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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84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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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84화

은천검제

제84화

 

원예가 소문이 자자하다고 했으나 진무린이 풍령관을 노린다는 사실은 풍령관, 홍화루, 은천문과 같이 정보력이 뛰어난 곳에 해당하는 일이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까지 아는 것은 아니었다.

진무린은 하루를 더 운진과 머무르며 상등의 반점에 들러 식사했고, 오후에는 중심가에 있는 장에 나가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평범하게 하루를 보낸 뒤였다.

두 사람은 다시 백섭광이 마련해 준 민가로 돌아와 차를 앞에 두었다.

“진 대협. 언제까지 이곳에 계시오?”

운진이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내일은 출발할까 합니다.”

“진 대협.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나 노도가 함께하면 어떻겠소?”

진무린의 행보를 아는 사람처럼 분명한 운진의 질문이었다.

“문주. 내일부터 향하는 길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곳입니다.”

“노도는 이미 피의 술법을 행하지 않았소? 다행히 양묘가 귀혼곡에 구금되어 한숨을 돌렸으나 이미 죽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몸, 진 대협의 곁을 따르고자 하오.”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운진은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도가 아는 진 대협은 청강 진인의 죽음과 죽은 자를 부린 술사를 두고 안락을 바랄 분도 아니오. 그렇다면 누군가는 술사를 상대해야 하지 않겠소?”

운진은 확실히 청강과는 달랐다.

완벽하게 신선을 연상시키는 청강과 달리 귀신을 쫓는다는 흔한 도사의 인상을 풍겼고, 움직임도 당당하다기보다는 움츠린 모양새며, 체형 또한 크지 않았다.

“진 대협. 혈교의 술법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쳐 얻는 사악한 것이라오. 그들을 노도가 상대하게 해주시오.”

그런 운진이 진무린에게 간곡하게 청을 건넸다. 그것도 비록 구대문파에는 비하기 어려우나 모산파의 문주인 운진이 말이다.

진무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시는 게요?”

“대신 조건을 하나 달겠습니다.”

“무어요?”

“제가 피하라 말씀드리면 어떤 경우에도 물러나시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고개를 삐뚜름하게 튼 운진이 진무린의 의중을 살피는 것처럼 눈가를 좁혔다.

“아직 위기가 있을 때 문주를 배려하며 검을 낼 실력이 아닌 터라 당부드리는 것입니다.”

“알겠소, 진 대협.”

“행여 제가 위험해 보이더라도 일단 몸을 뺀 뒤에 다시 도움을 주시면 주셨지, 망설여서는 곤란합니다.”

“알았소. 그렇다면 노도도 함께 나서는 게요?”

“혈교를 상대하자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입니다.”

진무린의 답을 들은 운진이 환하게 웃었다.

“출발은 언제로 생각하시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흐음.”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운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

 

은천문은 전에 없는 침묵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도위가 누군가.

당대 은천문 최고의 고수요, 역대 최고 재능이라는 진무린을 키워낸 자가 아니던가.

그는 강호에 나서 구대문파의 수결을 받았을 정도로 무공과 성격, 어느 것 하나 뒤지는 이가 아니었다.

또 있다.

그에게서 무공의 기초를 닦은 제자가 은천문 무인의 삼 할에 달하니 그것만으로도 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정치적인 문제에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고, 어떤 의견도 피력하지 않았던 그가 아직 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각에 검을 들고는 문주의 집무실 전각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은천령이었다.

문주 임운령이 자시에 은천령을 내리면서 령주를 전도위로 지정하였는데, 그는 또 순순히 그를 받아 문주의 전각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전도위가 령주인 은천령이었다.

명을 받은 은천문의 제자들은 사명감에 불탔다.

사위가 어스름하게 밝아질 때였다.

전도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무심한 놈.’

그는 진무린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암연의 장 노대마저 고개를 숙일 정도의 성품을 갖췄고, 모려원의 기억을 되찾았으며, 화산, 아미, 귀혼곡과 모산의 문주를 한편으로 만들었다.

그뿐이랴.

무엇보다 등룡창천의 초식을 이룬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청강의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나선다고 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나아가라. 이 사부가 뒤를 받쳐줄 것이다.’

진무린을 떠올린 그의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 가슴으로 올라왔는데 전도위는 그를 삼키지 않았다.

“호오오오-!”

