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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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67화
은천검제
제67화
양손 손목이 잘린 채 눈알만 굴리는 양묘를 두고 진무린은 백면호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 뒤에 그의 등에 업혀 있는 모려원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얼마나 힘겨웠으면 웃기 잘하는 모려원이 핏물 섞인 눈물을 흘렸을까.
‘이제 되었다.’
진무린은 모려원을 풀밭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붉은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진 대협. 이분이 말씀하신 사매분이요?”
“그렇습니다, 문주.”
타서 죽은 도사들과 양손이 잘린 양묘까지, 주변 풍경은 처참한데, 진무린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술법을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빈도가 바로 살펴보리다.”
냉큼 진무린의 곁으로 다가온 운진은 모려원의 왼쪽 머리맡에 가부좌로 앉았다.
“머리를 높여주시고, 주변을 차단해 주시오. 그리고 내가 도움을 청하면 본산에서 주셨던 그 심오한 내공을 펼쳐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종무헌이 등짐을 눌러 모려원의 머리를 받쳐주었다. 이어 진무린이 운진의 정면, 종무헌이 뒷면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백면호리가 신기한 눈으로 운진과 모려원을 번갈아 본 다음이었다.
웅얼대듯 주문을 외운 운진이 오른손바닥을 펼쳐 모려원의 정수리를 덮었다.
모려원이 사매로 돌아올지 모를 순간이었다.
백면호리와 종무헌은 물론이고, 진무린마저 긴장한 눈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운진은 더할 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술법에 집중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처럼 시작한 운진은 한참이 지나도록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부터는 그의 얼굴에 땀이 올랐고, 바로 직후부터 머리를 떨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
진무린은 시선을 들어 아직 볕이 남은 웅덩이 근처에 처참하게 서 있는 양묘를 보았다.
확실히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조롱이었다.
진무린은 다시 시선을 돌려 운진을 보았다.
술법에 대해 깊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금이 운기 중 주화입마처럼 위험한 순간임은 분명해 보였다.
‘어찌할까?’
주변을 차단해 달라는 요구를 생각해 보면 함부로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침묵이 무게를 지닌 것처럼 주변을 짓누를 때였다.
진무린이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고, 잠시 뒤에 인기척이 들렸다.
진무린의 번득이는 눈빛에 놀란 백면호리가 절묘한 경공을 발휘해 웅덩이 앞쪽의 바위를 향해 몸을 날리더니 잠시 뒤에, “쉬! 조용!” 하는 그의 음성이 들렸다.
다행히 소란은 없었다. 대신 백면호리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머리가 바위 위로 불쑥 솟아났다.
설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고개를 내민 이들은 진무린과 종무헌, 그리고 양묘를 보며 숨을 죽였다.
이때쯤 운진은 물론이고, 누워 있던 모려원까지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운진의 앙상한 손등은 물론이고 얼굴마저 땀에 젖었고, 지금은 모려원의 이마에도 땀이 배어 나왔다.
청하면 심오한 기운을 달라지 않았던가.
운진의 말을 기억하던 진무린은 묵룡심법을 운기해 그 기운으로 두 사람을 덮었다.
모려원도 염려되었지만, 혹여 운진이 크게 상할까 염려되는 바도 적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이쯤에서 물러나셔도 괜찮습니다.‘
운진이라면 진무린이 전하는 바를 알아들으리라.
이토록 힘겹게 매달리는 운진이 고맙고, 또 이런 위기에 처한 것이 미안해 진무린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푸욱!”
한순간, 피를 토해낸 운진이 오른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문주!”
“푸학!”
빠르게 몸을 숙인 진무린이 상체를 받쳤을 때, 운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피를 토해냈다.
“진 대협……!”
땀이 흥건한 채 피를 토해낸 운진은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라는 양, 진무린의 소매를 거칠게 붙들었다.
“양묘를 죽였다면 사매분도 죽었을 정도로 술법에 깊게 묶여 있었소. 그의 기운만 차단하면 되는 일이니 내가 다시 손을 쓰겠소.”
“문주께서 위험하지 않습니까?”
“허허. 빈도는 여한이 없다오.”
피를 머금은 운진이 삶을 달관한 태도로 웃었는데 그래서 더 처연하고 서글퍼 보였다.
