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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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0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68화
은천검제
제68화
자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부끄러운 듯 쑥스럽게 웃었던 모려원이 놀란 기색으로 운진과 주변을 돌아보았다.
“잠시 일이 있었다. 나와 사제가 사매를 찾아 멀리 돌았는데 여기 문주께서 도움을 주셨구나.”
“소매를 찾았다고요?”
모려원의 반응이 의아했으나 진무린은 당장 내색하지 않았다.
“잠시 길이 어긋났는데 이제 됐다.”
“이상하게 잠을 떨치지 못하겠어요.”
원하는 대로 받아주란 의미처럼 앞에 앉은 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사제가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 남은 이야기는 일어나서 하자.”
“죄송해요, 대사형.…….”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모려원은 잠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투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모려원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되었소, 진 대협. 다시 깨어나면 과거의 사매분으로 돌아올 것이오.”
“감사합니다, 문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산이 벌인 일이오. 이리된 것이 모두 문주인 빈도의 책임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넉넉한 인사를 주고받은 진무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켜보던 종무헌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
생기가 돌면서 장설군은 과거의 모습을 조금씩이나마 되찾았다. 그런 장설군이 마침내 장삼도가 보는 앞에서 상체를 세웠다.
“오오-! 일어났구나! 일어났어!”
장삼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탄성을 내질렀고, 이어 줄로 매달아 놓은 목각 인형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근심을 끼쳐드렸습니다.”
“무슨 소리냐? 이리된 것에는 이 아비의 욕심도 있었다! 이제 되었다! 이제 되었어!”
몇 차례나 장설군을 다독인 장삼도가 크게 숨을 내쉰 뒤였다.
“아버지.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어디 안 좋은 구석이라도 있어?”
부친인 장삼도를 닮아 골격이 장대했던 장설군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소자가 무공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흠. 너무 상심하지 마라. 세상에는 무공말고도 할 일이 많다.”
“단전에 내공이 남아 있습니다.”
“뭐라?”
“어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에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기감도 그대로고요.”
“호오!”
장삼도는 믿기지 않는 눈을 하고서 아들 장설군을 이리저리 살폈다.
백향초를 섭취한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행운과 같은 일이었다.
“혹시 몰라 소주천이라도 해볼까 합니다.”
“아직은 이르다!”
반갑고 기쁜 것과는 달리 장삼도는 아들의 청을 단호하게 밀어냈다.
“이리된 연유가 잘못된 영약과 약재를 섭취한 뒤에 무리하게 연공한 탓이 아니냐? 이제 겨우 몸을 일으켰는데 어찌 촉박하게 굴어 구사일생의 기회를 위태롭게 하겠느냐.”
“소자는 얼른 병상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습니다.”
“네 마음을 모를 리가 있겠냐. 그러나 이는 결단코 서두를 일이 아니다. 또한, 함부로 시도할 것도 아니니 건강을 좀 더 회복한 뒤에 해보자꾸나.”
“예, 아버지.”
한시라도 빨리 몸을 일으키고 싶은 장설군의 바람을 우직한 장삼도가 확실하게 눌러놓았다.
“그나저나 진 대협의 말씀이 무공을 잃을 수 있다 하였는데 네가 다시 운기를 할 수 있다니 이는 하늘이 도우심이다!”
“그 뒤로 진 대협의 소식은 아직 전해진 것이 없습니까?”
“워낙 신출귀몰하시는 분이니 들려온 바는 없다만, 우리 부자는 진 대협께서 조금이라도 곤경에 빠지셨다고 한다면 바로 달려가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예, 아버지.”
참으로 우직한 장삼도의 말에 장설군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
진무린의 눈짓을 받은 백면호리가 촌민들과 함께 다가왔다.
이어 그의 주선으로 기인촌의 촌민들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 아이가 내 딸일세. 정이라 하지.”
마지막에 백면호리는 약속을 기억하느냐는 눈빛으로 요정을 소개했다.
“네가 정아로구나.”
“예.”
깜찍하고 영특한 요정을 향해 진무린이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였다.
“저자를 어찌하시려오?”
대략이나마 사정을 이해한 얼굴로 이안공자가 다가왔다.
“저자가 죽으면 문주 역시 위태롭다 들었습니다. 당장은 모르나 훗날 깨어날지도 모르니 금제를 가할 생각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공자가 운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문주께 금제를 가할 방도가 있으시오?”
“내공이 단전에 모인다면 도력은 백회를 개방하는 것과 같소이다. 빈도에게는 백회를 닫게 할 방도가 없으니 양묘를 완벽하게 막을 술법 또한 없다오.”
