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검제 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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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569회 작성일소설 읽기 : 은천검제 83화
은천검제
제83화
밤은 제법 쌀쌀한 한기를 동반했다.
운진을 염려한 진무린은 안으로 들어가 그와 마주했다.
“홍화루에 들르셨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찌 노도가 있는 곳을 알고 오신 게요?”
“문주의 기운이 워낙 청아해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가벼운 웃음이 지나갔다.
운진은 진무린의 변한 표정과 눈빛을 보며 무언가를 짐작한 모양이나 그에 관해 묻지 않았다.
“진 대협. 드릴 말씀이 있소.”
그 뒤에 그는 아미의 현절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죽었던 분들의 말씀을 문주께서 지시하셨단 말씀입니까?”
“혹여 일을 만든 것이라면 송구한 일이나 무엇보다 현절 장문인과 아미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리했다오.”
이미 지난 일을 더 말해서 무엇하겠나.
진무린은 잘했다, 잘못했다, 말하지 않은 채 덤덤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저는 화산의 장문인을 만났었습니다.”
그런 뒤에 진무린은 운기에 들어 눈을 떠보니 벌써 6일이 지났음을 털어놓았다.
“허어! 법력이 높은 불문의 승려나 도력이 높은 도사가 며칠씩 명상에 든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무공을 깨닫는 일에 그리 매달린다는 말은 처음이오. 과연 어느 분야든 경지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구려.”
운진은 먼저 감탄을 쏟아냈다.
“그래. 그토록 오래 시간을 매달리고 나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이 무엇이었소?”
혹여 얻는 게 있을까 하는 기대와 진심으로 궁금한 심정이 뒤섞인 운진의 질문이었다.
“깨달음 따위를 바랄 재능이 아닌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진무린의 답에 운진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였다.
담장 바깥에서 암연의 기운이 강하게 넘어왔다.
“본문에서도 연락이 끊겨 걱정했을 것입니다. 잠시 나가서 사유를 설명하고 들어오겠습니다.”
“그러시구려. 내 기다리리다.”
“반드시 돌아옵니다.”
운진의 염려스러운 당부를 기분 좋게 받은 진무린은 민가를 나섰다.
늘 말하지만, 굳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만나 암연이 추적당할 빌미를 주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기운을 뿜어낸 진무린은 예의 소능산으로 향했다.
어둠을 타고 냉기가 깔리는 시간이었다.
오가는 이들이 별로 없는 덕분에 진무린은 빠르게 소능산에 오를 수 있었다.
진무린에 의해 또다시 무너졌던 사당은 급하게 보수를 했던지 다시 절반쯤 새로운 모습으로 소능산을 지키고 있었다.
상등을 가득 메운 기와지붕들이 쭉 이어졌고, 그 가운데 화려하게 치장한 홍화루를 바라볼 때였다.
“진 대협.”
장 노대가 진무린의 뒤에서 나타났다.
“연락이 끊기는 바람에 본문에서 크게 염려했었습니다. 어찌 되신 일입니까?”
“청강 진인께서 전한 말씀에 얻는 것이 있을까 하여 매달렸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일자가 이리 지났습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장 노대가 부드러운 눈으로 진무린을 살폈다.
“뭔가 바뀌셨는데 이 몸은 무공을 제대로 몰라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이 깊고 걱정을 끼쳐드린 이후에 뵌 터라 그리 보이는 모양입니다. 본문에서 말이 많았을 텐데 사정은 어떻습니까?”
진무린의 질문에 장 노대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백 장로와 원 장로께서 두 차례에 걸쳐 진 대협과 모 소저의 처벌을 원하셨습니다. 현재 모 소저는 명성관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종 소협 역시 수련동에서 외부 접촉을 금지하였습니다.”
짐작했던 일이어서 진무린은 덤덤하게 장 노대의 말을 받아들였다.
“진 대협께서 본문으로 돌아가면 일단락되리라 기대합니다.”
“장 노대.”
“말씀하십시오, 진 대협.”
이번엔 진무린이 호흡을 고르는 것처럼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저는 본문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길에서 풍령관으로 가 구양강의 죄를 물을 것이며, 이어 마교를 찾을 생각입니다.”
장 노대는 꽤 놀란 눈치였다.
“부친을 잃은 제게 장 노대는 참 많은 것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이제는 방향을 정하십시오.”
무슨 의미인지 묻지 않았다.
다만, 장 노대는 무거운 얼굴로 진무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청강 진인을 잃었습니다. 사매는 기억과 검을 잃었고, 무공을 유출했다는 누명으로 힘들어합니다.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나설 텐데 그 길의 끝에 본문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진 대협?”
