.”
진무린이 진중하게 듣고 있는 것을 확인한 운진은 말을 계속 이었다.
“도력을 쌓는다고 하나 실제로는 몸에 담긴 것이 없으니 이유는 밖의 기운을 얻어 쓰는 터라 그렇소. 이후 발전하면 주변의 기운을 무한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진 대협이 경험했던 양묘의 세계가 바로 무한의 기운을 이용한 술법이라오.”
진무린은 걸음을 멈췄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언가가 관통했고,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고요한 가운데 눈앞이 캄캄하게 변해서 흡사 양묘가 만들었던 술법의 세계에 다시 빠져든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운진은 진무린의 반응을 보며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혹 진무린의 몰입에 방해될까 숨소리마저 조심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사물이 지닌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들었다. 조절하려 하지 마라. 그것들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빌려 쓸 뿐이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공은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주체하기 어렵다.
그 순간이었다.
“등룡창천 역시 과정이더구나. 아비는 보았지만, 도달하지 못했다.”
부친 진용선이 해주었던 말이 진무린의 뇌리에 떠올랐다.
양묘가 술법을 이용해 그만의 세상을 만들었다면 등룡창천의 묵빛 기운 역시 진무린의 세상이 아닐까.
진무린의 세상이 완벽하다면 하후도 아니라, 그 어떤 자도 검을 피하지 못하리라.
한순간,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짜릿한 기운이 진무린을 관통했고, 이어 세상이 돌아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염려 가득한 운진의 얼굴이었다.
“진 대협?”
운진이 빠르게 시선을 가져왔다.
“문주 덕분에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이후의 과정이 수련인지 깨달음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방향을 일러주신 문주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별것 아닌 말씀에 진 대협이 고개 숙이면 구명지은을 입은 빈도는 아예 절을 올려야 한다오.”
양손을 맞잡은 진무린에게 달려든 운진이 반갑고 고마운 얼굴로 인사를 만류했다.
**
홍화루의 3층, 원예의 거처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연속해서 설란과 은향이 작은 종이를 가져왔고, 그것을 읽은 원예는 촛불에 불살랐다.
“루주. 총관입니다.”
또 중간중간, 백섭광이 들어와 중요하거나 혹은 사소한 모든 것을 보고했는데 원예는 냉정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지시하신 대로 최초에 아미의 죽음을 보고한 정도맹의 무인을 재차 조사했으나 의심스러운 정황은 없었습니다.”
이미 그의 일가친척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 최근 씀씀이까지 모두 분석한 뒤였다.
“마등에 이어 아미파의 장로 두 사람과 제자 열이 되살아난 일이에요. 그들이 왜 정도맹이 아니라 흑사련의 호북지부에 거처를 정했고,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고 보세요?”
“정도맹의 맹주와 구대문파의 장로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무언가 돌발적인 사실을 발표하리라 봅니다.”
입술에 힘을 준 원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시겠지요?”
“암연은 강호의 삼대 정보조직에 비견할 수준이거나 그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녔습니다. 지금쯤이면 이미 내용을 파악했을 테고, 은천문에서도 대책을 세웠을 것입니다.”
백섭광의 보고가 있은 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백면호리가 가져온 책자에도 암연에 관한 내용은 별로 없었어요. 장 노대란 인물에 관한 조사는요?”
“은천문 자체가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서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외부로 나서는 인물도 한정되어 있어서 그만큼 그곳의 일을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최근 수상한 움직임은요?”
“풍령관의 경계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앞을 노려보던 원예의 시선이 백섭광을 향했다.
“그쪽 역시 제한된 인원만 출입할 수 있고, 특히나 관주의 근처에는 정해진 시비와 수하들만 다가가도록 정해져 있어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풍령관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외부인이 접근하면 몸을 숨길 곳조차 없습니다.”
원예는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시작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원예가 물었고, 백섭광이 묵직하게 답했다.
“풍령관을 사주했다고 봐야겠지요?”
“아직 그들을 겪어보지 못해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루주의 판단이 옳다고 여깁니다.”
“책자에 나온 능력이라면 벽계를 감당할 무인은 강호에 없어요. 그나마 기대할 것은 구대문파와 정도맹인데 이미 제 몫을 하기 어려운 현실이니 남은 것은 정말 풍령관의 강호일통인가 싶네요.”
원예의 탄식이 쏟아진 직후였다.
“루주. 설란입니다.”
밖에서 음성이 들린 직후에 설란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원예는 그녀가 전해준 짧은 내용을 읽고는 촛불에 종이를 불살랐다.
“공자께서 모산의 문주와 함께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내용이에요.”
달관한 사람처럼 원예는 차갑게 웃었다.
“공자를 그대로 두고 보실 참입니까?”
