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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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448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86화
은천검제
제86화
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임운령은 아직 궁금한 점이 남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하후도를 상대로 자신이 생겼다는 것이 상단전을 깨달았다는 의미냐?”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진무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해야 한다.
하나를 감추면, 둘을 숨겨야 하고, 그 후에는 뒤늦게 진실을 밝히거나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문주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근래에 이름과 출신을 밝히지 못할 분을 뵈었는데 그분이 하후도에게 당했던 제 중단전의 기운을 뚫어주었습니다.”
임운령의 표정을 살핀 진무린은 곧바로 설명을 이었다.
“그분 말씀으로는 하후도가 벽계의 인물이라 하였습니다.”
늘 담대하고 어떤 일에도 여유를 잃지 않던 임운령이 이때만큼은 놀란 얼굴이었다.
“듣기로 벽계의 인물이 강호에서 누군가를 해하면 구주와의 약조가 깨지는 탓에 하후도는 함부로 무공을 발휘하지 못한다 들었습니다.”
“너에게는 손을 썼다며?”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흠. 그런데도 네가 하후도를 상대하겠다? 다른 이를 해치지 못한다는 말을 믿고 달려드는 것은 아닐 테고?”
어쩌면 당연히 있어야 할 질문이었다.
또 진무린 역시 그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던 터였다.
“하후도의 무공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달려들면 그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도주하거나 너를 죽인다?”
진무린의 눈을 본 임운령은 기가 찬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벽계라는 이름도 어이가 없다만, 그런 자를 상대로 반드시 검을 내게 하겠다는 네놈도 이해하기 어렵다.”
쓴 입맛을 다시며 생각을 정리한 임운령이 결심한 투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진무린 역시 얼른 앉아 있던 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게 검법이 하나 있으니 너는 이것을 보고 눈에 담아두어라.”
“문주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편안했던 것과 달리 문주가 명했고, 은천문의 제자 진무린이 답했다.
제자들은 뒤편에 있는 상황이었고, 운진은 산으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검을 꺼낸 임운령은 검결지를 앞으로 내고는 짧게 호흡을 골랐다.
쉐에에엑!
임운령의 첫수는 섬전검법이었다.
쉐엑! 쉑! 쉐엑! 쉐엑!
이후에 임운령이 내는 검은 진무린이 처음 보는 검법이었다.
은천검법과 묵룡검법에 뿌리를 둔 것은 분명한데 초식은 물론이고, 변화와 운용마저 생소했다.
쉐에엑!
진무린은 숨조차 잊은 것처럼 임운령의 검에 집중했다.
저런 변화가 있다니!
때론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감탄했고, 이따금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한 가지 검인데 변화는 천 가지요, 변화의 끝마다 정수가 숨었으니 이는 내공에 매달렸던 진무린을 무섭게 꾸짖는 질책과 같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바를 알려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았다.
쉐에엑!
검을 휘감아 등 뒤로 세운 임운령이 검결지로 앞을 막은 뒤에 진무린을 보았다.
‘혹시 가주에게만 전해진다는 그 검법이 아닐까?’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진무린은 덜컥 놀라는 심정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보았느냐?”
“보기는 했으나 모두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이놈!”
냉정한 임운령의 질책이었다.
“무엇이든 한 번 보면 모두 기억하는 네놈이 그런 헛된 답을 내게 하느냐!”
“문주?”
진무린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투로 임운령은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 이것이 바로 은천문의 문주에게만 전해진다는 은천수호검이다.”
혹시나 해서 엉뚱한 답을 했던 진무린이었다.
은천령이 내려지면 임운령은 문주직을 유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당대에 한 번밖에 내리지 못하는 령이어서 임운령이 계속 문주 자리를 지킨다면, 은천문은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 은천령을 발령하지 못한다.
“제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건 네놈 사정이고.”
지금이 저런 농담을 할 때인가?
진무린의 시선을 받은 임운령은 네놈의 속쯤 다 들여다본다는 투였다.
“한번 은천수호검을 본 제자는 그를 물리지 못한다. 그러니 내겐 방법이 없다.”
“장로회의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내 앞에서 본문의 율법을 이야기하느냐?”
“죄송합니다, 문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멍할 정도의 대화가 오간 뒤였다.
