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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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56화
은천검제
제56화
진무린은 솔직하게 내용을 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모 소저는 사문이 어찌 됩니까?”
“그것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내공심법과 검을 사용하는 초식까지 모두 또렷한데, 이상하게 전중방의 일행과 합류하기 전의 일은 떠오르는 것이 없어요.”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진무린이 막 답을 꺼내려는 찰나,
“언니!”
별채의 대청에서 여랑화가 모려원을 불렀다.
“진 대협! 급하게 언니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 있어서 방해했어요. 죄송하지만 제게 잠시 틈을 주시겠어요?”
중요한 순간을 망쳐놓은 여랑화는 심지어 애교 섞은 음성이었다.
“동생! 조금 뒤에 도와줄게.”
“급한 일이어서 그래요, 언니! 미안하지만 지금 좀 부탁해요!”
모려원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치료를 마친 뒤에 다시 뵐게요.”
그런 뒤에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별채를 향해 움직였다.
모려원의 퇴장을 알리듯 어둠이 별채의 정원으로 내려앉았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시비들이 들어와 문의 안쪽과 정원, 대청의 앞에 등을 걸어 별채 바깥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전중방의 제자들이 대청 안에서도 불을 밝혔다.
정원이라면 몰라도 대청에 객이 등을 밝혀? 초가 아니라?
고작 저걸 도와달라고 모려원을 불러들였단 말이지?
대청을 향해 시선을 준 진무린이 피식 웃었을 때였다.
장삼도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치료가 있어 저녁을 간단하게 준비했는데 괜찮겠나?”
질문하는 짧은 틈에도 그는 두 번이나 모려원이 있는 대청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런 양반을 속 태워서 뭐에 쓸까.
“모 소저가 도와주겠답니다.”
“오오!”
눈을 동그랗게 뜬 장삼도가 대뜸 진무린의 손을 잡았다.
“고맙네, 진 대협! 이 은혜를 잊지 않음세!”
그렇게 고맙다는 인사가 이어진 다음이었다.
“저녁은 이곳에 준비할까 하는데 괜찮겠나?”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은 성대한 연회를 준비할 테니 오늘은 약소하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저녁을 지시하고 치료를 준비하고 싶은 장삼도가 날 듯이 별채를 빠져나갔다.
‘그건 그렇고.’
진무린은 모려원을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들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추궁할 방법이 곤란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생각에 잠겼던 진무린이 별채의 담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기가 막힌 얼굴로 웃음을 그려냈다.
위기가 생기면 오라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이리 올 것이 아니라 귀혼곡으로 가는 것이 옳은 방법이었다.
진무린이 나직하게 숨을 내쉰 직후였다.
담장 위로 사람의 모습이 훌쩍 피어났고, 누군가 나타난 기척을 느꼈는지 별채의 대청에서 모려원이 걸어 나왔다.
소리조차 없이 담장을 내려선 노인은 먼저 진무린과 대청 앞에 선 모려원을 번갈아 살폈다.
진무린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긴 한데 지금은 나를 찾기보다 몸을 감추는 게 좋지 않겠어? 그 정도는 알 줄 알았는데?”
“이것도 알아보나?”
“그보다는 나를 찾아 삼도방에 온 것이 더 용하다. 다친 곳은 없어?”
“정도맹이 나를 찾는다고 난리야! 진 대협이 맹주와 친분이 두터우니 오해를 풀어줄까 해서 일단 이리 달렸지.”
진무린은 먼저 백면호리와 반가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는 분인가요?”
“백면호리라고 합니다.”
“백면호리요?”
“백 가지 면구로 얼굴을 바꾼다 하여 백면호리라 불립니다. 지금 보는 얼굴도 진면목이 아닐 겁니다.”
“흠흠. 부끄럽게 뭘 그런 설명을 다 하나?”
모려원이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백면호리는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뱉어냈다.
“백면호리. 하나만 먼저 답해. 상등에서 일, 아니지?”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그 늙어빠진…….”
버럭 대꾸를 건넸던 백면호리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에 모려원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니 그런데 누구신데 나를 그리 자세하게 소개해?”
그는 확실히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노물이었다.
앞의 대화를 감추기 위해 뻔뻔한 질문으로 모려원을 상대했다.
“그나저나 진 대협! 내가 곤경에 빠진 것도 빠진 거지만, 백향초가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어. 심지어 오늘 밤에 약초를 사용한다는 말까지 약시에 돌더라니까! 그래서 급히 달려온 것도 있어.”
그 뒤에 쏟아지듯 백면호리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언제 들었어?”