좌안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매서운 눈으로 동상처럼 서 있는 양묘를 보았다.
“그렇다면 사용하지 않는 동굴에 진을 설치하고, 그 안에 두면 어떻겠소? 음식이야 하루에 한 번씩 대롱을 통해 넣어주면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을게요.”
“그리 수고하셔도 되겠습니까?”
“귀혼곡의 진을 망쳐놓았고, 촌민들을 위협한 자요. 어찌 남의 일이라 하겠소? 게다가 모 소저의 아픈 사연이 있고, 저자의 죽음이 문주의 생사를 정하는 일이니 이는 정의를 행함과 같소.”
진무린의 염려에 이안공자의 좌안이 단호하게 뜻을 밝혔다.
“이미 진 대협께서 점혈을 하셨으나 사람의 일이란 알 길이 없는 법. 마침 우안에게 신묘한 의술이 있어 저자에게 대침을 시술할까 합니다. 그리하면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게요.”
좌안이 말끝에 돌아보자 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럼 번거로우실 일에 도움을 청합니다.”
“맡겨주시오.”
다부지게 답을 한 이안공자의 좌안이 촌민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은사로 묶고, 철쇄를 채우되, 반드시 여덟 개의 대침을 꽂으시오.”
우르르 기인들이 달려들어 양묘를 옮겼는데,
“점혈로 피를 멈추었으니 약방에서 금창약을 찾아 상처에 덧씌우다시피 바르고, 급한 경우에 대롱을 이용해 탕약을 먹이시구려.”
우안은 그를 치료할 몇 가지를 지시해주었다.
양묘를 옮기고, 죽은 열 명의 흔적을 치웠으며, 흐트러진 진을 보강하느라 귀혼곡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 와중에 백면호리는 진무린을 찾았다.
“약속 잊지 않았지? 내가 여기 와서 정말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니까. 봤잖아? 마지막에 모 소저를 업고 절박하게 달리는 내 모습을. 캬하! 정말 협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 아냐?”
“알았소.”
“정말이지? 진짜지?”
진무린의 미소를 본 백면호리가 흐뭇한 얼굴로 물러났다.
일행은 아직 웅덩이 근처에 있었다.
이유는 모려원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탓이었다.
마음 같으면 편안한 침상으로 옮기고 싶었으나 함부로 움직일 것이 아니라는 운진의 의견이 있었다.
대강 주변이 정리되었다.
“진 대협께도 상처가 있다 들었소.”
그런 뒤에 슬며시 다가온 이안공자의 우안이 진무린의 왼쪽 어깨에 시선을 주었다.
“노반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잠시 상처를 보아도 되겠소?”
“번거로울 일을 자꾸 청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홍화루와 인연이 있으니 이미 남이라 할 사이가 아니오. 게다가 어려울 때 손을 내미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가 아니겠소. 내 이래도 촌민들의 온갖 병증을 치료할 정도는 되니 맡겨주시오.”
그렇게 우안이 진무린의 상처를 살펴주었는데 운진은 그때까지도 모려원을 염려해 곁을 지켰다.
촌민이 급히 가져온 금창약을 발랐고, 우안이 권하는 환약을 삼킨 진무린이 감사의 뜻을 전할 때였다.
“진 대협!”
운진이 급히 진무린을 찾았다.
모려원이 깨어나는 모양이리라.
다가간 진무린이 자세를 낮춘 앞에서 모려원이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에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당연하게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모려원을 바라보았다.
몰려든 시선이 당황스러운 듯 다시 주변을 돌아본 모려원이 마침내 진무린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대사형?”
이전과 변함없는 음성과 눈빛이었다.
기인촌의 촌민들은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가 있어 백면호리가 요정을 안아 움직였고, 이안공자가 눈짓과 손짓을 하고는 촌민들과 함께 자리를 비워주었다.
남은 것은 앞섶에 핏자국이 선명한 운진이었다.
“진 대협. 나도 저분들과 함께 있으리다.”
“서두르실 것이 무에가 있습니까? 사매인 모려원입니다. 사매, 모산의 문주이신 운진 진인이시다.”
총명함이 빛나는 모려원의 눈이 그제야 운진에게 향했다.
“모려원이에요.”
“모산에 의해 고충을 겪었소. 모두 빈도가 불민한 탓이니 그 점에 대해 먼저 사죄드리리다.”
운진의 대꾸에 모려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진 대협. 잠시 뒤에 뵙겠소.”
인사를 마친 운진은 촌민들이 향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해가 기울어질 때쯤 세 사람만 남았다.