“당장 물려주겠다는 것이 아니니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다만, 내일 대결을 앞두고 내공의 차이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교훈을 받았노라 여겨라.”
“예.”
은천수호검을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가르침이라 이때는 진무린도 공손하게 답을 내놓았다.
검 소리를 들은 모양으로 마침 운진이 내려오는 터라 임운령은 서둘러 검을 검집에 넣었다.
“노도가 가르침을 방해한 것은 아닙니까?”
“제자가 혹시 방심할까 가벼운 검을 보였을 뿐입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문주께서 이리 어렵게 대하시니 노도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넉넉한 대화를 주고받은 임운령과 운진이 자리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검을 들었더니 갈증이 올라옵니다. 가볍게 목을 축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노도는 산에서만 살아 술기운을 감당 못 하니 문주께서는 편히 하십시오.”
“그렇다면 좋은 차로 목을 축이면 되겠습니다.”
여유롭게 운진을 배려한 임운령이 제자를 불러 차를 주문했다.
그때 임운령은 보았다.
멍하니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진무린을 말이다.
운진이 왜 그 눈치를 못 채겠나?
게다가 웃으며 눈짓하는 임운령을 보며 진무린이 또다시 무언가를 얻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든든하고 뿌듯한 심정의 운진과 진무린이 대견한 임운령이 눈을 마주친 후에 비슷하게 미소 지었다.
**
풍령관은 관주 구양강을 시작으로 저 아래 수하까지 분주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일에는 그에 맞는 흥분도 따르련만, 오늘 풍령관의 분위기는 비장하고 날카로웠다.
“계곡의 입구를 보시오.”
구양강은 무랍 존자에게 팔관교의 아래를 가리켰다.
“좌측에 일백, 우측에 일백, 폭렬공을 익힌 도합 이백의 수하들이 몸을 감췄고, 주화입마에 들어 살인귀로 변한 수하 오십이 앞에서 대기 중이오.”
“흐음.”
황금색의 승관을 머리에 올린 무랍은 역시나 황금색 가사와 장삼을 걸치고 있어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이 강렬하게 번쩍였다.
“고수에게 숫자로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아시지 않소? 오백이나 천도 아니고, 고작 이백이라면 분명 아쉬운 숫자요.”
“마교의 폭렬공에 더해 섬전검법마저 익힌 수하들이외다. 화산의 청강이 셋에게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수긍하실 것이오.”
구양강의 자신 있는 설명에도 무랍은 어딘가 얕보는 눈빛이었다.
“진가 놈 일행이 만약 중간에 방향을 틀면 어쩔 참이오?”
“은천문의 문주까지 합류한 마당이라 반드시 이리 올 게요. 만에 하나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있다면, 존자께서 혈승들과 달려가 술법으로 혼란에 빠트려 주시구려. 그리하면 내가 수하들과 달려가 목을 가져오리다.”
시원하게 대꾸한 구양강이 뭔가 내리까는 시선으로 무랍을 보았다.
“그나저나 저들에게 모산의 문주가 있음을 고민하셔야 하리다.”
“흥! 모산 따위! 그들이 피라미라면 내 제자들은 강과 호수를 헤엄치는 잉어요, 대두어니 걱정할 것이 없소이다.”
구양강의 질문에 무랍이 불쾌한 듯 대꾸했다.
“내일 본 존자의 위력을 보여드릴 테니 공연히 관주의 수하들이 놀라는 일이 없도록 분명하게 전달해 놓으시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금관을 거친 햇살이 노랗게 주변을 물들였는데 마치 자부심을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회주는 언제 오신다 했소?”
“오늘 늦게나 내일 새벽녘에 도착한다고 들었소.”
이러거나 저러거나 대화는 끝났다.
“은천문도 이렇게 저무는가.”
난간을 짚은 구양강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혼잣말을 뱉어냈다.
**
황종관은 밤이 되기 전에 정도맹에 머무는 보우와 진섭자를 찾아가 마주 앉았다.
“들으셨겠지만, 은천문의 진무린이 풍령관에 홀로 맞서겠다고 나섰습니다.”
“그야 들었소.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맹주께서 빈승과 무당의 진섭자를 찾을 이유가 되는지는 모르겠소이다.”
“청강 진인께서 흉수에 의해 등선하셨음에도 장로회의를 차일피일 미루는 모습을 보며 맹주가 되어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한 점이 부끄럽고, 그런 이유로 더는 지켜보기 어렵습니다.”