“사매분이 깨어날 텐데 그때가 유일한 기회라오. 그 전에 빈도가 요청하면 기운을 나눠주시오.”
진무린에게 의지했던 운진이 억지로 상체를 세우려는 때였다.
“양묘의 기운을 차단하면 됩니까?”
“진 대협이 도력을 차단하실 수 있단 말씀이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를 머금은 운진은 믿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제가 앞에서 먼저 기운을 내겠습니다. 묵빛 기운이라 하는데 검은 기운이 양묘를 감싸면 술법을 시행하십시오.”
“진 대협! 내공이 단전에서 일어난다면 도력은 백회에서 나온다오.”
“알겠습니다.”
더 말해봐야 시간만 아까울 일이었다.
“사제는 내 뒤를 지키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검을 내라!”
“맡겨주십시오, 대사형!”
엄하게 지시를 내린 진무린은 모려원을 사이에 두고 운진의 앞에 앉았다.
급하다고 들었다.
곧바로 내공을 운기한 진무린은 기운을 가닥가닥 풀어 양묘를 감쌌다.
오는 도중에 운진의 술법을 느꼈고, 그에게 공력을 전달해주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시도조차 못 해볼 일이었다.
눈을 감고 등룡창천의 기운을 펼치자 곧바로 주변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뇌리에 들어왔고, 양묘의 사악한 기운, 그의 숨결, 어딘지 모르게 마지막을 노리는 듯한 야비한 감정이 고스란히 진무린에게 전달되었다.
검은 기운을 보았을까.
“읍!”
입을 틀어막는 백면호리의 놀란 음성과 지켜보던 이들의 탄식도 들렸다.
장설군을 치료할 때처럼 가닥가닥 기운을 풀어낸 진무린은 양묘의 몸을 누에고치 싸듯 촘촘히 감쌌다.
그의 술법과 기운이 새어 나올 틈 없이 막은 진무린이 마지막으로 도력이 일어난다는 정수리 중앙의 백회를 누를 때였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먼저 들었고, 이어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아찔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크하하하하하!”
앞에서 들리는 양묘의 웃음은 확실히 지금까지와 달랐다.
게다가 동굴에 갇힌 것처럼 주변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진무린은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술법에 말려들었구나.‘
주변이 칠흑처럼 어두운 가운데 저 멀리에서 두 눈이 불타듯 빛나는 양묘만이 홀로 서 있었다.
“멍청한 놈!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느냐! 제 발로 죽을 길에 들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것 없다!”
양묘는 득의양양이었다.
진무린은 기운을 펼쳤으나 양묘와의 거리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심지어 고개를 돌릴 수도 있고, 시선도 움직이는데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회를 네 손으로 이었으니 그야말로 스스로 목숨을 바친 꼴이로구나! 이놈! 감히 술법을 사용하는 도사에게 백회로 대항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
말을 마친 양묘의 눈이 더욱 빛난 직후에,
“끄윽!”
진무린은 거대한 송곳이 머리를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중얼중얼 울리는 양묘의 진언이 시작되며 고통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는데 여전히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견뎌야 하는데, 이겨내야 하는데, 무공이 아니라 술법을 상대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버티던 진무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고, 이어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렇게 끝인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는 순간이었다.
“많이 힘드냐?”
퍼뜩 들려온 다정한 음성이 진무린을 깨웠다.
“특별한 기운의 일부를 상단전에 담아두었는데 중단전을 깨우쳤으니 도움이 될 게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확실했다.
언젠가 진무린을 품에 안고 전해주던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등룡창천 역시 과정이다. 이미 중단을 얻었고, 또 이렇게 기연을 만나 백회마저 열게 되었으니 아비가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를 얻으려무나.”
진용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무린의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리를 파고들던 끔찍한 고통이 수그러들었고, 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가 맑아졌다.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진용선은 품에 안은 진무린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나는 너와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
흔들리던 나뭇잎 사이로 빛나던 햇살이 진무린의 눈에 담겼고, 이어 마주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강렬한 빛줄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중얼거리는 양묘의 음성이 귀에 들렸는데 지금의 진무린은 그와의 거리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약하나마 앞에 누운 모려원과 맞은편에 가부좌로 앉은 운진, 그리고 뒤에서 지키는 종무헌의 기운마저 느꼈다.
숨을 커다랗게 내쉰 진무린은 빠르게 진언을 외는 양묘를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하지?”