“대사형. 무슨 일인가요? 원남에 있던 제가 이곳에서 깨어났고, 모산의 문주께서 사죄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필시 행방이 묘연한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의 기억을 잃은 것이 분명했는데 진무린은 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다. 간단하게 우선 말하자면, 네 말대로 원남에서 행방불명된 너를 찾아 이리 왔고, 모산의 술법에 의해 잃었던 기억을 찾았다.”
“기억을 잃다니요? 소매는 원남에서 깨어나 보니 이곳이에요.”
“내가 흑사련의 마등을 상대하기 위해 강호에 나선 이후로, 너와 사제가 원남으로 출발했는데 그 뒤로 행방불명되었고, 다시 만난 것이 유운객잔이었지.”
모려원의 놀란 반응에 진무린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꾸해주었다.
“우선 편한 곳으로 움직이자.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대사형. 그런데 상처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누가 감히 대사형을 그리 만들 수 있죠?”
느닷없는 질문에 진무린이 어색하게 웃었고, 종무헌은 시선을 피했다.
“자리를 옮긴 뒤에 모두 말해주마.”
“설마……. 설마 소매가 그랬나요?”
총명함과는 별도로, 모려원은 꽤 놀란 얼굴이었다.
“이제 소매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황한 모려원의 질문이었다.
답을 하지 않은 채 진무린은 종무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제는 사매가 어찌할 것 같으냐?”
“소제가 아는 사저는 반드시 흉수를 찾아 그들을 응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어찌할 참이냐?”
“소제의 피가 남김없이 쏟아지는 한이 있어도 대사형과 사저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고맙다.”
참으로 얼굴에 걸맞는 흉악한 각오였는데 모려원은 감동한 표정이었다.
모려원이 시선을 돌린 앞에서 종무헌은 다부지게 고개를 숙였다.
“사저. 지금 이 순간을 내내 기다렸습니다. 반걸음을 돌아오신 것에 감사합니다.”
종무헌의 진심이 전해져서였을까?
아니면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감정이 흔들렸을까?
눈시울이 붉어진 모려원이 진무린을 보았다.
“잘 돌아왔다, 사매. 이제 혼자가 아님을 명심하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나와 사제, 이렇게 셋이서 함께하자꾸나.”
진무린의 답을 들은 모려원이 아프게 웃을 때였다.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섭성과 요정이 웅덩이 위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걸리시는지 여쭤보래서 왔어요.”
“인사를 마쳤다. 나머지 긴 이야기는 차라리 저녁을 먹은 뒤에 여유 있게 하는 게 좋겠으니 우선 함께 가자.”
진무린은 몸을 돌려 섭성과 요정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모려원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챈 진무린은 팔을 올려 가볍게 검을 고쳐맸다.
쩔걱. 쩔걱.
묵룡심법의 기운을 슬며시 담았다.
놀란 듯 고개를 돌렸던 모려원이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렸는데 진무린은 그 모습이 더할 수 없이 좋았다.
**
운진은 허리 뒤에 발이 하나 더 달린 촌민의 안내를 받아 양묘가 갇힌 동굴에 들어섰다.
손목이 잘린 자리에는 천을 감았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는 팔뚝을 관통하는 쇠침을 박아서 사슬에 묶었다.
거기에 양쪽 귀 아래, 목덜미에 각각 두 개, 그리고 가슴을 타고 네 개, 도합 여덟 개의 대침을 박아두었다.
하얀 머리칼은 흐트러졌고, 수염은 더러웠으며, 도사복은 굳어버린 핏자국이 가득하여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하얀 머리칼과 수염 탓에 도사의 위엄은 양묘가 좀 더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독한 인상은 운진의 온화함을 이기지 못했고, 인성 또한 사제를 아프게 바라보는 운진에 비해 부족함이 많았다.
“술법의 세계에 있다고는 하나, 너는 내 음성을 들을 것이라 여긴다.”
의식이 없는 양묘를 말없이 바라보던 운진이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원래 거짓이 많았다. 사형된 내가 그를 바로 잡아주지 못했으니 네가 죽을 때 함께 하게 된 것에 억울한 마음은 없구나.”
나직한 운진의 음성이 동굴 안을 잔잔하게 맴돌고는 주변으로 사라졌다.
“양묘야. 마지막으로 당부하마. 죽기 전에 과를 느끼고 반드시 사죄하는 마음을 지녀 함께 죽는 순간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려무나.”
말을 마친 운진은 그를 위해 원시천존을 찾은 뒤에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