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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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95화
은천검제
제95화
하천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달려드는 바람이 제법 매서웠는데 운기를 마친 진무린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고, 양소소는 이런 날씨가 익숙한 투로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결에 반짝이는 햇살을 받으며 하천을 거슬러 올라간 양소소는 진무린이 건넜던 돌다리 근처의 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 층에 자리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반점의 총관이 익숙한 태도로 양소소와 진무린을 이 층으로 안내했다.
나름 치장한다고 했으나 어딘가 과한 느낌의 반점이었다.
밖이 보였다면 좋으련만 창을 닫아놓은 내부는 아래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찻주전자를 놓아준 총관이 궁금한 시선으로 진무린을 살폈다.
“멀리서 조카가 왔어요.”
“참으로 영민하게 생기셨습니다.”
“듣기에 나쁘지 않네요. 요리는 오늘 들어온 생선으로 해서 적당하게 준비해주고, 술은 홍관주로 부탁해요.”
“바로 올리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총관이 고개를 숙인 뒤에 아래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나는 물고기가 크기는 작지만, 맛이 제법 있단다. 홍관주는 붉은 생강을 저며 담근 술인데 향이 대단하지.”
모자를 벗어 의자에 내려놓은 양소소가 요리와 술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왕 왔으니 사흘 정도 묵었다가 출발하는 것으로 하자. 몇 가지 준비하는데 그 정도가 필요한 듯싶다.”
“사고께 공연히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그리 어렵게 대하면 재미없다니까. 본문은 다른 곳과 달리 분점이나 속가제자가 없어 도망갈 곳도 없잖니. 가끔 강호도 싫고, 본문에 있기도 싫을 때 고모에게 오는 것이 나쁘지 않을 텐데?”
보기 좋은 미소를 담은 양소소가 말을 이었다.
“사부와 사매, 사제가 있어 든든하다면 힘들고 외로울 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있을 때 투정 부릴 고모가 있는 것도 좋잖니.”
“감사합니다, 사고.”
고개를 숙이며 진무린은 진심 궁금한 점을 묻고 싶었다.
어떻게 상단전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내상을 입었는지 알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게다가 마주한 양소소의 기운은 여전히 평범했다.
궁금하기는 한데 함부로 등룡창천을 발휘해 살피는 것은 참으로 건방진 행동이고, 기분 좋게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꺼내기는 부담스러운 질문이어서 나중에 기회를 보기로 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내가 무관에 속했던 사실을 몰라.”
그때 마치 커다란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양소소가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알아도 문제지. 흉악한 자를 상대해달라고 달려오면 얼마나 난처하겠니?”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 재미있어서 진무린은 편안하게 웃음을 그렸다.
“이곳에도 흉악한 자들이 있습니까?”
“물이 닿은 곳은 모두 수채의 흉악한 자들이 온다지 뭐니. 워낙 사나운 데다 개중에는 무공을 익힌 자들도 있어 일반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더라.”
고개가 갸웃한 양소소의 말이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이 불의를 보며 참으면 안 되고, 다음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돕는 일이라 배운 까닭이었다.
“공연히 행패를 부리기도 합니까?”
“물길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간다는데 이 반점이 물 위에 떠 있는 것도 아니고 우습기는 하지.”
양소소의 답이 나온 뒤였다.
총관이 술이 담긴 단지를 들고 와 탁자에 올려주었다.
단지의 봉인을 뜯은 양소소가 두 개의 잔을 채웠다.
“향이 괜찮지?”
“예, 사고.”
“자! 만남을 기념하며 마시자.”
양소소의 권유에 진무린은 잔을 들어 시원하게 들이켰다.
홍관주는 제법 독해서 목과 가슴 안쪽에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가 코로 향긋한 생강 냄새가 넘어왔다.
“제자가 잔을 채우겠습니다.”
진무린은 얼른 단지를 잡아 다시 잔을 채웠다.
“사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리는 잔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달겠구나.”
두 번째 잔을 들이키기 무섭게 양소소가 다시 잔을 채웠다.
“이 잔은 조카가 다시 나를 찾아오기를 바라는 의미로 하련다.”
“반드시 사고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비슷하게 웃은 양소소와 진무린이 세 번째 잔을 비운 뒤였다.
그때쯤 요리가 나왔다.
