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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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93화
은천검제
제93화
백섭광은 뜻밖의 전갈을 가져온 중년 남자의 위아래를 날카롭게 살폈다.
“그만 가보리다.”
고작 몇 마디를 전한 그는 바로 몸을 돌렸고, 앞의 골목을 향해 몸을 틀었다.
당황스러웠으나 백섭광은 침착한 태도로 3층을 향해 올라갔다.
“루주. 총관입니다.”
언질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책을 읽고 있던 모양인지 원예는 서탁에서 시선을 들었다.
“진 공자의 전갈이라 합니다. 암연이 아닐까 추정되는 중년 남성이 말을 전하고 갔습니다.”
원예가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귀혼곡에 있는 요정이란 아이에게 소수음공을 전해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섭광은 들었던 바를 빠르게 전했다.
“이유는요?”
“그렇지 않아도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그 외에 어떤 내용도 알지 못한다는 답이 전부였습니다.”
원예는 서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시선을 들었다.
“진 공자께서 그 아이의 혈도를 바로잡아 주셨다고 했었던가요?”
“그렇습니다, 루주.”
“이것이 지시인가요? 청인가요?”
“전해주었으면 한다는 말로 보아 청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섭광의 답을 들은 원예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막무가내인가 싶은 모습 뒤에 치밀한 계산이 있고,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며 기대할 때면 또 대뜸 검을 꺼내 드는 분답게 참 종잡기가 어려운 청이네요.”
고민하는 눈치였다.
“소수음공을 바라보는 강호의 시선을 모르지 않을 분이 그 아이에게 가르치라 청하셨다?”
혼잣말을 뱉은 원예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
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모산의 앞에 도착했다.
기혈이 엉켰다고 하나 경공을 발휘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터였고, 무리할 정도로 급하게 달릴 이유도 없어서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불진과 목검을 걸친 운진은 변함이 없건만, 진무린은 등에 멨던 검을 내려 천으로 감았고, 이전과 달리 넉넉한 장포를 걸쳤으며, 머리 모양마저 바뀌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표정도 그렇다.
전에는 대들기조차 버거운 느낌이라면 지금은 한결 여유롭게 보였다.
“진 대협. 이제 언제나 볼 수 있겠소?”
내내 잘 견디던 운진은 막상 헤어지는 순간이 오자, 아쉬움을 이겨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갑시다. 노도가 진 대협을 배웅하리다.”
“문주께서 계단을 오르시는 것을 봐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모산이요. 노도가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을 당하겠소?”
“정 그러시면 제가 산 위까지 모시겠습니다.”
진무린이 나서자 운진은 그제야 더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많은 진 대협에게 어찌 그런 수고를 끼치겠소. 노도가 여기까지 배웅한 것으로 하리다. 그럼 부디 무탈하시길 바라오, 진 대협.”
서운함을 이겨내지 못한 운진이 품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진무린에게 건넸다.
“이것은 노도가 정표로 드리는 것이라오.”
“혹시 위기를 맞았을 때 매나 독사로 변신해 저를 지켜주는 것입니까?”
“허허허.”
진무린의 농담에 풀 죽었던 운진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웃었다.
“이 부적을 지니는 동안, 해충을 비롯한 벌레들이 진 대협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니 크게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노숙에서는 제법 힘을 쓰지 않을까 싶소.”
운진의 성의가 담뿍 담긴 부적이었다.
“문주께서 이리 주시는데 저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노도는 진 대협 덕분에 피의 술법에서 이리 몸을 건사했고, 또 앞으로 모산을 바르게 끌어갈 기회를 얻었소. 혹 이곳을 지나가거나 대업을 이루면 노도를 잊지 말고 꼭 한 번 찾아주시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당부를 전한 운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무린을 보았다.
“올라가십시오. 문주께서 오르시는 것을 보고 출발하겠습니다.”
“진 대협이 먼저 나서시구려.”
그렇게 또 서너 번을 서로 권한 뒤에야 운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모산에 놓인 계단에 올랐다.
구름이 산의 중턱을 둘러싼 바람에 불진과 목검을 든 운진은 하늘로 걸어 올라가는 신선의 모습인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해 그의 걸음은 애처로워 보였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진무린을 보았던 운진이 다시 걸음을 옮겨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날이 몹시 추워졌다.
