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9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3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9화
은천검제
제59화
강자가 명분인 세상이었다.
문우산장의 장주 곽동문, 무심창 고섭량 정도의 고수는 삼도방의 방주 장삼도가 눈 한 번 치켜뜨기 어려운 강자였다.
그런 그들이 느닷없이 나타난 호랑이에 눌리는가 싶더니 곽동문은 피를 머금었고, 나머지는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형국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는데 문우산장과 사천삼절은 어디에 붙은 것이냐는 투로 짓이기던 성난 호랑이가 또 진무린의 한마디에 검을 갈무리하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차가운 달빛을 거느린 채 붉은 횃불 앞으로 나서는 진무린은 영민함에 중후함을 덧발랐으며, 진정한 고수의 풍모를 한껏 풍겨내고 있었다.
“진 대협!”
장삼도와 하북삼괴가 분분히 옆으로 움직여 길을 낸 다음이었다.
“대사형! 소제가 그만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사제는 고개를 들어라.”
“예, 대사형.”
진무린을 마주한 호랑이가 올라섰던 눈썹 끝을 내리고는 공손하게 두 손을 잡았다.
다들 놀랐지만, 특히나 장삼도의 뒤편에 서 있던 하북삼괴는 남몰래 목덜미를 매만지며 아찔한 심정을 감췄다.
저런 줄 모르고 객잔에서 고함을 질렀으니 아직 목 위에 머리가 붙어있는 것은 모두 진무린의 진중한 인품 덕분이리라.
하북삼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와 인사를 마친 진무린이 장삼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제는 위기를 넘긴 듯합니다.”
“오오! 진 대협!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고맙소, 진 대협! 감사하오, 진 대협!”
“방도들이 보는 앞입니다. 방주께서는 어찌 객을 이리 불편하게 하십니까?”
말투마저 바뀌어 읍을 올리는 장삼도를 진무린이 얼른 만류했다. 이때 진무린은 왼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서 그가 크게 다쳤음을 지켜본 이들 모두가 알아챌 정도였다.
“자식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께 드리는 못난 아비의 인사올시다!”
목숨만 구해줬나?
호랑이 같은 사제가 달려와 오늘 밤의 위기도 넘겨주었다.
빙그레 웃은 진무린은 고개를 돌려 사제인 종무헌을 보았다.
“후배의 사제로 종무헌이라 합니다. 사제, 삼도방의 방주 장삼도 대협이시다.”
“종무헌입니다. 불쑥 나타나 무례했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사과라니 가당치도 않소, 종 소협! 본인은 진 대협께 자식의 구명지은을 입은 장삼도요. 진 대협과 종 소협이 내밀어 준 연으로 오늘 이 늙은이가 큰 은혜를 입었소.”
사경을 헤매던 장설군이 위기를 넘겼다 하고, 호랑이가 공손하게 인사까지 하는 터라 삼도방은 화기애애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또 맞은편이 있기 마련이라.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못할 이들이 있었다.
종무헌을 소개한 진무린은 너희를 잊지 않았다는 태도로 몸을 돌렸다.
“인사가 늦었소. 내가 진무린이오.”
“진 대협. 이 몸은 문우산장의 장주 곽동문이라 합니다.”
혹시 또 ‘닥쳐라!’라는 고함이 날아들지 않을지를 염려한 것처럼 공손함을 갖춘 곽동문의 인사가 있었다.
그는 이어 무정검 금남조와 무심창 고섭량을 진무린에게 소개했다.
진무린은 무심한 시선을 고섭량에게 돌렸다.
“진무린이오.”
“고섭량이 진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호북 상등에서 워낙 위명이 쟁쟁하여 혹 대협의 성명을 빌린 줄 알고 경망한 언사를 입에 올렸습니다. 이 고 모가 가벼운 언행을 사죄드립니다.”
고섭량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고 대협은 무슨 일로 백향초를 찾았소?”
“오래도록 알고 지내는 문우산장 곽 장주의 요청으로 달려온 길입니다.”
당연하게 진무린의 시선이 곽동문을 향했다.
고작 오늘 반나절을 지켜본 장삼도는 물론이고, 사제인 종무헌마저 내심 의아한 눈으로 진무린을 지켜보았다.
곽동문과 고섭량을 대하는 태도 어디에도 진무린이 평소 보이던 공손함은 없었다.
‘대사형께 의도가 있구나.’
종무헌은 단박에 진무린이 부러 저리 처신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곽 장주는 어떤 연유로 백향초를 찾아 나서셨소?”
“본장의 부장주가 흉수에게 당한 뒤로 그 상태가 위중하여 급히 구하던 참이었습니다.”
“하나만 더 여쭙겠소. 백향초가 여기 있다는 소식은 어디에서 들었소?”
곽동문이 움찔하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종무헌의 사나운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을 때, 진무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기 곤란한 모양이니 더 묻지 않겠소. 본인은 보다시피 검상이 있어 사제와 먼저 안에 들어가 있을 테니 나머지 의논은 이곳 방주인 장 대협과 나누면 되리라 여깁니다.”
