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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천검제 80화

무료소설 은천검제: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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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은천검제 80화

은천검제

제80화

 

호북의 상등 흑사련 지부에 도착한 황종관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황종관만이 아니었다.

함께 도착한 보우와 진섭자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본파는 숭고한 사부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이 외부에 언급되지 않기를 바라고, 혹 알려진다 하더라도 왜곡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단호한 아미의 장문 현절의 태도가 의외였다.

“사부님께서는 높은 법력으로 혈교의 사술을 이겨내셨고, 그 와중에 진무린 대협과 모산의 운진 문주에게 크게 도움받았습니다. 앞으로 본파는 두 분에게 감사하고, 전력을 다해 혈교에 복수할 것입니다.”

조연명과 조성명, 그리고 열 명의 제자들까지, 모두 열두 개의 관 앞에서 황종관은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이후의 절차를 어찌 생각하시오?”

“모산 문주의 의견에 따라 이곳에서 화장을 모신 뒤에 유골을 본산으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황종관의 질문에 현절이 답한 내용이었다.

표시하지는 않았으나 불가의 도량이라는 아미의 장문인이 말끝마다 모산의 문주를 운운하는 것이 당혹스러운 것은 분명했다.

“일시를 정해주시면 정도맹이 준비하겠소.”

“맹주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대화는 끝났다.

황종관은 정도맹의 무인을 붙들었고, 보우와 진섭자는 각각 제자들을 불러 내막을 들었다.

죽은 자가 눈을 뜨고 의사를 전했다는데 더 뭐랄 것인가.

게다가 당사자 격인 아미의 현절 장문인이 그 말을 받아들였고.

의아한 점이 있었으나 운진을 추궁할 것도 아니고, 구대문파의 일원인 조연명과 조성명의 명예를 생각해서 황종관과 보우, 진섭자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진무린의 행방이었다.

“그렇다면 진 대협이 화산으로 출발했다는 말이냐?”

“목적지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청강 진인께서 등선하셨다는 소식을 전한 뒤에 바로 출발하였습니다.”

딱 떨어지는 명허의 답에 보우는 더 묻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장례를 마치면 우선 화산으로 향할까 합니다.”

“노납 역시 맹주의 의견대로 할까 하오.”

“빈도도 마찬가지요.”

결국, 일행은 먼저 아미의 장례를 치른 뒤에 화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어찌 이런 일이 강호에 연속해서 일어나는지.”

보우의 깊은 한숨이 어지러운 현재의 강호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한마디와 같았다.

 

**

 

은혼과 헤어진 진무린은 근처의 산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을 찾았다.

이 각쯤 걸린 뒤였다.

꽤 올라간 곳에서 처마처럼 나온 바위 아래로 움푹 들어간 공간을 발견했다. 앞은 말라붙은 잡목과 덩굴이 가려 외부에서는 쉽사리 찾기 어려운 장소였다.

가부좌로 앉은 진무린은 먼저 호흡을 골랐다.

청강이 남긴 가르침 덕분에 상단전을 이용하는 운기를 분명하게 느꼈는데 확실하게 얻은 것은 아니어서 부족한 부분을 재차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첫 번째 목표는 풍령관이었다.

지금 나선다 해도 쉽사리 밀리지 않으리라 자신한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으니 그 자리에 하후도가 나선다면 진무린은 아직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럴 때 상단전을 깨우는 가르침을 얻었다.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미래를 읽은 청강의 배려인지 모를 정도로 공교로운데,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일이었다.

진무린은 단전에서 일으킨 내공을 바탕으로 등룡창천의 기운을 펼쳤으며, 중단전과 상단전에 기운을 전했다.

아직 한낮이었다.

그늘진 자리 안쪽에서 묵빛 기운이 뿜어져 주변을 가렸고, 곧바로 거대한 꽃봉오리 형태로 변해 진무린을 감쌌다.

 

**

 

당황하고 놀란 가운데 장설군은 솟구치는 기운이 백향초의 덕분을 짐작했고, 이어 진무린을 떠올렸다.

음맥을 뚫기 위해 인도했던 당시의 흐름대로 백향초의 기운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힘겹게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장설군에게 진무린의 음성은 하늘이 주신 가피요, 그가 전해준 기운은 명을 구하는 한 줄기 빛이었다.

마지막에 입에 물려주었던 백향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은혜도 갚을 길 없는 판에 이제는 진무린이 인도했던 맥을 따라 백향초의 기운이 도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빛과 음성이 백향초의 기운으로 변한 듯 느껴져 장설군은 가르침을 받는 심정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분명 장삼도가 지켜보고 있으련만, 세상천지에 홀로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고요한 가운데 그는 오로지 몸을 도는 기운에 집중했다.

 “이런!”