오가는 이들은 솜이 두툼한 옷을 걸쳤고, 대개는 짐승의 털로 만든 모자를 머리에 올렸다.
진무린은 여유롭게 길을 걸었다.
걸친 옷 역시 두툼하게 바뀌었는데 다른 이들보다는 확실히 가벼운 차림이었다.
모산에서 운진과 헤어진 진무린은 곧장 팔경산으로 향했다.
들르는 객잔마다 풍령관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들렸는데 당최 제대로 된 이야기는 없어서 실없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또한, 검을 천에 감았고, 복색마저 바꾼 터라 진무린을 힐끔거리기는 했으나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짐작하는 이는 전혀 없었다.
객잔을 나서는 길에 진무린은 팔경산과 그 앞의 하천에 관해 물었다.
“산에 오르면 여덟 개의 절경이 보인다 하여 팔경산이지요. 가시는 길에 팔경산이 보이는 고개를 넘어서면 하천이 나오고 그 주변으로 피음향이란 작은 마을이 나옵니다.”
객잔의 노반은 제법 자세한 설명을 진무린에게 전해주었다.
길을 나선 진무린은 걷는 동안, 등룡창천과 상단전의 기운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고민했고, 틈이 나면 운기했다.
특별히 얻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 이상의 단계는 깨달음의 영역이거니 하는 심정으로 진무린은 조바심내지 않았다.
암연을 통해 은천문의 소식도 들었다.
백승과 원고성의 최후, 암연 외에는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임운령의 지시도 알게 되었다.
봉문 아닌 봉문이었다.
하기는, 검법이 유출된 마당에 실력이 부족한 제자들이 강호에 나섰다가는 자칫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터라 어쩌면 임운령으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 모든 지시에서 진무린은 제외였다.
‘새로운 무공을 완성해 돌아와라.’
어쩐지 일대종사가 되어야 가능한 임무를 맡은 듯해서 진무린이 씁쓸하게 웃을 때였다.
고개 앞으로 다섯 개의 손가락을 편 듯한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은 대로였다.
고개를 넘어서자 저 아래로 굽이친 물줄기와 한쪽에 묶여 있는 배, 크지 않은 촌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임운령은 분명 하천을 따라가다 보면 심사장이란 작은 장원이 나온다 하였다.
개천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하천이라 하기에는 작은 물줄기를 따라 진무린은 시선을 멀리 주었다.
혹시 동떨어진 곳에 장원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였다.
잠시 서서 아래를 굽어보던 진무린은 발길을 옮겼다.
먼저 장원을 알아본 뒤에 저녁 먹을 곳을 알아봐도 충분한 시간이어서 굳이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물가에서 마주치는 바람은 확실히 달랐다.
내공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겠구나 싶은 정도로 뼈를 파고드는 바람이 달려들었는데 진무린은 충분히 견딜 만했다.
누가 있을까.
과연 어떤 이가 있기에 임운령은 갇힌 듯 웅크린 피음향에 진무린을 가보라 했을까.
하천의 양쪽으로 나뉜 피음향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외부인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지 오가는 이들이 진무린을 힐끔거렸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소매에 양손을 엇갈려 넣은 남자는 진무린의 청에 걸음만 멈췄을 뿐 대꾸조차 없었다.
“심사장이란 장원을 아십니까?”
“그곳을 왜 찾으시오?”
그는 진무린의 위아래를 훑으며 경계하는 눈치였다.
“잠시 찾아뵐 일이 있어 그렇습니다.”
“저 다리를 건너 길을 따라 아래로 쭉 가시오.”
그는 끝내 소매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고개로 하천 옆의 길을 가리키고는 가던 길로 움직였다.
“고맙습니다.”
진무린의 인사에도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인심이 사납다고 해야 할지, 날이 추운 판국에 걸음을 멈춘 것이 싫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진무린은 돌로 만든 다리를 건너 들은 바대로 걸었다.
이각쯤 걸은 뒤였다.
오른쪽으로 굽이치는 길을 따라 걷는 진무린의 눈에 홀로 서 있는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앞은 하천이요, 뒤는 야트막한 산이어서 실로 몸을 숨겼다고 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낡은 건물은 그 흔한 명판조차 없었다.
정문은 오래되어 검은색으로 변했는데 심지어 문조차 잠겨 있지 않았다.
