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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69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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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69화

은천검제

제69화

 

참으로 힘겨운 일이 많았던 하루였다.

그러나 상한 사람 없이 양묘 일당을 물리쳤고, 진무린과 종무헌이라는 든든한 무인이 나타났음에 기인촌의 저녁은 그럭저럭 유쾌함을 되찾았다.

입구의 진을 재차 확인한 이안공자는 진무린과 종무헌을 위해 약소하나마 최선을 다한 연회를 준비했다.

진무린과 모려원, 종무헌, 운진, 이안공자가 탁자 하나를 차지했고, 백면호리와 요정, 기인촌 촌민들이 그 옆의 좀 더 기다란 탁자에 모여 앉았다.

적당히 먹었고, 술까지 돌자 분위기가 떠들썩했는데 역시 주인공은 요정이었다. 모려원의 손을 잡아준 대목에서는 박수갈채가 나오기도 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업고 뛰었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찬사가 없어 서운한 백면호리의 투정이 나온 뒤였다.

“진 대협.”

이안공자의 좌안이 나직하게 진무린을 불렀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우선 본문으로 돌아가 사매의 무탈함을 알리고 문주의 지시를 받을까 합니다.”

감출 것 없어서 진무린은 있는 대로 답을 주었다.

“그러시면 상등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시오?”

“흑사련 지부와 마등을 잡기 위해 갔던 곳이라 딱히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흠.”

이안공자는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진 대협. 이곳은 기인들이 사는 곳이오. 혹여 나중에 도움을 청하면 한 번쯤 돌아봐 주시겠소?”

그런 이안공자가 낯빛을 바꾸며 속내를 비쳤다.

“사매가 위급할 때 도움을 주셨습니다. 강호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반드시 달려오겠습니다.”

“고맙소, 진 대협. 힘겨울 때 도움을 청할 분이 생겨 진심으로 반갑고 기쁘오.”

이안공자는 진법이 깨진 것이 마음에 걸린 눈치였다.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던 이안공자는 진무린의 답을 듣자 흡족한 투로 표정을 바꾸었다.

 

**

 

정도맹에 도착한 일행은 부맹주 소강명과 약연, 자경을 구금하였고, 곽가와 풍령관의 수하로 보이는 무인을 따로 가두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빈승이 고생한 것이 무엇이 있겠소. 다만, 백면호리를 추적한 일에서 아직 성과가 들려오지 않아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황종관의 치하에 보우는 넉넉하게 대꾸했다.

“장로회의를 개최하려면 빨라도 보름은 걸릴 테니 그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시간을 갖겠소이다.”

“편히 하십시오.”

황종관과 청강에게 인사한 소림과 무당의 장로들이 집무실을 나섰다.

“진인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나는 근처에 있는 인연이 있는 무관을 찾아 잠시 지내고 오리다. 이왕 나선 길이니 장로회의의 결과를 보고 본산으로 돌아갈까 하오.”

“소림과 무당이 뜻을 같이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되어야지요.”

답을 하는 청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친구를 생각하십니까?”

황종관의 질문에 청강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대협은 허튼 말을 할 분이 아니오. 백면호리의 억울함을 말했는데 이리 급히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 점이 계속 걸리는구려.”

“모든 일에는 순서와 과정이 있는데 젊은 친구라 아직 그 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회의를 마치면 한번 찾아볼 생각이니 그때 동행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럽시다. 그럼 노도는 나가는 대로 무관으로 바로 출발하리다.”

“다녀오십시오.”

마침내 청강마저 맹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후.”

긴 숨을 내쉰 황종관은 반쯤 홀가분해진 심정으로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뭐라 해도 마등을 제거해 흑사련을 사실상 궤멸시켰고, 청강이 요구했던 억울한 면을 바로잡을 증거까지 확보해 돌아온 길이었다.

풍령관의 수하가 입을 열지 않고 있으나 정도맹으로 돌아온 이상 그의 신분을 밝히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 크게 걸릴 것도 없었다.

황종관은 진무린을 떠올렸다.

그가 억울하다고 했으니 필시 백면호리는 시신을 탈취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단순하게 돌아가던가.

당장 구대문파 장로들을 모아놓고 부맹주와 약연, 자경을 지하 뇌옥에 가두려면 소림과 무당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청강이 진실을 밝혀달라던 일을 수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셋을 지하 뇌옥에 가둔 뒤에 백면호리의 일을 바로잡으면 되지.’

마음을 굳힌 황종관은 쌓여 있던 일들에 시선을 돌렸다.

 

**

 

촌민들이 지내는 곳은 넓지 않았다. 

그 바람에 긴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갑갑한 면이 있었다.