왼손을 억지로 반쯤 든 진무린이 포권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전한 후 종무헌과 함께 삼도방 안으로 움직였다.
장삼도는 석관평에서 수십 해를 묵은 생강이었다.
진무린이 축객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장삼도와 의논하라 하지 않던가.
“오해가 있었다 하나 한 걸음 물러서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 분 영웅께서는 이 장 모의 성의를 보아 누추하더라도 본방에 잠시 들러주시길 앙망하오이다.”
장삼도가 고개를 숙여 세 사람을 초빙하였는데, 이대로 돌아서기는 곽동문과 고섭량도 께름칙했다.
“방주의 배려에 감사하오. 수하들의 숫자가 적지 않아 폐가 되지 않을지 그 점이 염려될 뿐이오.”
“본채의 뒤편에 협소하나마 공간이 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곽동문과 고섭량은 장삼도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아 포권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안으로 움직였다.
죽어가던 자식 살아났지요, 엄청난 무인과 인연을 얻었는데 그가 진무린과 사제요, 이어 사천삼절이었다.
하여간 삼도방은 오늘 더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얻은 날이었다.
세 사람을 안으로 안내하며 장삼도는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할 수만 있다면 삼도방 주변을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
진무린과 종무헌은 삼도방 총관의 안내로 원래 머물던 별채로 향했다.
널브러져 있던 모산의 셋은 치웠으나 대청문에 뚫린 구멍 세 개와 별채의 정원 곳곳에 남은 대결의 흔적은 여전했다.
별채에 들어선 진무린은 왼팔을 붙든 자세로 움직여 대청에 놓인 탁자에 앉았다.
“사제는 자리에 앉아라.”
“예, 대사형.”
두 사람 모두 탁자를 사이에 두고 정원을 향한 자세로 앉았다. 종무헌을 돌아본 진무린은 먼저 그가 기특하다는 투로 웃었다.
“내 부상을 알아보았고, 사매가 보이지 않는 데도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사제의 처세가 기특하구나.”
진무린의 칭찬에 종무헌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고개 숙였다.
“오늘 일이 많았다.”
그런 종무헌에게 진무린은 먼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전해주었다. 내용을 얼추 전한 다음이었다.
“사매가 기억을 잃었다가 불쑥 나타나 백향초를 든 모산의 제자들과 움직이며 시선을 끌었다. 연유가 무엇이라 짐작하느냐?”
“소제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사형.”
“사매의 손에 누군가가 당하길 바랐겠지. 그게 삼도방의 방주든, 화호검, 무심창이든 상관없고, 그 모두여도 괜찮다.”
고개를 갸웃했던 종무헌이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대사형. 만약 흉수의 목적이 사저를 노린 것이라면 이렇게 번잡하게 일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을 꾸민 흉수는 은천령을 노렸다는 뜻이 아닙니까?”
진무린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내놓았다.
“은천령을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뒷말이 주는 엄청난 부담에 종무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본가의 누군가가 암중 세력과 결탁했다고 봐야지.”
진무린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종무헌이 볼을 씰룩이며 진무린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은천령을 막기 위해 사매를 귀혼곡으로 보냈다. 남은 것은 백향초가 과연 승조표국의 것인지, 사매의 기억을 어떻게 찾을 것 인지인데 어떻든 힘겨운 일이 많을 것이다.”
무겁게 말을 건넨 그는 정원에서 시선을 돌려 종무헌을 보았다.
“무헌아.”
“예, 대사형.”
“사매를 구하고, 본가에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을 상대하는 길이다. 당장 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움을 달라 청할 이가 세상천지에 사제밖에 없구나.”
“대사형. 소제는 대사형을 모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불이든, 물이든, 기쁘기만 합니다.”
진무린이 고개를 끄덕였고, 각오를 바짝 세운 종무헌이 다부진 눈으로 뜻을 밝혔다.
“소제에게 명을 주십시오.”
“모산으로 가겠다. 그곳에부터 시작해 누가 사매의 기억을 앗아갔으며, 또 왜 굳이 은천령을 발동하려 저리 나섰는지를 알아볼 참이다.”
종무헌이 퍼뜩 시선을 들어 진무린을 보았다가 호랑이가 털을 세우듯 검미를 치켜세웠다.
“그 길 전부를 피로 물들이는 한이 있어도 소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정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대사형.”
진무린 역시 이미 각오가 섰다는 의미여서 종무헌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났다.
두 사람이 각오를 나눈 뒤였다.
종무헌이 근심 묻은 눈으로 어깨에 난 상처에 시선을 주었다.
“사제가 감히 내 상처를 염려하느냐?”
이번 질문은 농이 담겼다. 그리고 그에 대한 종무헌의 답은 계면쩍은 웃음이었다.
“대사형. 출발은 언제로 예정하십니까?”
“아까운 시일이 흘러가고 있으나 외상과 내상이 있고, 이곳의 자제를 살필 겸해서 내일 하루쯤 더 지낸 뒤에 출발할 생각이다.”