“노대께서 제 검 앞에 서 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혹여 그럴 일이 있다면 부디 노대만은 먼저 본문을 나서십시오.”
장 노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흔히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었다.
“홀로 그 모든 세력을 감당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풍령관은 홀로 갈 생각이고, 마교는 화산, 혈교는 아미와 함께할까 합니다.”
“혹시 이번에 얻으신 것이 있어 그리 결정하신 것입니까?”
장 노대의 질문에 진무린은 가벼운 웃음을 먼저 보였다.
“깨달음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장 노대의 결정이 움직이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런 의미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몸은 그저…….”
“압니다, 노대의 마음을. 그래서 이리 당부드린 것입니다.”
대강 대화가 끝났다.
“혹 본문을 나서게 된다면 남은 생은 부디 편안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더 말은 필요 없었다.
진무린은 넉넉하게 웃었고, 장 노대는 허탈한 미소를 그렸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뒤에 진무린은 소능산 앞에 펼쳐진 상등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장 노대의 기척이 사라졌는데 뒤를 살피지는 않았다.
**
이틀이 훌쩍 지나고,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풍령관의 팔관교 저 끝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듯 하후도가 내려섰다.
팔관교는 인공호수와 본채를 연결한 줄에 판자를 깔아놓은 형태라 어지간한 균형 감각이 없으면 좌우로 흔들린다.
허리 높이에 연결한 줄이 있기는 하나 그곳에 몸을 의지했다가는 오히려 기울어져 떨어질 정도로 위태로운 다리가 바로 팔관교였다.
그런데도 뒷짐을 진 하후도는 유유자적 걷는데 발이 판자에 닿지 않는 듯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과연 회주의 경지는 무섭소.”
황금색 승관에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황금색 가사와 장삼을 차려입은 무랍이 나직하게 내뱉었고, 구양강은 매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사는 이치고 일인자가 되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당연하게 구양강 역시 그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망쯤 품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 세상의 이치요, 강호일통은 하늘이 내려주는 연이 있어야 하리라. 그러니 강호의 세 가지 보물을 손에 넣든, 마교와 은천문의 무공을 동시에 익히든, 강호를 일통하여 종횡강호하는 꿈을 품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어서 오시오, 회주.”
“두 분을 기다리게 했으니 본회주가 후래자삼배의 벌을 받을까 합니다.”
“좋은 술을 석 잔이나 홀로 드시겠다니 그것은 벌이 아니라 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오?”
넉넉하게 웃은 하후도가 뒷짐을 지고는 앞에 펼쳐진 풍광을 둘러보았다.
“놈이 갈마천마저 쓰러트렸다는 소식에 어이가 없는 판에 공공연하게 이곳 풍령관을 노린다고 떠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오.”
“그렇지 않아도 소식을 들었습니다. 놈이 오만을 부린다면 이곳에서 명을 다할 테니 굳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 여깁니다. 게다가 기척을 감춘 아이들이 놈의 걸음을 지켜보며 보고하고 있어서 다른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구 관주께서 나선 행사에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그의 최후를 지켜볼 참이오.”
구양강의 보고를 들은 하후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 장로와 원 장로가 은천문의 문주를 이곳에 밀어 넣을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니 놈이 나타나는 날, 우리의 원대한 포부가 제대로 첫발을 내디디게 될 게요.”
“흠흐흐.”
구양강이 비릿하게 웃은 다음이었다.
“은천문의 문주와 놈을 쓰러트리게 되면 두 분은 나와 함께 강연회의 모임에 참석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오!”
그리고 이어진 하후도의 한마디에 구양강과 무랍은 과할 정도로 놀란 반응을 보였다.
“혁혁한 공을 세운 두 분을 어찌 가벼이 평가하겠소. 이 정도면 벽계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고, 더불어 강호일통의 대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리라 굳게 믿소이다.”
“흐하하. 이를 말씀이오. 본승이 이 손으로 구대문파를 움켜쥐어 모조리 본회장 앞에 꿇려 놓으리다.”
“그런 공을 세운다면 존자께서 본인의 위에 있으실 게요.”
“회주께서는 어찌 그런 민망한 말씀을 하십니까.”
겸양하는 말과 달리 무랍은 몹시도 흡족한 듯 승관이 빠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한 대화의 끝에서였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나 몇 가지를 준비했으니 아침을 드십시다. 자! 안으로 드십시오.”
구양강이 소매를 떨치며 안을 가리켰다.
“풍령관의 요리야 늘 기대가 크지요.”