“맹주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주시오.”
“두 분께서 소림과 무당을 대표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소강명 부맹주와 약연 장로, 자경의 처리에 대해 어떤 결정이신지를 알고자 합니다.”
보우의 요청에 황종관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바를 꺼내놓았다.
“맹주. 이는 사적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오.”
“사적이 아닙니다. 화산과 아미는 이미 이번 일에 의사를 피력했으니 두 분께서 동의하신다면 네 곳이 찬성한 것이 됩니다. 맹주인 이 몸이 나서면 남은 곳이 모두 반대해도 오 대 오가 됩니다.”
“흐음.”
보우가 신음을 터트렸다.
동률로 의견이 나뉘면 맹주가 표를 행사한 쪽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다.
황종관은 바로 그 규정을 꺼내 들었는데 점창과 공동의 장로를 뇌옥에 가두는 일을 그리 처리하기에는 보우와 진섭자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맹주. 그리 급하게 처리할 것이 아니라 각 문파의 의견을 좀 더 수렴하고, 입장도 들어봐야 할 사안이오. 그를 아시지 않소?”
이런 답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강 진인이 등선한 일은 화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도맹의 장로를 흉수가 살해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계십니까?”
허를 찌르듯 묻는 황종관의 질문에 보우는 쉬 답을 내지 못했다.
“청강 진인을 보내고 제법 일자가 흘렀습니다. 고약한 것은 이 일을 핑계로 장로회의가 미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래서야 정도맹이 왜 필요한 것인지 그 존재의 의구심이 듭니다.”
“맹주. 답답한 심정은 이해하나 말씀이 지나치시오.”
“내일 정오까지 답을 주십시오.”
“무엇을 말이오?”
“부맹주와 약연 장로, 자경의 구금에 관한 소림과 무당의 결정을 듣고자 합니다.”
“본파의 입장이라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오.”
보우가 난처한 기색으로 답을 내놓았는데 황종관은 그마저도 짐작한 눈치였다.
“내일 정오까지 답이 없다면 이 몸이 권한을 행사하겠습니다.”
“허어. 아미타불. 무엇이 맹주를 그리 급하게 내모는지 모르겠소.”
“지켜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구대문파를 대표할 두 분께 뜻을 전한 것으로 알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더는 말릴 분위기가 아니어서 보우와 진섭자는 가벼운 예를 보이고 황종관을 배웅했다.
지독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보우였다.
“혹시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이 두 분과 자경을 뇌옥에 넣는 일은 아니겠지요?”
“그랬다가는 점창과 공동이 맹주와 일전을 불사할 텐데 그 정도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대사와 빈도가 달려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지요.”
“아미타불.”
보우의 깊은 탄식이 두 사람의 심정을 대신했다.
**
은천수호검을 본 진무린의 충격은 제법 컸다.
단순히 내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이었다면 충격이라 말하지 못한다.
‘은천수호검을 발휘하는 문주와 대결한다면?’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의 시작을 본 느낌이었다.
우습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저런 검이 있음을 모르고, 등룡창천을 얻었네, 상단전을 깨우쳤네, 자만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만하고 저녁을 들자.”
임운령이 부르지 않았다면 밤새 산 아래를 향해 멍하니 서 있었을지 모를 정도로 진무린은 생각이 많았다.
밤이 깊어 운진의 잠자리를 먼저 배려한 진무린은 임운령에게 고하고 적당한 곳에 가부좌로 앉았다.
한번 보면 그대로 기억하는 재능을 아는 이는 임운령, 전도위, 그리고 모려원과 종무헌이 전부였다.
진무린은 풍령관을 향하며 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는데 이는 커다란 교훈이었고, 놀라운 가르침이라 할 만했다.
밤새 앉아 있던 진무린은 새벽녘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누워 있는 임운령을 향해 공손하게 읍을 올렸다.
풍령관으로 향하며 계획한 것보다 많은 책임이 어깨에 올라탔는데 진무린은 숨을 크게 한 번 쉬는 것으로 모두 털어냈다.
‘풍령관에서 시작한다.’
진무린은 먼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진인. 그곳에 계신다면 지켜보십시오.’
진무린의 생각에 답을 하는 것처럼 생각을 전한 직후에 날이 환하게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