지켜보던 장삼도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말로만 들었고, 책에서나 보았다.

장설군이 흘리던 땀이 회색으로 바뀌더니 그때부터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것을 말이다.

잘못되면 어쩔까 불안하나 이는 또한 장설군의 체질이 바뀌는 일이라, 복잡한 표정의 장삼도는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지켜보았다.

“오…….”

탄성을 지르던 장삼도가 재차 소리를 삼켰다. 

회색의 땀을 흘리던 장설군의 머리와 어깨에서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서였다.

장삼도와 장설군, 두 사람은 전혀 몰랐으나 이때 장설군은 세 개의 행운이 겹쳐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연을 얻는 과정에 있었다.

하나는 진무린이 음맥을 뚫느라 고수로 가는 중요한 맥을 다져놓았던 것이고, 거기에 기의 흐름마저 잡아주어서 삼도방의 심법이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점이었다.

이어 양묘의 수작 덕분에 백향초를 섭취했으며, 마지막으로 장삼도의 내공 수준이 부족해 기운이 마음껏 활개 치도록 놔둔 점도 기연이라 할 만했다.

만약 장설군이 삼도방의 심법을 이용하려 들었거나, 장삼도가 돕겠답시고 달려들었다면 남는 것은 주화입마밖에 없을 일이니 참으로 운이 겹치고 겹쳐 생긴 기사였다.

기연은 기연인데, 지켜보는 장삼도는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잠시 후, 장삼도는 인상을 찌푸렸고, 이어 고개를 모로 틀었다.

장설군이 입은 백색의 저고리와 바지가 회색 땀에 젖어 재를 뿌린 듯 누렇게 변했는데,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외면할 정도로 진한 악취가 풍겨 나온 탓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평생 두 번이랴, 세 번이랴.

그것도 죽을 날을 기다리던 자식의 일이니 장삼도는 혹여 놓치는 것이 있을까 줄곧 장설군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을 뿜어낸 장설군의 볼이 제 색을 찾았고, 한쪽으로 기울 듯 쓰러졌다.

“설군아!”

덥석 그를 안았던 장삼도가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오물통에 넣었다가 꺼내도 이보다 냄새가 역하지 않을 정도라서 그를 탓할 바는 아니었다.

“호흡이! 게다가 이 혈색은!”

장삼도가 터트린 외침대로 잿빛의 땀을 닦아낸 장설군의 눈가와 볼이 마치 아기 피부처럼 고왔고, 심지어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장삼도는 득달같이 노복을 찾았다.

하인들이 나무로 만든 욕조를 가져오고, 연신 물을 길어오는 동안, 노복이 장설군을 맡았다.

방주인 장삼도가 지켜보는 참이다.

하인들이 불평을 토해내지는 못했으나 욕조에서는 말할 수 없는 악취가 풍겼다.

“아직도 냄새가 이리 심하니 어쩐 일이냐?”

“물을 세 번이나 갈았는데 냄새가 가시질 않습니다.”

“내 너희에게 미안타.”

덩치가 커다란 방주가 다독이고, 오래 자리를 보전했던 장설군을 살피는 일이라 노복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씻기고 씻겼다.

다섯 번째 물을 갈 때였다.

내내 잠든 것처럼 늘어져 있던 장설군이 스르륵 눈을 떴다.

“설군아!”

“오오!”

다급하게 부르는 장삼도 옆에서 노복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장설군의 눈이 야명주처럼 빛나고, 눈과 눈 사이가 오목하게 올라 내공이 도드라졌음을 증명하는데 볼과 턱, 목, 심지어 손등까지 윤기가 흘러 과장 조금 보태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욕조를 나선 장설군이 아직 젖은 몸에 옷을 걸치고 장삼도의 앞에 섰다.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읍을 올리는 아들을 보며 장삼도는 아예 말을 잊지 못했다.

장삼도에게 인사한 장설군이 호흡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상상에서나 그리던 고수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

 

이틀 뒤, 화장을 마친 현절은 유골단지를 소중하게 품고 아미로 향했다.

이제야 진정 상등에서의 일을 모두 마친 모양새라 황종관과 소림, 무당은 화산으로 향했고, 하릴없이 남은 것은 운진이었다.

가진 여유도 없고, 진무린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모산으로 돌아가야 할까.

정도맹의 무인 둘이 지키는 흑사련 호북 지부에서 운진이 고민할 때였다.

“문주. 홍화루의 총관이 찾아왔습니다.”

정도맹의 무인이 찾아온 이가 있음을 알렸다.

“운진 문주십니까?”

“노도가 운진인 건 맞소. 무슨 일이시오?”

“홍화루의 총관 백섭광이라 합니다. 진 대협께 크게 신세 진 부분이 있어 모실까 합니다.”

“진 대협에게서 연락이 있었소?”