자리가 끝날 무렵, 진무린은 이안공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매, 사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안애에 들러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우리 걸음으로 이각쯤 걸리는 거리요. 오르시면 귀혼곡이 내려다보여 풍광이 나쁘지 않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모려원, 종무헌과 걸음을 옮겼다.

기인촌을 나서 물웅덩이에 도착한 세 사람은 경공을 발휘했고, 얼마 걸리지 않아 이안애의 중간 절벽에 섰다.

고개를 돌리면 바위로 된 절벽이 수직으로 솟아 그 끝에 이안공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서 있는 곳의 저 앞으로 다시 절벽이 나와 귀혼곡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저녁나절이었다.

이제 막 떠오른 달이 비추는 가운데 세 사람은 절벽 아래의 풍광을 구경하듯 시선을 아래로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진무린은 지금껏 있었던 이야기를 가감없이 모려원에게 전해주었다.

놀랄 테고, 당황스러울 것이며, 미안할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은천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과거의 행적을 추궁당할 테니 모든 것을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 좋았다.

짧게 정리한다고 하였는데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이미 달이 이마 위로 떠올라 있었다.

“본문에 돌아가면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을 게다. 그럴 때면 나와 사제를 믿고 굳건하게 버텨라.”

“대사형. 장로들의 추궁이 매서울 것입니다. 혹시 염두에 둔 계획이 있으십니까?”

종무헌의 질문에 진무린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등이 본문의 무공을 안다는 것은 나와 청강 진인, 문주께서만 아는 일이다. 은천령을 거부하신 것으로 보아 문주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실 테고.”

모려원을 돌아본 진무린이 말을 이었다.

“본문으로 돌아가면 사매, 사제와 함께 원남으로 가겠노라 말씀드릴 생각이다. 그곳에서 시작하자. 곽가란 자를 잡은 일도 있으니 분명 혈교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진무린을 찌른 일, 은천문의 무공을 유출했을지 모른다는 염려, 검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 모려원의 표정이 어두웠다.

“사제는 사매가 울던 모습을 기억하느냐?”

“그렇습니다, 대사형.”

그래서 진무린이 엉뚱한 질문을 건넸고, 종무헌이 바로 답을 냈다.

“나는 그때부터 사매가 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되었다.”

“소제는 사저에게 등도 맞았습니다. 그때의 일장이 어찌나 강맹하던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습니다.”

종무헌이 이렇게 과장된 표정과 말투를 꺼내 든 것은 모려원을 위한 최선의 배려였다.

세 사람은 은천문에서 함께 수련할 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정말 소매가 그리했나요?”

“사저가 그리 말씀하시면 소제가 모함한 것이 됩니다.”

“사제는 원래 과장이 심했어.”

“대사형. 억울합니다.”

때로는 모려원이 기억 못 하는 사소한 이야기도 있어서 함께 웃기도 했다.

유쾌했다.

또 그 덕분에 잠시나마 앞에 놓인 걱정들을 미뤄둘 수 있었다.

시간이 훌쩍 흘러 달이 높다랗게 떴는데 그때쯤 모려원은 확실히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한바탕 웃고 난 다음이었다.

“대사형. 감사드려요. 사제, 고마워.”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려원이 진지한 얼굴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고,

“사저를 찾아 강호의 절반을 돌았습니다. 사저를 다시 뵙게 된 기쁨을 소제는 감히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남은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종무헌이 진중하게 답하여 모려원을 감동케 하였다.

세 사람은 다시 절벽 아래를 향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천문으로 돌아가면서부터 힘겨운 일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텐데 당장은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하는 심정이었다.

 

**

 

날이 밝은 귀혼곡에는 어수선함과 활력이 뒤엉켜 맴돌았다.

일찍 일어난 진무린은 모려원, 종무헌과 함께 운기로 하루를 시작했고, 이어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치료를 위해 방문한 우안을 맞았다.

“진 대협. 오늘은 벌어진 상처를 붙일까 합니다. 통증이 상당하실 텐데 효과는 탁월할 것이오.”

전날에 진무린의 상처에 금창약을 잔뜩 발랐던 우안이 오늘은 가져온 숯불에 연검을 달구고 있으니 참으로 생소한 시술이었다.

“준비되셨소?”

“치료받는 사람이 준비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편안하게 하십시오.”

좌안이 마른침을 삼켰고, 관심 많은 백면호리, 그리고 진무린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모려원과 종무헌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숯불에서 연검을 꺼낸 우안이 몇 차례 얼굴 근처에서 열기를 확인하더니 마침내 진무린의 어깨로 가져갔다.

치이익.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소리와 함께 노릿하니 살 타는 냄새가 풍겼다.