“약시에서 떠돈다니까. 이곳을 향해 백여 명이 온다는 말도 있었고.”
“아니. 오늘 밤에 약초를 사용한다는 말을 언제 들었냐고?”
진무린의 질문이 떨어진 직후였다.
팍! 파박!
별채의 대청을 가린 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휘릭! 땅! 휘리릭! 따땅!
진무린의 검이 번쩍이며 세 개의 암기가 바닥에 박혔다.
어쩌면 백면호리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모양새였다.
대청을 향해 몸을 돌린 진무린은 가볍게 웃은 뒤에 입을 열었다.
“그만 나오는 게 어때?”
끼이익.
대꾸처럼 별채 대청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선 것은 조응배와 유요, 여랑화로 전중방의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사악한 기운을 꽤 강렬하게 뿜어냈다.
“모산에서 왔나?”
“오호! 은천문 최고의 기재라더니 과연 보는 눈도 남달라!”
비릿하게 웃은 조응배가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세운 뒤에 왼손으로 받치듯 가슴 앞에 들었다.
그 직후에 담과 별채의 바깥에 걸어놓은 등이 저절로 허공에 떠올랐고,
“뭐야!”
백면호리의 고함이 꽥 터지는 순간에 대청을 밝히던 등이 둥둥 떠서 진무린의 앞으로 날았다.
“모 소저! 잠시 물러나 주시오.”
모려원은 확실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 지금은 잠시만 물러나 주시오.”
진무린의 요청이 떨어진 직후였다.
“뭐야? 모산이 왜 여기에서 나와?”
백면호리의 비명 같은 질문에 대꾸하는 것처럼 조응배가 주문을 외웠다.
“백면호리! 모 소저와 내 뒤로 움직여.”
“알았어!”
강호 경험이 풍부한 백면호리가 급하게 진무린의 뒤로 움직였다.
그 직후였다.
허공에 떠 있던 등이 진무린과 모려원, 백면호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모 소저. 우선 모산의 셋을 해결한 뒤에 설명하겠소.”
“알았어요, 진 대협.”
스으응.
모려원이 검을 빼 들었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운 감정을 이겨낸 그녀가 진무린을 돕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왜 지켜보는 거죠? 먼저 움직일 수 있잖아요.”
“등이 떠오른 순간 우리는 이미 술법에 걸렸소. 등 바깥으로 나서면 사로가 펼쳐집니다. 저녁을 준비한 방주가 돌아오면 저들의 술법도 더는 버티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전에 달려들 겁니다.”
진무린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조응배가 눈을 번쩍 떴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피를 머금은 듯 흉측한 붉은색이었다.
“과연 은천문의 기재답군! 언제부터 우리를 의심했지?”
“객잔에서부터! 진료 때 기감을 펼치고서야 확신이 들었지.”
“어쩐지 시간을 끌더라니!”
말을 마친 그는 좌우를 둘러 본 뒤에 유요, 여랑화와 함께 품에 손을 넣었고, 검지와 중지에 부적을 쥔 채 앞으로 내밀었다.
“모 소저. 환영이 시작됩니다!”
진무린이 경고를 던진 직후였다.
괴기스럽게 허공에 떠 있는 등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펄럭! 펄럭! 펄럭!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부적이 날아들었다.
화르르륵!
중간에 불이 붙은 부적은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조응배와 유요, 여랑화의 모습으로 변했다.
환영은 모두 한쪽 끝에 가죽을 감은 휘어진 날을 양손에 들었다.
“흐미!”
백면호리의 묘한 비명이 신호라는 것처럼,
쉑! 쉐엑! 쉐엑! 쉑!
세 명의 환영이 날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카앙! 카가강! 카강!
진무린이 둘을 맞았고, 모려원은 여랑화를 상대했다.
휘릭! 카앙! 휘리리릭! 카가강!
환영이라고 해도 저 날에 베이면 다치고, 급소를 찔리면 죽는다. 심지어 손에 전해지는 충격마저 생생했다.
“이크!”
백면호리가 바싹 따라붙었는데 둘을 상대하는 진무린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진 대협! 왜 죽이질 않는 거야? 얼른 끝내라고!”
백면호리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진 직후였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여섯 장의 부적이 또다시 날아와 허공에서 불탔고, 두 명씩의 조응배와 유요, 여랑화로 변해 달려들었다.
휘릭! 휘리리리릭! 휘릭! 휘리리릭!
진무린이 여섯 명을, 모려원이 세 명의 여랑화를 상대했다.
괴기하게 빛나는 등불에 의지한 채 검을 휘두르는 참이었다.
쉐에엑! 쉐엑!