이곳이 심사장인지 아닌지는 들어가 물어보면 확실히 알 일이었다.
진무린은 문을 향해 다가가 조심스럽게 밀었다.
나무 뒤틀리는 소리가 날 거라 짐작했는데 의외로 조용하게 열렸다.
“계십니까?”
장원 안은 한 마디로 검소했다.
가산 따위 없었고, 그저 평범한 마당과 본채 건물, 그리고 광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전부였다.
“계십니까?”
진무린이 두 번째로 사람을 찾은 뒤였다.
본채 건물에서 중년 여인이 나왔다.
계단 두 개를 내려선 그녀가 진무린을 보고는 멈칫했다.
좌우로 갈라진 모자에 검은색 치마 안으로 바지를 입었고, 위에는 주황색 테를 두른 배자를 걸친 복색이었다.
곱게 나이 든 모습이었는데 눈매와 입술 끝에 담긴 한 가닥 고집도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기운인데?
진무린이 내심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무슨 일이지요?”
“심사장이란 장원을 찾고 있습니다.”
답을 들은 중년 여인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진무린을 살폈다.
“이곳이 심사장이에요.”
중년 여인은 진무린의 턱 아래에 닿을 정도의 신장이었다.
임운령이 가보라 했었다.
문주가 허튼사람을 찾으라 할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진무린은 바로 답을 하고 공손하게 양손을 잡았다.
“은천문에서 온 진무린이라 합니다.”
“누가 이곳을 소개해주었지?”
진무린의 출신을 알고 난 여인은 아예 말투마저 바꾸었다.
“문주께서 가보라 하셨습니다.”
“한심한 인사 같으니라고.”
반응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도대체 신분이 어떻게 되기에 진무린 앞에서 문주를 한심하다고 표현한 걸까.
진무린의 눈빛에 담긴 궁금증을 읽은 모양이었다.
“네가 문주라 칭하는 인사가 내 사제란다. 그 정도면 알겠니?”
중년 여인은 대뜸 신분을 밝혔다.
문주가 가보라던 심사장이고, 진무린을 상대로 중년 여인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눈앞의 중년 여인이 풍기던 익숙한 기운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진무린은 급히 양손을 다시 마주 잡고는 상체를 깊게 숙였다.
“제자 진무린이 사고를 뵙습니다. 몰라뵙고 바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네 말대로 몰라 그런 건데 인사는 그 정도면 됐다. 그만 몸을 세워.”
무가의 여자라기보다는 여염집 고모가 조카를 대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표정과 편안한 음성이었다.
“먼 길 왔으니 춥겠다. 들어가자.”
진무린을 재촉한 사고가 몸을 반쯤 돌리고는 진무린을 재촉했다.
“나에 대해 말해준 것은 있었니?”
“제자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양소소란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다니. 하여간, 문주라는 녀석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진무린은 자연스럽게 대청에 들어선 사고의 이름이 ‘양소소’인 것을 알았다.
“거기 앉아.”
대청으로 들어간 양소소는 화로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이가 나간 잔에 따라 놓아주었다.
“마셔. 몸이 녹을 거야.”
진무린에게 차를 권한 양소소가 한 잔을 더 준비해 입으로 가져갔다.
“사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혹시 짐작하십니까?”
진무린의 질문을 들은 양소소가 가볍게 웃었다.
“문주가 좀 엉뚱하지. 별로 웃기지 않은 말을 제 딴에는 재미있다고 내놓기도 하고. 계산이 깊은 척하는데 실속도 없어.”
문주를 이렇게 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임운령을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올라왔는데 그렇다고 진무린이 웃을 수 있는 대화나 자리는 절대 아니었다.
“강호의 여러 가지 일에 얽히는 꼴이 보기 싫으니까 잠시 이곳에서 머리나 식히라는 뜻 아니겠니?”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했던 진무린의 생각을 완벽하게 무너트리는 답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준비가 별로 없다.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내일 맛있는 것을 먹자.”
“감사합니다, 사고. 불편을 끼쳐드려서 송구합니다.”
“너무 어렵게 대할 것 없다. 내가 문주를 편히 입에 올리는 것 역시 본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니 너 역시 나를 사문의 어른이 아니라 고모로 대하면 돼.”
부드러운 양소소의 음성이 진무린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