두 사람을 재촉한 구양강은 본채로 들어서기 전, 확인하듯 계곡을 보았다.
언젠가 풍령관의 깃발이 강호에 휘날리는 날이 오리라.
그때는 반드시 뒷짐 지고 천하를 굽어볼 것이다.
짧은 순간,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
점심나절이었다.
임운령은 오랜만에 검을 꺼내 왼손 검지와 중지로 검면을 길게 매만졌다.
우우우웅.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점이 서운했던가.
투정하는 것처럼 검은 나직하게 울었다.
“문주라는 자리에 앉은 탓에 너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니 지금껏 홀로 둔 것을 너무 서운타 생각하지 마라.”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을 건넨 임운령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가 탁자에 검을 올려놓고 몸을 일으킨 뒤였다.
인기척이 들리더니 잠시 뒤에 전도위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전 사부. 그렇지 않아도 오실 때가 되었다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잠시 바깥을 보며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전도위는 말없이 임운령의 곁으로 움직여 창밖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각 가문을 상징하는 전각들이 무심한 태도로 창 앞에 서 있었다.
“밖이 소란스럽소. 문주께서 장로회의마저 무시한 채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말들이 많습니다. 알고 계시오?”
“무린이와 려아의 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놀라울 수 있으련만, 임운령의 말을 들은 전도위의 반응은 픽하는 웃음이었다.
“세상사 모든 일에 흥망성쇠가 있는 법, 어찌 본문라고 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점은 내가 문주를 맡은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니 정리되는 대로 직을 내려놓아 그 책임을 다할까 합니다.”
전도위는 잠시 백가와 원가가 사용하는 전각들을 차례로 보았다.
“허울 좋은 전각이 아니라 의지를 전승한 후인이 본문의 진정한 힘이 아니겠소. 그를 알기에 백 장로와 원 장로, 두 사람이 그 아이를 노리는 게지요. 그런 일에 굳이 문주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소?”
“저들은 암중 세력과 손을 잡았음을 감추기는커녕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머지 가문은 침묵으로 동조하며 이 몸이 자리를 비우기를 강요하는 중입니다.”
침묵하는 전도위 앞에서 임운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본문을 장악하고 싶겠지요. 그러지 못한 이유가 전 사부와 녀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데 등룡창천까지 얻었다 하니 어찌해서든 이 몸이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전도위가 재미있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문주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백 장로와 원 장로는 혼이 빠져나갈게요. 그 점이 우습소.”
“잠시 다녀오는 동안 고생을 부탁드립니다.”
“원로라는 이들이 본가의 진정한 힘을 모르고 암중 세력에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욕심은 과연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모양이외다. 이 몸의 수고는 생각하지 마시고, 문주께서는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되리다.”
웃음을 지운 전도위가 지금껏 보이지 않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개의 전각을 노려보았다.
**
점심이 지날 무렵에 진무린은 원예와 마주 앉았다.
“공자께서 풍령관으로 향하신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그렇게 되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이틀을 보내시는 건가요?”
진무린은 어깨를 살짝 들썩였을 뿐, 달리 답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대단한 계획이에요. 검을 한 번 내서 넷이나 되는 적을 한꺼번에 상대하시다니.”
“둘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나머지 둘은 누구지?”
원예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공자께서 모르신다니 소녀가 말씀드리죠. 풍령관으로 향해서 구양강을 잡으시는 것이 첫 번째.”
“그야 당연한 일이고.”
“암중세력과 손을 잡은 은천문의 배신자들이 날뛰게 해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인정한다는 투로 진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에 따라 마교와 혈교가 가만있지 못할 테니 풍령관에 힘을 합하거나 아니면 역시 암중세력과 손을 잡은 이들이 날뛰겠지요.”
“세 번째는 그럴듯해. 나머지 하나는?”
“만약 공자께서 앞에 셋을 모두 꺾는다면 정도맹과 구대문파에 속한 배신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어지니 자연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요.”
“너무 나간 거 아냐?”
“공자께서는 정말 홀로 상대하실 참인가요?”
“도울 사람이 없으니까.”
“문주와 함께 가세요.”
원예가 단호하게 말했고, 진무린은 의아한 눈빛이었다.
“공자께서 바라시는 계획대로 혈교의 무랍 존자가 풍령관에 있어요. 그의 술법을 문주가 상대하게 하세요.”
진무린은 잠시 침묵한 채 원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그래서 문주를 민가에 머물게 했나? 내가 풍령관을 노릴 것을 짐작해서?”
“너무 나가신 게 아닐까요?”
원예의 답을 들은 진무린은 가볍게 웃음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