“조만간 있으리라 보는데 혹 거처하실 곳이 곤란하실까 찾아뵈었습니다.”

백섭광의 태도는 공손했다.

“어찌 처음 보는 분께 실례를 범하겠소. 자칫 진 대협께 누가 될지 모르고, 노도는 이 길로 모산으로 향해도 괜찮으니 총관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오.”

그러나 운진 역시 모산의 문주로 처음 보는 이에게 덜컥 매달리지 않았다.

“문주. 이미 방문한 적이 있기에 말씀드립니다. 홍화루는 귀혼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이안공자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총관이 그곳을 어찌 아시오?”

“외부에서 함부로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한 운진은 총관의 권유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곳에 객이 한 명 있소. 그분을 아시오?”

“백면호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아직 귀혼곡에 있습니다. 그의 딸 정아도 함께 있습니다.”

답을 듣고 나서야 운진은 그나마 경계를 한풀 늦췄다.

“이안공자께서 전하시기를 진 대협께서는 사유 없이 연락을 안 하실 분이 아니니 혹 어떤 일인지 밝혀질 때까지 홍화루가 문주를 모시라 하셨습니다.”

“흐음.”

홍화루가 있는 방향을 보았던 운진이 한숨을 내쉰 뒤였다.

“홍화루에 계시라는 것이 아니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진 대협의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만 신세 지리다.”

백섭광의 권유에 마침내 운진이 움직여서 두 사람은 흑사련 호북 지부를 나섰다.

 

**

 

귀주, 벽강의 낙정산은 풍광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했다.

낙정산은 다섯 개의 절벽을 거느렸는데 가장 좌측이 산을 깎은 천신이 검을 묻어두었다 하여 검묘애, 오른쪽은 선녀가 눈물을 감추기 위해 구름을 핑계 댔다 하여 운루애라 불렀다.

두 곳은 워낙 까마득하게 높은 것은 물론이요, 올라가는 길조차 없어 사람이 당도하지 못하는 곳으로 여겼다.

그 검묘애의 꼭대기에 놀랍게도 두 명이 마주했다.

탁자를 대신해 놓인 바위의 건너편에 앉은 것은 모사건에 모사복을 입은 하후도였다.

“다른 부회주들의 불만으로 친목이 상할까 염려되는 상황이오. 백 장로의 말씀대로라면 아직 부족해야 할 진무린이 등룡창천을 완성하였소. 이를 어찌 설명할 참이오?”

“회주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등룡창천의 초식을 이루었다면 반드시 본가에 알려야 할 일인데 전혀 들은 바가 없소이다. 은천문의 장로이자 백가를 대표하는 나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요.”

하후도의 표정을 살핀 백승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통해 놈은 말할 것 없고, 그의 사매와 사제를 원하던 대로 처단할 수 있으니 그 점을 보아주시오.”

연달아 나오는 백승의 말에도 하후도는 대꾸를 내놓지 않았다. 그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등룡창천의 초식을 보고하지 않았으니 무엇보다 본가의 규율을 어긴 것이요, 기인촌의 괴물들과 함께하였으니 강호의 풍속을 어지럽힌 것이며, 모가 아이는 검을 잃었고, 무공을 유출하지 않았소?”

“매번 같은 이유를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소. 그래서 어찌하시겠다는 말씀이오?”

“녀석이 종적마저 감춘 상태라, 더 할 수 없이 좋은 명분까지 얻었소이다. 내 돌아가는 길로 은천령을 강력하게 주장하겠소.”

백승이 자신 있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은천령은 문주의 임기에 단 한 번 내릴 수 있고, 이후에는 그 힘을 다한 것으로 간주하오. 은천령이 내려진다면 이후 장로회의를 통해 문주를 교체할 텐데, 이 몸이나 원고성 장로가 그 자리를 차지할게요.”

차가운 바람이 지나간 뒤였다.

“혹시 무랍 존자가 녀석에게 손을 쓴 것은 아니오?”

백승이 은근하게 질문했고, 하후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라 이토록 종적을 감춘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소이다.”

“화산의 청강이 남긴 말이 있다더니 깨달음을 얻는지도 모를 일이오.”

“흐하하! 늙은 도사의 말에 깨달음을 얻을 정도라면 본문이 어찌 구대문파의 위에 있다 장담할 것이며, 회주께서 이 몸을 선택이나 하셨겠소?”

통쾌하게 웃은 백승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맡겨두시오. 어떤 이유로든 은천령을 발휘하게 할 테고, 반드시 문주 자리를 차지해 회주의 원대한 계획에 일조하리다.”

“그렇다면 강호를 일통하는 것은 은천문이 되겠구려.”

“흐하하하! 이를 말씀이오!”

하후도의 말에 백승이 커다랗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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