생선을 날로 썰어낸 것과 행운을 상징하는 팔각 모양의 찜, 그리고 달고 매운 향료를 가미한 조림의 세 가지와 작은 게를 튀겨 양념을 끼얹은 것 한 가지였다.
나쁘지 않았다.
다만, 비린내가 풍기는 찜과 날로 썰어낸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원예라는 아이는 어떠니?”
“무슨 말씀이신지 제자가 못 알아들었습니다.”
“정인으로 발전할 소지는 없어?”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무공을 익히는 일 외에는 관심을 둔 적이 없습니다.”
“무인은 그래서 재미없어. 고수가 될 사람은 마음을 담을 공간과 여유가 없고, 반대로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이는 실력이 보잘것없어서 눈에 차지 않지.”
“그렇게 됩니까?”
“너는 아직 몰라서 그래.”
이때부터 오가는 대화는 주로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간혹 문주 임운령과 전도위가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실력이 부족한 데다, 이성 앞에서 입도 열지 못한 탓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진무린이 대꾸하지 못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모처럼 유쾌하구나. 술을 좀 더 할까 하는데 괜찮겠니?”
“제자 역시 아쉽던 참이었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구나!”
흥이 오른 양소소가 술을 주문했고, 총관이 곧바로 가져다주었다.
**
구금에서 풀려난 모려원은 가장 먼저 종무헌을 만났고, 다음으로 임운령과 함께 나섰던 사제에게서 당시의 상황을 모두 전해 들었다.
“대사형께서 등룡창천을 대성하신 거잖아?”
“입을 다물라 하여 함부로 언급하기는 어려운데 그 단계를 지난 것으로 보았습니다.”
“단계를 벗어나?”
어설프게 말을 꺼냈던 사제는 아예 때려달라는 투로 고개를 숙일 뿐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해는 간다.
당일의 진무린에 관해 입에 올리지 말라는 임운령의 지시가 있었다. 은천령으로 백승과 원고성의 목이 달아난 직후에 내린 문주의 지시를 어길 제자가 누가 있겠나.
이 정도면 추궁하는 쪽이 오히려 죄를 부추기는 꼴이었다.
“알았어. 가 봐.”
잡혔던 토끼가 달아나듯 사제는 급히 달렸다.
이미 등룡창천을 얻은 내용이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풍령관의 모습을 들어볼 때 소위 십이성이라 하는 대성을 이룬 것이 분명했다.
대사형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마음 같으면 당장 달려나가 힘이 되고 싶은데 무공이 유출되어 출입을 금하였으니 방법은 없었다.
풍령관을 무너트린 진무린이 마교로 향한다는 이 중요한 순간에 힘이 되기는커녕 기억의 중간 부분을 되찾지 못한 꼴이라 모려원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 위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문주께 매달리면 보내주실까?’
임운령이 사용하는 전각을 바라보던 모려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은천문은 애교나 투정 따위가 먹힐 분위기가 아니었다.
**
추가로 나온 술 한 단지를 모두 마시고서야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기운 덕분에 하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후련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적당히 마셨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점심이었다.
물결을 따라 햇살이 잘게 부서진 하천에는 작은 배 다섯 척이 떠 있었고, 그곳에 탄 어부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손에 잡은 줄을 연신 들었다 놓으며 고패질을 해댔다.
양소소는 배들을 향해 서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귀가를 재촉하듯 바람이 그녀가 쓴 모자의 날개를 흔든 다음이었다.
“은천문의 뒷산을 거닐던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시구를 읊는 것처럼 양소소가 나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화려하지 않았으나 빛나는 시절이었지. 이리 돌아보니 사람은 없고, 남은 건 추억뿐이네.”
말끝에 씁쓸하게 웃은 양소소가 진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모를 다시 찾겠다는 약속을 기억하지?”
“반드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사고.”
고맙다는 투로 웃은 양소소가 걸음을 옮겼다.
하천가에 서 있는 앙상한 나무와 그 사이를 걷는 양소소의 뒷모습이 몹시 외로워 보이는 겨울날이었다.
**
하후도는 청석이 깔린 마당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면은 마치 황궁에서처럼 높다란 단이 있었다.
그곳에 놓인 태사의에는 나이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노인이 앉았고, 다시 좌우로 장포 차림의 노인과 중년의 남자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멍청한 놈. 일을 맡겼더니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어서 공연히 우리만 드러나게 하다니.”