은천문을 배반한 네 개의 가문에 주는 경고처럼 전도위는 솟아오르는 내공을 한껏 담아 사자후를 토해냈다.

지붕의 기와가 흔들리고 창이 떨렸으며, 그의 거친 사자후를 품었던 산이 연신 뱉어내는 바람에 은천문에 그의 패기가 파도처럼 연속해 몰아쳤다.

소매를 떨쳐 사자후를 자른 전도위는 지붕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제자들이 묵묵하게 검을 들고 자부심 넘치는 태도로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백승은 물론이고 원고성마저 좌불안석이었다.

느닷없이 문주의 은천령이 발령됐고, 앞으로 은천령이 풀릴 때까지 그 어떤 이도 들어오지 못하고, 나가지 못한다며 은천문의 출입마저 금했다.

이번 은천령을 발령하면서 임운령은 장로들의 의견 따위 묻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동안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인 움직임을 거부하던 전도위가 은천령을 받아 령주로 앞장섰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동이 틀 무렵, 은천가의 구성원 모두가 들을 정도로 거대한 사자후를 터트렸다.

날이 밝았다는 핑계로 움직이지 마라.

누구라도 령을 어기면 내 검과 마주하게 되리라.

사자후는 그의 무시무시한 경고와 같았고, 그를 들은 제자들은 환호하니 백승과 원고성이 목을 내걸지 않은 다음에야 전도위에게 대들 방법은 없었다.

또한, 아픈 것은 설사 두 가문이 모든 무인을 동원해서 달려들어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당했어. 완벽하게 당한 거야.”

백승이 집무실에서 분통을 터트렸으나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교활한 문주는 이럴 계획으로 장 노대를 버리듯이 상등에 보냈던 게지. 원 장로가 더는 정보를 얻지 못하도록. 무서운 인간. 그러고 전 사부를 저리 지붕에 올려놓다니.”

백승이 이를 갈며 혼잣말을 토해냈으나 실제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볼을 씰룩였다.

‘문주라면…….’

임운령은 반드시 풍령관으로 향했을 거다.

암연이 주워다 주는 정보가 있고, 진무린의 행보를 하루 단위로 얻어보는 임운령이라면 반드시 그리 달려갔을 것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이는 하후도와 구양강, 무랍 존자가 바라던 것과 일치하는 행보였다. 다만, 절차가 백승의 계획과 다를 뿐이다.

‘은천령이라니!’

임운령은 풍령관의 암계를 짐작하는 모양새였다.

만에 하나, 풍령관이 잘못되면 이런 사태를 알리지 못한 백승은 반드시 하후도와 구양강의 비난을 받는다.

기가 막힐 일이다.

일이 꼬이면 백승과 원고성은 은천문을 나서봐야 실 끊어진 연 꼴이 되기 좋았다.

‘이래서 나가고 싶은 가문은 나가라 했던가. 방심하게 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목을 움켜쥐려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던 백승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진무린이 풍령관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장로 모두 들었다.

그런데 어찌 일자를 짐작해서 문주 임운령이 이토록 서둘러 달려간단 말인가.

“젠장.”

백승은 거친 말을 뱉어냈다.

“장 노대! 그 늙은 것이 임운령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었구나! 원 장로에게는 마음이 이미 돌아섰던 게야! 우리의 출입과 심지어 만나는 이들조차 문주는 모두 알고 있는 게지!”

백승이 장탄식을 길게 내었으나 이미 후회처럼 한 걸음 늦은 일이었다.

지금은 어떤 판단을 내려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진무린은 간단하게 아침을 마친 뒤에 출발을 준비했다.

따로 소지해야 할 물건이 없는 터라 그저 일어나 길을 나서면 그만이었다.

“이제 일어설까 합니다.”

“그럽시다. 경공을 발휘하실 참이오?”

“오늘은 관도를 따라 걸을 계획이니 종횡주를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은 또 상황을 봐가며 정하겠습니다.”

“그리 간다면 노도야 더 바랄 것이 없소.”

풍령관으로 향하는 길이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운진은 진무린과 함께하는 사실이 기쁜 사람처럼 반가운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민가를 나선 뒤였다.

백섭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배웅하러 나왔던 길입니다. 혹 중간에 필요할지 몰라 간단한 요깃거리와 술을 가져왔습니다.”

“상등을 떠나는 것이 반가운 건 아니고?”

농담을 건넨 진무린은 그가 건네주는 보자기를 받아 어깨에 걸쳤다.