뚝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진언이 멈췄을 때, 둔탁하게 막혔던 진무린의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났다.
이 어둠이 술법의 세계라 들었다.
그런데도 진무린은 묵빛 기운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것 또한 확실하게 알았다.
이전과 다른 감각이었다.
열다섯 걸음쯤 너머에 양묘가 있고, 그의 근원이 진무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후도와 엄소동의 경지가 이 수준이었을까?
멍한 표정으로 놀랐던 양묘는 이미 진무린의 기운 안에 있었다.
“나를 죽이면 운진도 죽는다!”
양묘는 진무린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반응이었다.
“여기에서 죽으면 밖에서 죽게 된다는 말이냐?”
“흥! 술법의 무서움을 이제야 아는구나! 그러니 네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진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둘은 밖에서 어떤 모습이지?”
“뭐라?”
“나는 가부좌로 눈을 감았을 테고, 너 역시 선 채로 의식이 없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이곳에서 내가 또다시 네놈을 점혈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궁금한데?”
“그렇게 하면 네놈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해!”
저리 대답할 줄 알았다.
바깥의 기운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테니 저런 협박도 가능하리라.
픽 웃은 진무린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고. 이곳에서 점혈을 해놓으면 네놈은 이곳과 바깥에서 영영 꼼짝 못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런……!”
화들짝 놀란 양묘의 몸이 움찔했다.
혼자 빠져나가려고?
잔상이 남을 정도로 움직인 진무린은 어느새 양묘의 앞에 있었다.
진무린은 커다랗게 눈을 부릅뜬 양묘의 귀 아래와 목, 어깨, 가슴을 연달아 엄지로 찔렀다.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양 눈알을 버둥거렸지만, 양묘는 눈만 껌벅인 채 입을 열지 못했다.
“네놈이 원하던 술법의 세상이다. 영원히 이곳에서 지내.”
차갑게 말을 던진 진무린은 바깥의 기운은 분명하게 읽었다.
모려원은 아직 누워 있고, 운진은 한결 편안한 가운데 진무린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주.’
잠시 멈칫한 다음이었다.
‘진 대협?’
운진의 놀란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양묘의 기운은 차단했습니다. 다만, 그의 술법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그렇다면 지금 양묘가 일으킨 술법의 세계에 계신단 말씀이오? 어찌? 어떻게 술법을 모르는 진 대협께서 내게 말을 거실 수 있소?’
‘설명은 나가서 하겠습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진 대협. 내게 주었던 기운을 일으키시면 내가 주문을 외우겠소. 혹시 그래도 나오지 못하겠거든, 주저하지 말고 양묘의 목을 자르시오.’
양묘를 죽이면 어떻든 운진도 죽는다.
‘우선 부탁드리겠습니다.’
‘진 대협. 술법의 세계는 오묘해서 한번 닫히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오. 이리 연결된 것이 신기할 지경이니 부디 기회를 버리지 마시오.’
양묘의 목을 잘라서라도 반드시 나오라는 운진의 간곡한 당부였다.
‘그를 죽이지 않아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주의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알았소, 진 대협.’
사매의 상태를 묻고 싶었으나 시간이 아쉬웠고, 운진의 음성이 편안한 것으로 미루어 나쁘지 않으리란 기대도 있었다.
진무린이 기운을 뿜어냈고, 잠시 뒤에 운진의 주문이 들렸다.
술법의 세계에 갇힌 것만큼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운진의 주문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닫혔던 문을 연 것처럼 후련하게 바깥세상의 기운이 진무린에게 달려들었다.
기운을 따라간다.
진무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묵빛 기운이 전해주는 바깥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시간은 길지 않았다.
눈앞이 환히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이어 후련한 공기가 코를 통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주변을 느낀 진무린은 감았던 눈을 떴다.
“진 대협!”
곧바로 기다리던 운진이 놀란 음성으로 불렀는데 내용을 모르는 종무헌은 왜 그러나 하는 표정이었다.
석상처럼 서 있는 양묘를 바라본 진무린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자세한 말씀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사매는 어떻습니까?”
“깨어나면 돌아올 것이오.”
얼마나 기다렸던 답인가.
진무린이 숨을 나직하게 내쉴 때였다.
미간을 가볍게 움직인 모려원이 정말이지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눈을 떴다.
“대사형?”
진무린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