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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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8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7화
은천검제
제57화
세상이 돌아왔다.
술법에 가려졌던 달빛, 별채의 정원, 주변을 둘러싼 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진무린은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진 대협. 나는…….”
모려원이 당황하고 놀란 눈으로 진무린의 어깨에 박힌 검에서 시선을 들었다.
“모 소저. 사정이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거기까지였다.
의식을 잃은 모려원이 무너져 내렸고, 진무린이 달려가 오른쪽 품에 그녀를 안고 자세를 낮췄다.
내려선 달빛이 그의 품에 안긴 모려원을 처연한 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괜찮다, 사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테니 더러운 술법 따위 털어내고 기분 좋게 깨어나. 이런 일로 상심하지 말고.’
어깨에 검을 맞았는데, 그 검을 빼지도 못했는데 현실은 촌각의 시간조차 허용하기 어려웠다.
“백면호리. 사매를 데리고 귀혼곡으로 가.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어.”
“이봐. 나는 모산을 이길 힘이 없어. 저 정도 실력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게다가 정도맹이 뒤를 따라온다니까.”
“장로급 셋이 죽었으니 당장 모산은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워. 솔직히 말해. 백면호리가 고작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에게 붙잡힐 실력은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백면호리의 대꾸는 빨랐다.
“내가 모 소저? 모 소저를 귀혼곡으로 데려갈 테니 그럼 내 딸아이에게 무공을 좀 가르쳐 줘.”
진무린은 모려원을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어렵게 구한 내공심법이 다리를 굳게 한대. 나도 피해야 하는 마당에 모 소저까지 데리고 귀혼곡에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귀혼곡에 모 소저를 데려가는 대신 딸아이에게 무공 하나만 전해줘.”
진무린의 대꾸가 없자 백면호리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아이 없었으면 죽었어. 소원을 들어주면 귀혼곡 아니라 더한 곳이라도 간다, 진짜.”
진심이라고 믿었다.
“알았어.”
“정말?”
진무린의 눈빛을 본 백면호리가 바쁘게 다가왔다.
모려원을 넘겨줄 차례였다.
진무린은 먼저 모려원의 등에 왼팔을 넣고는 오른손을 빼냈다. 그런 뒤에 검지와 중지로 어깨를 뚫고 나온 검날을 잡고서 단숨에 뒤로 밀어냈다.
피윳! 터엉!
“끄응.”
백면호리는 아예 질린 얼굴이었다.
턱! 턱! 터덕!
어깨 부근의 혈을 짚은 진무린은 다시 시선을 들었다.
“검을 집어.”
“나는 정말 무기 싫은데!”
투덜대면서도 백면호리는 검을 집어 들었고, 진무린의 시선에 따라 모려원의 검집에 넣었다.
“그러지 말고 귀혼곡에 함께 가면 어때?”
“잘 들어. 사매가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 그 명분으로 본문에서 척살령을 내리려는 것을 막았거든. 그런데 사매가 나를 찔렀으니 이제는 변명하기 어려워.”
“척, 척살령? 은천령이라는 그?”
“은천령의 위력을 짐작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귀혼곡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마.”
“에효! 소림과 무당을 피해서 왔더니 은천령을 얻어맞게 생겼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귀혼곡에 숨어있을 테니까 서둘러 돌아와. 아! 물론 모 소저도 잘 챙길 테니까 안심하고.”
말을 마친 백면호리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슥.
그는 과연 백면호리였다.
단박에 사십 중반으로 변한 그는 이어서 의식을 잃은 모려원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문질렀다.
진무린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내가 백면호리라도 너무 미인이면 눈에 띌 수가 있어요.”
미인이야 그렇다 쳐도 굳이 눈길조차 피하고 싶을 만큼 추한 몰골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
“약속 잊지 마!”
그러면서 그는 모려원을 향해 등을 내밀었다.
이별의 인사조차 나눌 틈 없었다.
사매를 등에 업은 백면호리는 훌쩍 담에 올랐고, 그대로 어둠을 향해 모습을 감췄다.
모려원이 떠난 자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끔찍한 통증이 홀로 남은 진무린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검에 맞은 것과 엄소동이 내공을 꺼낼 때, 둘 중 어느 쪽이 더 아프지?
엉뚱한 생각에 피식 웃은 진무린은 왼쪽 팔을 붙든 자세로 여랑화의 소매에 있던 백향초를 꺼냈다.
“끄응.”
약초를 품에 넣은 뒤에 진무린이 정원의 돌에 걸터앉아 숨을 두어 번 내쉰 다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급히 들어선 장삼도가 놀란 눈으로 진무린과 주변을 살폈다.
“모산의 장로들입니다.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백향초를 노리고 많은 인원이 이리 오는 모양이니 방주께서는 그들에 대비하시고, 후배는 우선 자제를 치료하겠습니다.”