“대가는?”

“무탈한 모습으로 돌아오시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전과 확연하게 바뀐 백섭광의 태도가 의아했으나 출발하는 자리에서 굳이 따질 것은 아니었다.

“루주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부디 뜻을 이루고 돌아오십시오.”

인사를 마친 진무린은 운진과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오?”

“대략 닷새 정도 걸립니다. 급할 일이 없고, 도착하기 무섭게 적을 상대해야 하는 터라 굳이 경공을 발휘할 이유는 없습니다.”

“노도는 무인은 모두 어느 때고 경공을 발휘한다고 여겼더니 때마다 다른 모양이오.”

고개를 끄덕인 운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진무린의 곁을 따랐다.

오가는 이들의 복색이 두꺼워졌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였는데 진무린은 추위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문주께서는 춥지 않으십니까?”

“모산이 워낙 추운 곳인 데다 평소에도 온기가 없이 지내다 보니 이 정도는 상쾌한 축에 든다오.”

“한겨울은 어떻습니까?”

“그때야 당연히 두툼한 옷을 찾아 걸쳐야지요.”

뻔한 질문에 당연한 답이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진무린은 앞을 보며 걸었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풍령관에 누가 있을지 모르는 터라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이렇게 걸어가는 이유도 새롭게 깨달은 상단전을 하루라도 더 익힌 뒤에 도착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진무린은 상단전을 이용해 주변을 살폈으며, 사물이 지닌 기운을 알아차리려 애썼다.

등룡창천의 기운을 상단전을 통해 뿜어내면 사방의 모습이 그대로 뇌리에 그려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이 지닌 기운이 온전히 전달되는 터라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두 시진쯤 걸은 뒤였다.

“문주. 저 앞에서 잠시 쉬었다 갈까 합니다.”

“반가운 말씀이오, 진 대협.”

두 사람은 오르막길의 중간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갑자기 먼 길을 걷는 일이 힘들지는 않습니까?”

“종횡주를 안 쓰는 것에 감사하고, 다음으로 강호의 모습을 하나하나 볼 수 있어 피곤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오.”

진무린이 운진과 넉넉하게 대화를 나눌 때였다.

암연의 기운이 바위에 걸터앉은 진무린을 불렀다.

“문주. 근처에 본문의 사람이 와 있는 모양입니다. 다행히 주변에 해를 끼칠 인물이 없는 듯하니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괜찮겠소?”

“삼십 보 내에 있을 테니 문주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맙소, 진 대협.”

운진을 다독인 진무린은 길을 벗어나 뒤편으로 들어섰다.

“진 대협.”

나타난 이는 뜻밖에도 장 노대였다.

“문주께서 은천령을 발령하셨습니다.”

그는 포권을 보이기 무섭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령주는 전도위 사부로 지정하셨고, 문주께서는 현재 제자들 스물을 이끌고 풍령관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진무린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장 노대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나타난 것이 진 대협의 말씀에 대한 이 사람의 답입니다.”

시선에 담긴 질문을 알아챘을까.

장 노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문주께 알고 있는 사실 모두를 말씀드렸습니다. 은천령은 지금껏 잘못되었던 부분을 바로잡는 계기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진무린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고, 장 노대가 속 편한 모습으로 따라 웃었다.

“노대.”

“말씀하십시오, 진 대협.”

“이렇게 앞에 계셔 주신 점에 감사합니다.”

“진 대협께서 주신 조언이 아니었다면, 미욱한 이 사람은 지금도 흔들렸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 대협께만은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무린의 시선을 본 장 노대가 얼른 말을 이었다.

“선친께서 이 사람을 살펴주신 덕에 이 자리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아무튼, 잘 되었습니다. 문주께서는 언제쯤 풍령관에 도착하십니까?”

“대략 이틀 정도 걸리리라 예상합니다.”

“알겠습니다. 풍령관 앞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알려주십시오. 걸음을 조금 재촉해 이틀 내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략 이야기는 끝났다.

“문주께서 은천령을 내리신 후에 문을 나섰는데 그 점에 관해 묻지 않으셨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문주께서 수를 내시면 저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합니다. 분명 의도하신 바가 있을 테니 무탈하게 본문으로 돌아가시도록 보필하는 것이 제 임무라 생각합니다.”

장 노대가 질문했고, 진무린이 답했다.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장 노대가 포권을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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