“무슨 뜻이죠?”
“말씀하셨듯이 공자의 무공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방법이 있나요?”
“공자를 설득하셔서 귀혼곡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구주의 손길을 기다리십시오. 공교롭기는 하나 소수음공이 공자에게 간 것이 어쩌면 강호삼보를 얻으라는 하늘의 안배일지 모릅니다.”
내내 냉정했던 원예가 차갑게 웃으며 백섭광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총관은 공자가 하루속히 상등을 떠나달라고 했던 것으로 알아요.”
“조용하게 넘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벽계의 세상이 오면 또다시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며, 전란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바꾼 이유는요?”
“벽계가 나설 것이라 짐작하지 못했을 때의 판단이었습니다. 벽계와 구주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버틸 집단을 꼽으라면 당연히 은천문일 테고, 그곳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정한다면 당연히 진 공자입니다.”
원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진 공자는 절대 의지를 꺾으실 분이 아니에요. 주변이 죽어 나가는데 귀혼곡에 숨어 있을 분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러니 지금은 다시 나타난 아미와 풍령관의 움직임에 집중할 때예요.”
말을 하던 원예의 눈이 냉정하게 빛났다.
**
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경공을 발휘했다.
종횡주에 의지한 운진이 무섭게 튀어나갔는데 진무린은 그를 내공의 힘으로 붙들어 조절했다.
덕분에 운진은 경공을 여유 있게 익힐 수 있었는데 급한 걸음이 아니었고, 등룡창천의 기운을 진무린이 완벽하게 조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 시진 정도 달린 뒤였다.
경공에 제법 능숙해진 운진은 진무린이 의도한 대로 발을 내디뎠고, 필요한 만큼 몸을 솟구쳤다.
“문주! 저 앞에 보이는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알겠소, 진 대협.”
반 시진을 더 달린 진무린이 적당한 장소를 가리켰고, 두 사람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느긋하게 달린 덕분일까?
이전과 달리 운진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후우. 경공은 참으로 대단하구려. 원래 종횡주라는 것은 관도를 빠르게 오가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진 대협 덕분에 새로운 것을 배웠소.”
지나온 걸음이 신기한 듯 뒤를 돌아보았던 운진이 얼른 시선을 가져왔다.
“그렇더라도 진 대협이 안 계시면 또다시 튀어나갈 테니 빈도 홀로 종횡주를 쓰는 것은 어려울 것 같소.”
도력을 조절하는 일이 생소하다는데 어쩌겠나.
이제 익히기 시작했으니 언젠가는 운진도 속도를 조절해 경공을 펼칠 수 있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진무린이 호흡을 고를 때였다.
“좋구려.”
운진이 감탄처럼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모산에서 늘 같은 풍경만 보며 세월을 보내다가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같은 산, 같은 초원, 같은 하늘이 달리 보이오.”
주변을 둘러보던 운진이 계면쩍은 얼굴로 진무린을 향했다.
“사부께서 워낙 엄하셨다오.”
“그러셨군요.”
“눈을 뜨면 감을 때까지 곁에 있어야 하는데 당최 외부출입을 하지 않으시니 방법이 없었고, 등선하신 이후로는 그것이 버릇이 되어 밖에 나가기가 두려웠다오. 양묘는 빈도와 달랐지요.”
엄한 사부 아래에서 순종한 운진과 반항한 양묘의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모산도 소유한 객잔과 경작하는 땅이 있을 것 아닙니까?”
“물론 객잔 두 개와 토지가 있는데 관리하는 이가 해마다 한 번씩 정산하는 것이 전부라오. 실제 수입은 부적을 그려주고 얻는 것이 더 크기도 하고.”
힘겹지 않은 길이라 굳이 운기를 할 것 없었고, 운진 역시 명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눈치였다.
“문주. 전에 귀혼곡으로 달릴 때 도력이 부족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력은 쌓은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때는 왜 명상이 필요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운진은 뭐 이런 질문을 진무린이 하는가 싶은 반응이었다.
“지금 술법을 발휘하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나 종횡주로 달리면서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소? 백회를 통해 사물이 지닌 기운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어 그렇지요.”
“확실히 내공과는 다른 기운이고, 방식이군요.”
“빈도가 내공을 잘 몰라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데 진 대협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런 듯하오.”
“화산의 청강 진인은 내공이 극에 달했는데 도를 쌓는다 하십니다. 그 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허허. 그런 높은 경지를 빈도가 감히 어찌 알겠소? 다만, 청강 진인이라는 분은 내공과 외부의 기운을 조절하지 않을까 짐작만 한다오.”
진무린은 몰랐던 것을 새로 깨닫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반을 넘어간 태양이 출발을 재촉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