과거를 잃은 모려원의 검이 어느 틈에 진무린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익!
검을 뻗은 모려원의 빈틈을 진무린이 메워주었고,
퍼러럭! 카가가강!
몸을 눕힌 모려원의 위를 날아 그녀의 앞을 막아주었다.
‘어떻게?’
상체를 비틀어 검을 찔러넣는 짧은 틈을 이용해 모려원의 눈이 묻고 있었다.
답을 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설명하겠소!”
“알았어요!”
총기 넘치는 모려원의 눈 끝에 믿음이 스친 직후였다.
휘릭! 휘리리리릭! 휘릭! 휘리리릭!
진무린을 믿으며 움직인 모려원의 검이 매섭게 바뀌었다.
휘리릭! 사악!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검이 여랑화의 목을 스쳤다.
“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렸고, 이어서 두 조각으로 잘린 부적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 대협! 조금 더 서두르라고!”
그 와중에도 백면호리의 움직임은 참으로 대단해서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에서도 악착같이 진무린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후의 대결은 일방적이었다.
휘릭! 사악!
“끄아아아-!”
조응배의 환영을 가른 진무린이 몸을 뒤틀며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휘릭! 사악! 휘리릭! 사악! 휘릭! 사악!
“끄아아아악!”
유요의 환영 셋이 바닥에 떨어진 직후였다.
펄럭! 펄럭! 펄럭! 펄럭!
다시 또 부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것들은 도대체 부적을 몇 장이나 지닌 거야!”
백면호리의 비난과 동시에 둥글게 휜 날을 쥔 조응배와 유요, 여랑화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진 대협! 언제까지 이렇게 부적만 상대할 셈이야?”
“이제 끝내야지!”
“그럴 거면 많아지기 전에 끝내지?”
“지금을 기다렸거든!”
몸을 날리는 진무린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높다랗게 떠오른 진무린은 하늘에서 내려온 무신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검을 휘둘렀다.
휘리리리리리릭!
“호오-!”
늦은 봄날에 흩날리는 눈발 같은 검광이 조응배와 유요를 뒤덮는 순간 백면호리가 속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화려해 보이는 저 눈발이 사실은 날카로운 검의 흔적이련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검광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휘릭! 휙!
허공을 두 차례 가른 진무린이 바닥에 내려서 검을 앞으로 늘어트린 직후였다.
“끄으…….”
피투성이가 된 조응배와 유요가 핏빛 눈에 불신을 한가득 담은 채 신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우리를 찾았…지?”
“너희에게서는 어울리지 않는 꽃향기가 나거든.”
“꽃?”
“아까 팔목을 붙들었을 때를 기억하면 쉽지.”
“이런 개 같은…….”
털썩! 터억!
조응배는 짚단처럼 뒤로 넘어졌고, 유요는 무릎을 꿇는 자세로 무너진 뒤에 바닥에 널브러졌다.
“끄아아악! 끄악! 끄아아아아!”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따라 환영이 연달아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것은 아직 많은 열에 가까운 여랑화였다.
진무린은 망설임 없이 여랑화의 모습 중 하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내 몸에는 손을 댄 적이 없는데?”
“멍청하기는! 백 가지 향을 지녀서 백향초인 것을 잊었나?”
“이런!”
둥그런 날의 가죽 손잡이를 움켜쥔 채 여랑화는 낭패한 얼굴이었다.
“완벽하게 속이겠다고 백향초를 지녔더니 그것이 죽음을 부를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죽음을 각오한 여랑화가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뭐지?”
진무린은 눈가를 좁혔다. 그 직후에.
“진 대협!”
백면호리의 외침이 터졌고,
쐐액!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를 피해 진무린은 상체를 비틀었다.
피윳!
섬뜩한 통증과 함께 왼쪽 어깨를 뚫고 튀어나온 검날이 진무린의 시선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 모려원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물러나고 있었다.
사매에게 이런 술법을 걸어두었던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내부의 위험을 막겠답시고, 척살령까지 내리려는 사매를 상대로 말이다.
‘사매를! 감히 너희 따위가!’
왼쪽 어깨에 박힌 검을 뽑지 않은 채 진무린은 몸을 날렸다.
휘리리리리릭!
분노가 담긴 진무린의 검광은 완벽한 폭설이었다.
휘릭!
검을 털어낸 진무린이 냉정하게 바라보는 앞에서 피에 절은 여랑화가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흥! 이렇게 해서 너의 사매도 끝이…….”
털썩!
여랑화가 바닥에 널브러지기 무섭게,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고, 여랑화의 부적들과 함께 허공에 떠 있던 등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