태사의에 앉은 노인은 말끝에 기가 막힌다는 투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흔한 죽여달라거나 기회를 달라는 말 한마디 못한 채 하후도는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 절치부심 그동안 공들였던 세월이 얼마냐. 네놈을 내보낸 것은 구주의 위치를 알아내 사전에 해결하기 위함인데 어설픈 짓으로 일을 망쳐놓았으니 백 번 목을 잘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말을 마친 노인은 더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놈이 건드린 곳이 모두 망가졌다고 들었소.”
“실제로 그러합니다. 은천문의 장로 둘은 자결을 택해 죽음을 맞았고, 풍령관은 아예 근거가 없어졌으며, 혈교는 무랍이라는 실력자를 잃었습니다.”
“정도맹은 어떻소?”
“이번 일로 정도맹과 구대문파의 태세가 바뀌어서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려면 또다시 평화가 이십 년은 이루어져야 가능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허허허.”
누가 들어도 기가 막혀 나온 헛웃음이었다.
“그래. 저 녀석이 어쩌지 못했다던 아이는?”
“피음향이란 곳에 도착하여 양소소란 계집과 함께 있습니다. 은천문 최초로 분가를 허락받았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계집이라 들었습니다.”
태사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중년인은 강호를 손바닥 안에 담은 듯 막힘이 없었다.
“재능이 뛰어나다니?”
“느닷없이 드러난 데다 암연과의 연계마저 끊겨 그 계집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속히 조사해 말씀 올리겠습니다.”
태사의에 앉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구주를 끌어내기 위해 그들이 얕볼만한 놈을 앞세웠던 것인데 저 멍청한 놈이 이토록 오래 공들인 일을 망칠 줄 짐작이나 했던가.”
노인은 참담한 심정을 쏟아낸 뒤에 시선을 떨궜다.
“궁도.”
“예, 태상.”
“이제부터 자네가 나서야 할까 보네. 만약 자네마저 구주를 끌어내는 데 실패한다면 아예 전면전을 벌이든가, 아니면 다시 몇십 년이 걸리더라도 계획을 원점으로 돌릴 생각이네.”
“태상께 기쁜 소식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꾸가 마음에 든 모양으로 태상이라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들으셨겠지만, 앞으로 궁도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주시오.”
“태상의 명을 받습니다!”
좌우에 서 있던 이들이 한목소리로 태상의 지시를 받았다.
“저 어리석은 놈은 어찌하면 좋겠소?”
이어 태상이 다시 질문한 뒤였다.
“더 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놈의 목을 잘라 어리석음을 벌하십시오!”
중간에서 한 걸음을 나선 노인이 답을 내었고, 둘러선 이들이 침묵으로 그 의견에 동조했다.
고개를 떨군 하후도를 태상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느냐?”
“소인이 강호에서 무공을 발휘한 것은 구주도 트집 잡기 어렵습니다.”
“허허허. 멍청한 놈.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조를 받았다고 구주가 그 일을 모를 것 같으냐.”
“구주가 나선다 해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태상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왕 죽을 몸. 소인이 진무린이란 아이를 상대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참으로 마지막까지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지금 네놈의 목이 달아나는 이유가 바로 그놈에게 무공을 사용한 때문임을 모른단 말이냐. 더구나 놈을 압도하지도 못했다면서?”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하후도의 청에 태상은 처음으로 노기를 내비쳤다.
“더 볼 것 없소. 저놈을 끌고 나가 더는 허튼소리를 못하게 하시오.”
“소인이 막았던 중단전을 구주가 풀어주었습니다! 또한, 구주는 소인이 무공을 사용했음에도 풍령관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주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상이 손을 들어 하후도를 데려가려는 이들을 막았다.
“소인이 놈을 죽이면 확실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구주가 나서지 못한다면 확실히 그들에게 곤란한 사정이 있는 것이고, 만약 나선다면 그때를 노려 구주를 멸하십시오!”
“실력을 갖췄을 때 구주와 전면전을 벌여라?”
“그렇습니다, 태상!”
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의 전면전이 두려워 우리가 이리 오래 공을 들였다고 여기다니. 너란 놈은 마지막까지 이번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였구나. 꼴도 보기 싫다. 어서 데려가.”
태상은 아예 질렸다는 투로 손을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