모려원의 검에 의해 얻은 부상이었다.

‘대사형?’

‘괜찮다. 충분히 견딜 만하다.’

얼굴 전체를 찌푸린 백면호리와 다르게 진무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치료를 견뎠다.

“후우. 다 끝났소이다.”

“고맙습니다, 공자.”

“살을 태우는 독특한 치료법에도 믿고 맡겨준 데다, 통증에 인상 한번 변하지 않으니 우안이 진 대협께 오히려 감사드리오.”

치료를 마친 우안은 진무린에게 승복한 듯 공손한 어투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탕약을 준비하였으니 오늘 두 차례 드시면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하실 게요.”

이런 재능 있는 이가 강호에 있었다면 아프고 병든 이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까. 그러나 어쩌면 이안공자와 촌민들에게는 상처가 될 말이라 진무린은 그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진무린은 아직 인상을 찌푸린 백면호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약속을 지킬까 하니 정아를 데려오시오.”

요정이 있는 곳이라 진무린은 말투에 주의했다.

“지금? 지금 말인가?”

“바쁜 일이 있소?”

“그럴 리가! 반가워서 그렇지!”

화들짝 달려간 백면호리가 냅다 요정을 안고 돌아왔다.

“운기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잠시 봐주려고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던 요정이 긴장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몸을 잠시 살펴볼까 하는데 아프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예.”

고작 어린아이의 내공을 살피는 일이었다.

진무린은 차분하게 기운을 풀어 요정의 몸을 살폈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요정의 단전에 아직 기감이 남았는데 운용하는 방법에 금기가 두어 곳 있음도 깨달았다. 아직 요정의 내공이 일천해서 그 모든 것을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구해준 심법이라 했었지?”

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단전에서 기운을 이끌어 제대로 된 길로 두 번쯤 돌려줄 참이다.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수련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진무린은 시선을 들어 종무헌을 보았다.

호법을 서란 의미였는데 종무헌은 단박에 알아듣고 진무린의 뒤로 걸음을 옮겼다.

“뒤로 돌아서 가부좌로 앉고 눈을 감아. 분명하게 느끼도록 내기를 돌릴 테니까 기억하고.”

진무린은 돌아앉은 요정의 호흡이 안정되자 곧바로 어린아이의 등에 손을 얹었다.

백면호리가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일각쯤 지나서 진무린이 손을 뗐는데 요정은 아직 눈을 감은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왜 이런 거야?’

백면호리가 시선으로 던진 질문에 진무린은 보기 좋은 미소로 답했다.

지켜보는 동안, 또 일각쯤 지났고, 그제야 요정이 눈을 떴다.

“정아!”

“아빠! 내기를 돌렸는데 몸이 시원해!”

“잘했다. 무공에 재능이 있으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진전이 있을 게다.”

“정말인가? 진짜야?”

“확실하오. 이 정도 재능일 줄은 몰랐소.”

“하긴, 누구 딸인데.”

기뻐하는 백면호리를 두고 진무린은 몸을 일으켰다.

“아! 무공은?”

“내기를 먼저 다스려야 하니 기회를 봐서 전하겠소.”

마지막까지 약속을 확인한 백면호리가 돌아간 다음이었다.

거처를 나서면 작은 탁자가 마당에 있고, 그 앞으로 기인촌이 있으며, 너머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종무헌과 함께 거처를 나선 진무린은 탁자로 움직였다.

모려원은 심란한 표정이었다.

은천문으로 돌아갈 순간이 되자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돌아갈 준비는 되었지?”

“예, 대사형.”

“그런데 얼굴이 왜 그리 어두워?”

“만에 하나, 소매가 정말 무공을 유출했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어요.”

모려원의 심정을 이해한 진무린은 단단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본가의 몇몇 가문은 강호에 나서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정확하게 몇 곳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만, 사매와 사제, 나를 이용하려던 것만은 분명하다.”

모려원이 참담한 시선으로 진무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은천문을 떠나 강호에 나서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매를 이용하고, 더불어 나와 사제를 노리는 것만은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모려원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에서 진무린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한 가지는 나와 사제도 어쩔 수 없으니 사매가 저들의 야욕과 핍박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 일이다. 약속하마. 세상 전체가 달려들어도 사매의 앞에서 비켜서지 않을 것이다. 당부한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고마운 마음에 울컥한 모려원이 눈시울을 붉힌 순간이었다.

진무린은 귀혼곡의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나요?”

“암연이 우리를 찾는 모양이다.”

모려원과 종무헌은 시선을 마주쳤다.

외부의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한 귀혼곡 안에서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암연의 기운을 알아챈 진무린의 능력에 놀란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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