진무린의 답이 있을 때였다.
확연히 공손해진 태도로 장삼도가 별채에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방주.”
“진 대협과 종 소협의 긴한 대화에 방해된 것은 아니오?”
“방주께서 어렵게 대하시면 저는 이만 사제와 일어나 길을 나설까 합니다.”
“무슨 말씀이오? 진 대협, 나는 그저…….”
급히 나온 존대에 진무린이 장난처럼 고개를 가로젓자 장삼도가 난처한 얼굴로 종무헌을 살폈다.
“그리 보시면 제가 방주께 무언가를 강요한 무뢰배로 오해받습니다.”
“괜찮겠소?”
“대사형이 이미 뜻을 전하신 일입니다. 또한, 대사형 앞에서 저는 한낱 철부지일 뿐이니 저 역시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장삼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진무린은 여전히 처음 보았을 때처럼 듬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진 대협. 자식놈이 의식을 차렸소.”
“잘 되었습니다.”
“고맙소, 진 대협! 진 대협이 베풀어준 은혜 덕분에 아들놈이 살았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읍을 하여 감사를 표한 장삼도가 굳은 눈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진 대협과 종 소협에 비하자면 만월 앞에 반딧불이 수준의 공부이나 이 한목숨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기꺼이 달려가겠소!”
진솔한 마음은 통하는 법이리라.
장삼도의 굳은 표정에 담긴 각오는 결코 작다 하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내일 자제의 상태를 한 번 더 살핀 뒤에 출발해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고, 무어라 해도 삼도방에 함께든 객으로 사천삼절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백에 가까운 삶을 산 장삼도였다.
검산도림의 강호에서 불쑥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던 고수 진무린이 악연을 계속 선연으로 이어주고 있음을 그가 어찌 모르랴.
화호검 곽동문, 무심창 고섭량. 무정검 금남조와 인사를 나누어 마늘 한 쪽만큼이라도 진무린에게 득 될 것이 있을까.
그저 길을 떠나기 전에 부족한 삼도방을 살펴주려는 배려임을 진무린의 눈과 표정, 그의 됨됨이를 통해 장삼도는 익히 짐작했다.
“내가 진 대협과 종 소협을 모시겠소.”
몸을 돌린 장삼도는 서둘러 문으로 향했다.
깊어가는 밤의 달은 차가운 은색으로 정원을 비추었는데 장삼도가 앞서고, 진무린과 종무헌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별채를 나서기 전에 진무린은 정원을 흘깃 보았다.
저곳에서 사매인 모려원과 검을 휘둘렀건만, 남은 것은 정원석과 바닥에 새겨진 검흔이 전부였다.
‘잘 견디고 있어.’
세상을 온통 물들인 둥그런 달을 향해 진무린은 애잔하게 당부를 전했다.
**
어둠이 밀려간 직후였다.
뿌옇게 사방이 밝아질 무렵, 백면호리가 귀혼곡의 입구에 도착했다.
등에는 추한 용모의 처자를 끈으로 묶어 업었고, 오른손에는 보따리와 검을 들었는데, 그 몰골이 야반도주한 삼류 무인의 형상이었다.
“아후!”
신음을 뱉어낸 그는 이송암관의 앞에서 짐을 차례로 내려놓은 뒤에 마지막으로 모려원을 풀어 바닥에 눕혔다.
물주머니를 꺼낸 백면호리가 막 물을 마시려는 참이었다. 추한 얼굴을 한 모려원이 퍼뜩 눈을 뜨고서는 주변을 돌아본 뒤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진 대협! 진 대협은요?”
바닥에 떨어진 검과 주변을 살핀 모려원이 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백면호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된 거죠? 분명 진 대협과 모산의 제자 셋을 상대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술법에 빠진 건가요?”
혹시나 환술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 모려원이 서둘러 검을 들었다.
무인의 기운을 뿜어내는 모려원은 확실히 만만치 않다.
“보시오, 소저! 그러니까 대결 중에 기억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다? 그런 거 아니겠소?”
“맞아요!”
백면호리는 먼저 쓴 입맛을 다셨다.
“나는 혹시 아시겠나?”
“백면호리라 들었어요.”
허공에 등이 떠 있나를 살핀 모려원이 백면호리를 경계하며 보았다.
“대결 중에 정신을 잃자 진 대협이 귀혼곡으로 가서 기다리라 했소.”
“내가 정신을 잃은 이유는요?”
“아니? 의식을 잃은 당사자도 모르는 걸 낸들 어떻게 알겠나?”
진무린을 찔렀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백면호리가 한쪽에 놓아둔 보따리에 시선을 돌렸다.
“할 이야기가 많소. 굳이 입으로 떠들 것이 아니라 책에 적힌 걸 먼저 보고 난 뒤에 설명하리다. 이럴 줄은 몰랐으나 마침 내가 황궁에서…… 흐익! 아무튼,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여기가 어딘가요?”
“귀혼곡이라 하는 곳이오. 긴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리다.”
백면호리는 나무를 들어 둥그렇게 놓인 바위를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