피투성이인 세 사람을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한 뒤에야 장삼도는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본방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맞서면 될 일이네. 그러나 다친 몸으로 치료가 되겠나? 게다가 모 소저도 보이지 않으니?”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모 소저는 먼저 출발했습니다. 후배가 치료할 텐데 그 과정에서 소란이 일어난다면 자제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흐음.”
장삼도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공실이 있습니까?”
“있네.”
“그렇다면 자제를 그리 옮겨주십시오.”
“알았네. 옮긴 뒤에 다시 옴세.”
장삼도가 뛰어나간 뒤였다.
잠시 뒤에 삼도방의 방도 둘이 급하게 별채에 들어섰다.
“본방의 금창약을 전해드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널브러진 모산의 셋을 보며 흠칫 놀라기는 했으나 그들은 제법 침착했다.
진무린은 사양치 않았다.
두 사람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어깨의 상처를 닦았고, 먼저 앞쪽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방도 한 명이 어깨 뒤편의 상처에 금창약을 듬뿍 발라준 뒤였다.
장삼도가 빠르게 돌아왔다.
“아까 들렀던 집무실 뒤에 연공실이 있네. 자식놈을 옮기고 있으니 나와 함께 가세.”
어깨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킨 진무린은 장삼도를 따라 별채를 나섰다.
본관 앞은 횃불을 밝혀 대낮과 같았다. 그리고 정문 안쪽 연무장에는 도를 든 방도들이 단호한 태도로 서 있었다.
“본방을 가벼이 여긴 자들은 오늘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걸세. 진 대협은 다른 염려 말고 치료에 전념해주게.”
실력에 비해 너무도 엄청난 자신감을 보인 장삼도는 집무실이 있는 건물의 뒤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연공실은 집무실 뒤편의 가산 아래를 뚫어 만든 동굴 형태였다. 안쪽으로 오십 걸음 정도의 길이에 폭과 넓이가 각각 스무 척가량 되어서 연공실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그 중앙에 옮겨 놓은 침상에 장삼도의 아들이 누워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설군이라 하고, 올해 스물일세. 이 아이가 나를 향해 다시 말을 걸고, 과거처럼 웃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바라는 것 없네.”
말을 마친 장삼도가 양손을 맞잡고 허리까지 고개를 숙였다.
“방주!”
진무린은 급히 오른손을 뻗었다.
“이러시지 않아도 후배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부상이 있음을 보았지. 혹 견디기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이 못난 아비의 인사를 기억해 부디 마지막까지 저 손을 꼭 잡아주게.”
진무린은 장삼도의 팔을 받치듯 들었다.
“후배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진 대협.”
“바깥이 소란스러워도 후배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도움을 드리지 못합니다.”
“본방을 노린 자들을 벌하는 일에 어찌 진 대협의 수고로움을 바라겠나? 안에서 잠그면 부수기 전에는 들어올 방법이 없으니 그 점을 참고하게.”
당부를 전한 장삼도가 침상으로 움직였다.
그는 두꺼운 손을 뻗어 아들을 다독인 뒤에야 몸을 돌렸다.
“진 대협. 염치불구하고 자식을 당부하이.”
그는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는 연무장을 나섰다.
끼이이익. 쿠웅.
두꺼운 문이 닫혔다.
문의 양쪽과 중간 벽, 그리고 안쪽에 켜진 등에 의지한 채 진무린은 침상으로 걸어가 왼편에 앉았다.
“소협. 나는 진무린이라 합니다.”
진무린은 먼저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으로 장설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매가 있었다면 치료가 쉬웠을 것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이렇게 홀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동굴 형태의 연무장이 진무린의 고독한 음성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진맥에서 느낀 바로는 의식이 있을 듯하여 이리 당부합니다. 치료 중에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면 조금 전에 허리 숙이던 노태부의 모습을 떠올려 굳건하게 견뎌주길 바랍니다.”
숨을 내쉰 진무린은 장설군의 바싹 마른 왼손에 오른손을 덮었다.
“먼저 막힌 맥을 두드리고, 다음으로 음기를 밀어낼 것입니다. 혈도를 점한 이후로는 고통이 상당할 텐데 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아야 합니다.”
말을 마친 진무린은 내공을 일으켜 오른손을 통해 흘렸다.
실처럼 가느다란 기가 진무린의 손을 통해 장설군의 팔목으로 흘러들어서는 그의 상태를 전해주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왼편 어깨에서 쏟아지는 통증이 끔찍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한순간이라도 집중을 놓치면 장설군은 생명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벽에 걸린 등이 장설군을 품은 침상과 그 옆에 앉아 상체를 곧게 세운 진무린을 무심하게 비추었다.
**
안휘의 마안산에는 모두 열일곱 개의 자그마한 도관이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평화롭게 도를 닦던 도사들은 어느 날 불쑥 수하들을 이끌고 나타난 양묘라는 도사에게 모두 쫓겨났다.
한편 우습고, 한편으로는 슬프게도 마안산에 관한 소문은 실상과 다르게 퍼졌다.
무엇보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범상치 않은 외모에 부적을 이용한 술법마저 능한 터라, 양묘의 위력에 도력이 약한 도사들이 스스로 물러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양묘는 스스로를 양묘 진인이라 칭하며 마안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도관을 상양궁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 기거했다.
상양궁에 영험한 도인이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근처 오백 리 안쪽에 퍼져서 그를 한 번이라도 보겠다는 이들과 무병장수를 바라는 민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던 상양궁이 오늘은 외부인의 걸음을 모두 차단한 채 고요하고 적막한 밤을 맞았다. 심지어 검을 든 도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어서 누구도 정상에 오르는 계단조차 밟지 못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위로 치켜 묶은 양묘는 그런 상양궁의 가장 안쪽에 가부좌로 앉아 늘어진 수염 아래에 양손을 놓은 자세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화복여응(禍福如應) 외청내정(外淸內淨) 구규광명(九竅光明) 보호아신(保護我身)…….”
구령삼정주를 쉴 새 없이 반복하던 그가,
“푸헉-!”
돌연 가슴을 움켜쥐며 피를 토해냈다.
붉은 피가 그의 하얀 수염을 물들일 때였다.
화르륵! 화륵! 화르륵!
허공에서 세 장의 부적이 불이 붙은 채 바닥에 떨어졌다. 전중방의 제자로 위장했던 양묘의 수하 셋이 모두 죽었다는 의미였다.
“푸흐하하하-!”
그런데도 양묘는 만족한 얼굴로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셋을 잃은 것은 애석한 일이나 얻은 것 또한 적지 않으니 크게 손해 본 것은 아니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말을 뱉어낸 양묘가 턱 아래로 피가 흥건한 고개를 들었다.
“밖에 누가 있느냐?”
“숙삼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인!”
“은천문의 진무린이 워낙 강맹하여 도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그를 보충해야 할 텐데 준비가 되었느냐?”
“이미 대령해 놓았나이다, 진인!”
크게 고개를 끄덕인 양묘는 도사복의 소매를 떨쳐 입가를 닦았다.
“가져오너라.”
끼이익.
문이 열리고 도사 한 명이 쟁반에 올려진 사발을 조심스럽게 양묘 앞에 놓았다. 끔찍하게도 하얀 사발에 담긴 것은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끈적한 피였다.
꿀꺽꿀꺽.
양묘는 사발을 들어 안에 담긴 피를 남김없이 모두 마셨다.
“흐음. 도력이 심히 소진되는 술법을 부려야 하느니. 너는 동남의 피를 좀 더 준비토록 해라.”
“예, 진인.”
아직 여자를 모르는 어린 남자아이의 피를 더 준비하라 지시한 양묘가 다시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았다.
빈 사발을 받아든 도사가 뒷걸음질로 물러났고,
“무릇 뇌(雷)는 군생(群生)의 목탁이요, 유정(有情)의 경종(警鐘)이니라, 하늘은 뇌로 숙살(肅殺)의 기운을 행하며, 땅은 뇌로 만류(萬類)를 행하게 하시고, 사람은 뇌로 중생의 미혹함을 깨우느니라.”
양묘는 피가 흥건한 입을 놀려 옥추보경의 서를 읊조렸다.
**
진무린은 오른손을 통해 내보낸 진기로 장설군의 막힌 맥 아홉 곳을 조심스레 다독였다.
기를 이용해 맥에 단단하게 뭉쳐있던 음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너무 힘이 과하면 맥이 터지고, 장설군처럼 기력조차 쇠진한 경우에는 죽음을 맞는 것 외에는 없다.
실보다 가늘게 기를 뽑은 참이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 몸을 건드리거나, 혹은 커다랗게 소리만 질러도 맥을 뚫던 기가 장설군의 몸을 헤집어 죽음을 부른다.
그렇다고, 급히 회수하는 것은 또 진무린에게 그만큼 위험한 일이 된다. 길게 뻗은 칼날을 거꾸로 돌려 진무린의 혈맥을 파헤치는 모양이라 그렇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등 안에 넣은 초가 거반 타고서야 진무린은 장설군의 맥에 자리한 음기를 모두 다독일 수 있었다.
손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등룡창천의 기운을 실처럼 얇게 조절할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어서 나름 고마운 생각도 있었다.
아무튼,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긴 진무린이 진기를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부스럭.
진무린의 품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진무린은 장설군에게 넣었던 진기를 급하게 거두었다.
‘크흑!’
금기를 범했다.
환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진기가 진무린의 혈맥을 파헤치는 것 또한 피하지 못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휩싸인 진무린은 급히 역류한 기를 누르려 애썼다.
부스럭!
그러나 이어진 황당한 장면에 진무린은 제대로 기를 누르지 못했다.
짐작이나 했었나.
잔뿌리를 팔처럼 휘둘러 품에서 빠져나온 백향초가 훌쩍 침상 위로 몸을 날리는 모습을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침상에 올라선 백향초는 잔뿌리를 뒤로 돌려 뒷짐을 진 채 거만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